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80화 (80/123)

80. 그러니 이번에는

“헤이븐… 리히?”

지원서를 읽어 내리던 가이우스가 자못 의문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인 탓이었다. 어쩐지 헤이븐 윈터와 일리안 하인리히를 합친 듯한…….

사진을 바라봤지만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단지 지원서의 이름 옆에 쓰여 있는 여자라는 글자만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직접 얼굴을 보면 되니까.

가이우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

“……그.”

어색한 침묵이 오갔다.

키가 못해도 180은 넘길 것 같았다. 거기다 넓은 어깨는 가이우스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튼 아무리 훑어봐도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부끄러웠는지 그의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 픽 웃은 가이우스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머리를 내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는 가이우스의 손길에 파드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자리를 잘못 찾은 모양입니다. 여긴 헤이븐 리히라는 사람의 자리군요.”

“……제, 제가 헤이븐 리히입니다.”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다못해 툭 튀어나온 목젖이라도 없었으면 그에게 혹시 여자였느냐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가이우스는 다소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여성,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그게…….”

“그게?”

“하아, 잘못 기재한 모양입니다.”

“이 지원서로 면접도 봤을 텐데요?”

“……면접관님들께서는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못 보셨나 봅니다.”

하?

가이우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를 따라 주변에 서 있던 기사들도 가이우스와 에릭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제껏 지원서와 지원자의 얼굴만 확인할 뿐 빠르게 넘어가던 가이우스가 움직이지 않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에릭은 더더욱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에릭의 축 처진 어깨를 바라보던 가이우스가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고개를 들어보세요. 얼굴을 봐야겠군요.”

이런, 망할.

그 말에 에릭이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을 겨우 덮는 앞머리가 있지만 그래봤자 하관은 모두 드러나 있었다. 가이우스 경은 이미 에릭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으니,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헤이븐, 모두 망한 모양이야.

눈을 질끈 감은 에릭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그도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고 아무리 있어도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눈을 감은 채 서 있던 에릭이 슬그머니 눈을 떠 앞을 바라봤다.

머리카락 사이로 익숙한 가이우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무감각한 얼굴로 에릭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에릭을 지나쳐 갔다.

“다음, 레오위드 경.”

가만히 서 있던 에릭이 눈을 끔뻑였다. 가이우스가 에릭이 헤이븐 윈터의 친구임을 모를 리 없으니 당연히 이대로 쫓겨날 줄 알았다. 가이우스라면 에릭이 헤이븐의 이름으로 이곳에 서 있는 것만 봐도 일이 어떻게 굴러갈지는 예상했을 터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에릭이 뒤를 돌아봤다. 그의 뒤로 지나쳐 간 가이우스는 이미 저 멀리 다다음 번 지원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 * *

아, 좁다.

짐마차에 웅크린 채 타고 있던 일리안이 제 어깨를 꿈틀거렸다. 그러다 팔꿈치에 부딪힌 물건 하나가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 하자 간신히 그것을 붙잡았다.

에릭의 말대로 일리안은 짐마차에 숨어 그와 자리를 바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삐거덕거리는 마차의 나무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에릭은 잘하고 있을까. 별일 없겠지.

3차 지원군의 통솔자가 가이우스긴 했지만 그를 만날 일은 요원했다. 통솔자란 자리에 있는 만큼 말단 기사인 일리안이나 짐꾼인 에릭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의 걱정이 되기는 했다. 만약 가이우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저지하려 들 테니까.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대체 왜 가이우스가 율리어스의 곁에 붙어 있지 않고 이곳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가이우스라도 율리어스의 곁에 붙어 있다면 이렇게도 걱정이 되지는 않을 텐데.

……자신도 모르게 율리어스를 걱정하던 일리안이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일리안이 도착했을 때 즈음에는 토벌단도 마무리에 들어가고 있을 터였다. 3차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따라가게 되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대로 가서 율리어스가 무사함을 확인하면 곧바로 에릭과 함께 수도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고작 그걸 하고자 토벌단에 지원해 북부 지방까지 온 것이었다.

단지 제 눈으로 그가 무사한 것만 확인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지. 인원을 확인한 뒤 마법진으로 이동한다!”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의 목소리가 나무판자 사이를 뚫고 들려왔다. 그 소리에 웅크려 있던 일리안도 슬슬 엉덩이를 털고 일어날 준비를 마쳤다.

에릭과 미리 약속해 둔 위치를 바꿀 기회였다. 바깥의 눈치를 보던 일리안은 제가 타고 있는 짐마차 주변을 돌아다니는 이들이 적어지자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두운 짐마차 안에 있느라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에 햇빛이 내리쬐자 순간적으로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런 일리안의 흔들리는 시야에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에릭이었다.

“에릭! 뭐야, 잘 넘겼나 본데. 별일 없었냐.”

눈에 빛을 적응시키느라 한쪽 눈을 움찔거리던 일리안이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덥석 잡았다. 사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데다 오랫동안 몸을 웅크리고 있어 중심을 잡기가 어렵기도 했다.

에릭이 자연스럽게 일리안의 허리를 잡고 곧추세워 주었다. 그제야 겨우 빛에 익숙해진 일리안이 눈을 제대로 뜨고 에릭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에릭의 얼굴이 어딘지 착잡해 보였다.

“얼굴이 왜 그러냐. 맞기라도 했어?”

“……야, 헤이븐.”

“어.”

그녀를 부른 에릭이 이제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사실 에릭의 머리 너머로 조금 더 큰 키의 사내가 1명 보이기는 했었다.

단순히 지나가는 행인이겠거니 싶어 그에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에릭이 옆으로 비켜서자 드러난 얼굴에 그녀가 작게 입을 벌렸다.

“반갑습니다, 헤이븐 님.”

“……그, 가이우스 경이, 여긴 왜……?”

“제가 3차 지원군의 통솔자입니다.”

그건 잘 아는데요.

일리안이 궁금한 것은 대체 왜 그가 에릭과 자신의 계획을 알고 있는 건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쫓아내지 않았는지였다.

선뜻 질문을 던지기를 망설이는 사이 가이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것도 에릭을 향해서였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습니까?”

“아, 음. 그러죠.”

가이우스와 일리안을 번갈아 바라보던 에릭이 먼저 손을 흔들고 자리를 떠났다. 그다지 아쉬운 기색은 없어 보였다.

“가이우스 씨.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헤이븐 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말에 일리안은 가이우스도 지금 상황을 미리 예측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만약 가이우스가 미리 예측했다면 율리어스도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하긴, 만약 그랬다면 일리안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몬스터가 기승이라. 약소하나마 저도 힘을 보태고 싶어서 왔습니다.”

물론 그런 가이우스에게도 자신을 죽인 사내들이 이곳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눈을 피하며 대충 둘러대자 가이우스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율리어스 님께서 아시면 돌려보낼 것 같아서……. 조금 거짓말을 했습니다.”

“……율리어스 님께서, 예. 그렇지요. 그분이라면 분명 헤이븐 님을 돌려보내셨을 겁니다.”

돌아가신 일리안 님보다도 더욱 신경 쓰고 계시니까요.

가이우스가 다소 자조적인 어투로 중얼거렸지만 일리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가이우스의 손을 덥석 붙잡고서 키가 한참은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할 일이 있는 터라……. 한 번만 눈감아주시면.”

“알겠습니다.”

“예?”

일리안은 도리어 자신이 더 놀라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부탁을 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가이우스라면 ‘아니요, 죄송합니다.’라며 거절하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가이우스가 율리어스에게 보고를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작성에 있는 사라와 펜서도 율리어스를 무척이나 아끼긴 했지만, 가이우스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그는 율리어스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런 가이우스에게 보고하지 않는 것은 곧 그를 배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리안은 그 사실이 믿을 수 없어 제 귀로 들은 말을 잠시 곱씹었다.

“정말이십니까?”

“잠시 보고를 미루겠습니다. 물론, 헤이븐 님께 위험한 일이 생기면 당장 알려드리겠지만요.”

“어째서요?”

슬슬 그가 자신을 속이고 율리어스에게 말해 당장 돌려보내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이우스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 사내였지만 율리어스와 관련된 일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어째서라 물으셨습니까.”

가이우스가 허리를 굽혔다. 그와의 키 차이가 제법 나는 터라 그제야 겨우 눈높이가 맞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양어깨를 짚었다. 낯선 접촉에 일리안이 일순 당황한 얼굴로 제 어깨를 짚은 손을 쳐다봤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꽉 쥐었다. 아프진 않을 정도였지만, 그 손길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일전에 그러셨지요.”

“무슨… 뭘 말씀이십니까?”

“일리안 님도 율리어스 님께서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틀림없이 도와주러 오셨을 거라고.”

“일리안도… 율리어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틀림없이 도와주러 왔을 겁니다. 틀림없이.”

분명 일리안은 이전에 가이우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가이우스가 일리안과 헤이븐은 다르기 때문에 도와주러 온 거라고 말해온 탓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반쯤은 가이우스의 일리안 하인리히를 매도하는 듯한 생각에 발끈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맘때쯤의 자신은 율리어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자신이 구해주었던 아홉 살 아이가 위험하다면 충분히 도와주러 올 마음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헤이븐 님.”

“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으신 겁니까.”

“비록 일리안 님은 돌아가셨지만 그 자리에는 지금 헤이븐 님이 계시지요. 이대로도 무난히… 그래, 예전과 마찬가지로 헤이븐 님은 그분을 거부하시고 율리어스 님은 조금씩 말라가는 것도 썩 괜찮은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가이우스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의 주군이 조금씩 말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하는 그의 말은 분명히 진심이었다.

당장에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

차선은 아닐지라도 차악은 될 수 있었다. 가이우스는 진심으로 율리어스를 걱정하고 존경했지만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선 몹시도 냉정했다.

“사람은 모두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거잖습니까.”

가이우스가 웃었다. 그의 웃음은 에릭의 것과 비슷했다.

무언가를 깨끗이 포기했을 때 나올 수 있는, 허무한 웃음. 가이우스가 그 웃음을 짓자 일리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헤이븐 님.”

“…….”

“저는 단지……. 그분이 잠깐이라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만 따랐더니 행복해질 수가 없으시지 뭡니까.

가이우스는 그렇게 덧붙이며 일리안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떼었다. 허리를 굽혔던 그가 제대로 서자 일리안은 다시금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던 가이우스는 이내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부디 도와주십시오, 일리안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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