81. 귀신
“헤이븐. 헤이븐!”
“……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정신 차려. 너 내일부터는 토벌 작전에 들어간다고.”
넋을 놓고 있던 일리안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 옆에 시선을 주었다. 그곳엔 에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진을 이용해 북부 지방에 도착한 지가 벌써 사흘 전이었다. 지원군으로 온 기사들이 토벌 작전의 격전지인 에오피아 산맥에 들어서고, 하루 정도 머무를 수 있는 임시 캠프를 설치했다.
내일이 되면 아마도 에오피아 산맥 한가운데로 들어간 선발대와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들을 만나기에 앞서 가벼운 오크 토벌이 있을 예정이라고 들었다.
그러니 에릭이 걱정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당장 내일부터 몬스터와 조우하고 검을 휘둘러야 할 일리안이 사흘 내내 멍한 얼굴이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된 것은 에릭이 가이우스와의 대화에서 자리를 비켜준 뒤부터였다.
“대체 왜 그러는데?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별 이야긴 안 했어.”
“그런데 왜 가이우스 경도, 너도 그런 얼굴이냐고.”
가이우스의 부탁에 잠시 자리를 비워주었던 에릭은 멀리 가지 않았다. 그녀와 할 이야기도 있었고,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 곳에서 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마주친 것은 가이우스였다. 그는 기다리고 있던 에릭을 보고선 잠시 멈칫하다 이내 고개를 한 번 까닥이고서 에릭을 지나쳐 갔다. 이상한 것은 가이우스의 표정이었다.
어딘지 혼란스러운 얼굴의 가이우스는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가이우스의 기색을 곱씹고 있던 에릭을 부른 것은 일리안이었다.
“에릭.”
“어?”
“이거, 도중에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뭐, 부상자들이 돌아갈 때 같이 가면 될걸.”
질문을 던지면서도 대답을 궁금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일리안은 제 어깨를 두어 번 주물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돌아가자.”
“뭐? 갑자기?”
“찾아야 하는 게 있어서. 아마도 곧 찾을 테니까.”
그 말에 에릭은 문득 5년 전 무술 대회가 떠올랐다. 실수로 벨로 숲에 들어섰다가 그녀가 갑작스레 에릭과 리트릭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찾아야 하는 게 있다, 고.
그리고 후에 율리어스와 함께 돌아온 일리안은 찾아야 하는 걸 찾았다고 말했다. 율리어스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한 채였다.
그녀는 아마도 모르고 있을 터다. 벨로 숲 때의 일과 이곳에서 겹치는 것이라고는 율리어스밖에 없다는 사실을.
“뭐냐. 머리를 왜 만져?”
“그냥. 머리가 긴 것도 잘 어울리네.”
에릭이 갑작스레 일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불쾌한 듯 눈을 찌푸렸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왜인지 에릭이 웃고 있는 탓이었다.
“헤이븐, 너도 고생이 많다.”
“헛소리할 거면 간다.”
“예, 예. 기사님, 잠자리를 준비할까요.”
일리안이 먼저 자리를 떠나자 에릭이 짧게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곧 저녁 식사를 한 뒤에는 서둘러 잠자리를 준비해야 했다.
“저녁 메뉴는 뭐 나오려나.”
“야채수프?”
“……헤이븐, 너.”
일전에 에릭이 별장에서 수프를 만들어주었을 때, 일리안이 몰래 도망친 적이 있었다. 그 기억으로 그녀가 놀리듯 야채수프라고 말하자 에릭이 발끈한 것이었다. 일리안은 개구지게 웃으며 앞으로 달려갔다.
에릭은 그녀를 따라 달려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코앞이 배급소였으니 굳이 따라 달릴 필요는 없었다.
그런 에릭이 일리안이 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을 때였다. 그의 가슴팍에 갑작스레 멈춰 선 일리안이 쿵 부딪쳤다.
“야, 갑자기 멈추면……. 어라.”
일리안을 나무라려던 에릭이 순간 말을 멈추었다. 기사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배급소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처음 함께 출발했던 3차 지원군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있었다.
거기다 아무리 봐도 평민 하급 기사로는 보이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고급스러운 검집을 허리에 찬 이들이 3차 지원군으로 왔을 리가 없었다.
“황궁 기사단이래.”
“뭐? 진짜? 어쩌다가 여기 온 거야?”
“토벌을 하다가 우연히 만났다는데……. 모르지. 리하르트 기사단한테 밀려서 이쪽으로 온 걸지도.”
“잠깐만, 그럼 오늘 밤은 저 사람들이랑 같이 자야 하는 거 아냐?”
에릭의 귀로 옆을 지나가는 무리가 속닥이는 말이 들려왔다. 화려한 제복을 입은 이들은 분명 황궁 기사단이 맞았다.
조금 놀란 얼굴이었던 에릭이 제 앞에 서 있는 일리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놀라기는 했지만 리하르트 기사단을 비롯해 황궁 기사단 또한 에오피아 산맥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금 놀라고 말았던 에릭과는 달리, 일리안은 어깨를 붙잡히자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에릭이 도리어 놀라 순간 손을 놓을 정도였다.
“뭐야. 헤이븐. 왜 그래?”
에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조금 굽혀 일리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리안의 바로 앞에, 황궁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는 핀튼 마을 산적단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과 똑같이 고급스러운 검집에 제복을 입기는 했지만 행동에서 나오는 미천함은 숨길 수가 없었다.
미래가, 흘러가고 있었다.
타파는 결국 시일이 당겨져 죽었다. 이 시대의 일리안 하인리히는 라울을 대신해 5년 일찍 사망했다. 그렇다면, 5년 뒤에 죽어야 할 일리안 하인리히를 대신해 이번에는 누가 죽는단 말인가.
에릭? 가이우스? 아니면… 율리어스?
섬뜩한 기분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발걸음을 주춤거렸다.
뒤로 물러섰던 일리안의 등 뒤로 무언가 부딪쳤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자 그곳엔 에릭이 미간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너, 이상한데.”
그가 뒤에서 일리안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 탓에 그녀가 다시 앞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는 이미 핀튼 마을 사내들이 배급소를 빠져나간 뒤였다.
그제야 일리안이 들이켰던 숨을 내쉬었다. 겨우 머리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헤이븐, 너 입맛 없으면 돌아가고.”
“……됐어. 먹으러 가자. 너도 배고플 것 아니야, 하루 종일 짐 날라서.”
“응.”
에릭도 배가 고프긴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안은 식사를 받기 위해 흰 접시를 들고서 배급소 안쪽으로 걸어갔다.
“방금은 왜 그렇게 질렸어?”
“귀신 봤다.”
“……뭐, 귀신? 너 그런 것도 보냐?”
귀신같긴 하지. 전생에서 날 죽였던 사람들이니까.
흰 그릇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야채수프를 뜨던 일리안이 속으로 덧붙였다. 그러나 이번엔 에릭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국자를 움직이다 멈칫했다.
“뭐야. 너… 귀신 무서워하냐? 기사가?”
“무섭기는, 뭘. ……그리고 나 이제 기사 아니라니까.”
“어째 말이 기사 아니니까 귀신 무서워해도 된다는 것 같다?”
에릭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딴에는 자꾸 농담을 하는 일리안의 말에 대답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남들이 보기엔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리안의 은근한 시선을 눈치챈 에릭이 얼굴을 구겼다. 그리곤 마지못해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귀신이 뭐가 무서워. 산 사람이 더 무섭지. 너 네 방 침대 밑에 귀신이 있는 게 무서울 것 같냐, 칼 든 남자가 있는 게 더 무서울 것 같냐?”
“귀신. 칼 든 사람은 내가 먼저 없앨 수 있을 것 같은데.”
“……헤이븐, 넌 조심성 좀 키워야 해. 어?”
아니, 찌르려고 하면 내가 먼저 찌르면 된다니까?
일리안이 오히려 더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릭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결국 말머리를 돌렸다.
“그게 아니라, 내 말의 요점은 귀신은 몰라도 사람이면 나를 공격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사람이 더 무섭다는 거다.”
“죽는 게 무서워?”
“뭐, 그렇지. 나 아직 스무 살이다. 할 일도, 해볼 일도 많아.”
그 말을 듣고서야 문득 에릭의 나이를 실감했다. 그녀는 40년을 살았고, 그러고도 헤이븐 윈터의 몸으로 들어와 5년을 더 살았다. 해보고 싶은 일은 대부분 해본 일리안과는 달리 아직 꿈도, 희망도 많을 나이였다.
그것은 에릭뿐만 아니라 율리어스도, 그리고 가이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고작해야 스물이 겨우 넘은 이들이었다.
“그러면 죽지 마라.”
“어?”
“죽지 말라고.”
일리안이 무덤덤한 얼굴로 에릭에게 말했다. 그는 그것이 토벌 작전에서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죽기에 많이 어리니까.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에릭의 말대로 그들은 아직 할 일도, 해볼 일도 많았다.
* * *
“헤이븐. 헤이븐?”
잠이 들었던 일리안은 누군가 자신의 몸을 흔드는 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려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는 아직 천막 내부가 새까만 어둠에 잠겨 있을 때였다.
한밤중이었다. 에릭과 일리안은 우연히 같은 천막으로 배치가 되었는데, 새벽부터 움직인다는 말에 해가 지자마자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이 났다.
“뭐냐.”
침상에 누워 있던 일리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그 옆에 커다란 강아지처럼 가만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에릭이 보였다.
내부는 깜깜했지만 차차 어둠에 익숙해지자 에릭의 얼굴이 슬슬 보였다. 그는 어딘지 머쓱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 헤이븐. ……무슨 소리 안 들리냐?”
일리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에릭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모로 돌린 게, 몹시도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그가 저녁에 귀신을 무서워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에릭.”
“어.”
“세상에 귀신 없다.”
한 마디 툭 던진 일리안이 다시 배급된 담요를 잡고 목 끝까지 끌어당겼다. 그에게 등을 돌리고 누우려던 참이었다.
“그게 아니라! 무슨 소리 안 들리냐고.”
에릭이 소심하게 일리안의 담요 끝을 잡고 당겨댔다. 귀찮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리?”
“들어봐.”
그 뒤로 에릭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일리안도 조용해진 막사 내부에 귀를 기울였다.
탁, 탁, 타악…….
그러자 놀랍게도 조그만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일리안도 순간 얼굴을 굳히고 그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소리는 막사 내부가 아닌 바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지? 들리지? 나, 잠귀가 밝아서.”
에릭이 어딘지 기세등등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일리안은 그런 에릭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서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
그러자 일정한 소음과 함께 누군가의 말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결국 일리안은 담요를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디 가냐.”
“확인해 봐야지. 무슨 소리인지.”
“……불침번인 거 아냐?”
당장이라도 나가려 드는 일리안에 에릭이 슬쩍 제 의견을 피력했다. 어딘지 나가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쪽은 거의 중심부인데. 불침번이면 바깥쪽으로 갔겠지. 그리고 순찰 도는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계속 소리 안 들려온다.”
일리안은 가벼운 겉옷 하나만 걸쳐 입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 뒤엔 커다란 덩치의 에릭이 바짝 붙어 따라갔다.
밖으로 나온 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리가 나온 방향이 막사의 우측이었으니 코너를 돌아 그곳으로 가보아야만 했다.
코너를 돌았을 때였다. 일리안이 갑작스레 멈춰 섰다.
“이걸 언제 다 해?”
“그래도 해야지. 여기 걸린 돈이 얼만데?”
“아니, 이거 맞추면 즉사라며. 그런데 왜 이렇게나 많이 필요한 거냐고.”
“목이 잘려도 살아 있을 수 있다잖냐. 시발, 이거 다 썼다간 목만 남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좀 호러다.”
단단하게 설치된 천막을 짚은 일리안의 손이 옅게 떨리었다. 오늘 저녁, 배급소에서 봤던 이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