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79화 (79/123)
  • 79. 스물네 살의 듬직한 여기사

    “안녕하세요. 혹시, 면접자?”

    “아, 예. 반갑습니다.”

    복도에 임시로 비치된 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일리안을 향해 활짝 웃었다. 턱 끝에서 찰랑거리는 머리가 잘 어울리는 기사였다.

    “진짜 긴장되죠? 잘되면 좋을 텐데……. 이거라도 들어가야 나중에 제대로 된 기사단에 지원해 볼 수 있잖아요.”

    “……이게 그 정도로 치열한 편입니까?”

    “뭐, 지원자는 많이 없지만 그래도 여자 쪽은 경쟁이 나름 치열한 편이거든요.”

    이거, 괜히 지원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리트릭과 에릭을 만나 카페에서 함께 토벌 작전에 참가하겠다는 말을 한 뒤, 신문으로 무소속 기사들을 모집하는 문구에 지원한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일리안은 부러 자신의 성 ‘윈터’를 적지 않고 헤이븐이라는 이름과 함께 단출한 지원서 한 장만을 제출했다. 붙는다면 좋겠지만, 꼭 붙지 않더라도 다른 방법은 있었기에 그리 기대하지 않던 것이었다.

    그리고 연락이 왔다. 리하르트 기사단 건물로 면접을 보러 오라는.

    그 연락을 받은 뒤부터 일리안은 몹시도 망설였다. 자신이 정말 이곳에 가도 될지 슬그머니 고민이 된 탓이었다.

    “그쪽 분은 왜 지원하셨어요? 역시 정식 기사단에 입단해 보려고?”

    “그건, 그러니까…….”

    사실 지원까지는 하지 않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율리어스에게 자신을 일리안으로 보지 말라고 말했었으니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핀튼 마을 산적단 사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죽인 이들이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미래가 완전히 바뀐 지금, 그들이 누구를 어떻게 죽이게 될지 몰랐다.

    황자가 산적단을 고용한 것과 기묘할 정도로 겹친 공동 토벌 작전이 그녀의 오래된 감을 자꾸만 건드렸다.

    “32번 지원자! 들어오세요!”

    먼저 면접을 보고 나온 단발머리의 여자가 일리안을 향해 힘내라는 듯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일리안 또한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시 앞을 바라본 그녀는 커다란 나무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손을 들어 문에 달린 손잡이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끼익, 거리는 흔한 소음도 없이 문이 열렸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슬며시 문을 밀자 천천히 안쪽에 있던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들어오세요.”

    일리안이 곧은 걸음으로 중앙까지 걸어갔다. 그들이 앉으라고 턱짓하자 고개를 숙이며 중앙에 놓인 나무 의자에 착석했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제껏 공작성에서 흔히 봐온 렉스 단장이나 가이우스 경은 사실 그녀 정도의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지금 면접장에 심사를 보러 온 이들만 해도 기사단에서 꽤나 높은 축에 드는 이들이었다.

    “반갑습니다, 헤이븐 씨. 지원서에는 성이 적혀 있지 않은데 이유가 있습니까?”

    성이 없는 이들은 대개 이제는 사라진 노예 출신이거나 머나먼 타국 출신이었다. 그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면접관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누락된 모양입니다. 헤이븐 리히입니다.”

    “리히? 특이한 성이로군요. 뭐, 좋아요. 토벌 작전에 참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토벌 작전이었죠?”

    안경을 쓴 여자가 종이 1장을 넘기며 물었다. 종이에 고정된 시선은 일리안에게 잠깐이라도 떨어지는 적이 없었다.

    “에디트 산 토벌 작전, 시트마 사막 토벌 작전……. 키아라츠 해 토벌 작전에도 참가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나 많이요? 그러기엔 나이가 제법 어려 보이는데…….”

    “종종 그런 이야기를 듣죠.”

    그제야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면접관이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일리안이 씩 웃어 보였다.

    열일곱 살 소녀, 거기다 고작 하급 기사인 일리안이 정식으로 신청했다간 지원서조차 읽지 않고 버려질 확률이 높았다. 때문에 일리안은 지원서에 자신의 나이를 스물네 살로 고쳐 작성한 터였다.

    토벌 작전은 길어야 2주였고, 거기다 위험 탓에 지원자도 많지는 않은 편이라 지원서는 한 번 보고 버려지는 게 보통이었다. 일리안은 나이를 속이면서도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웃었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본 기사단에서는 지원자의 목숨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점, 알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죽을 수도 있어요.”

    죽음. 그 단어가 그녀의 귓가에 꽂혔다.

    그녀에게 있어 죽음은 그다지 무서운 것이 못 되었다.

    이전 생에서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에게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서 강물로 뛰어들었다. 타파를 보낸 뒤 라울을 잃고서, 일리안은 제 곁에 더는 아무도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사실이 주는 영적인 외로움은 일리안조차도 쉽사리 웃으며 넘길 수가 없었다.

    라울을 잃었던 서른다섯 살부터 일리안은 죽음을 두려워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 이상 삶을 이어갈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일리안이 희미하게 웃자 면접관들이 그녀를 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려 보이는 얼굴로, 죽음을 논하며 저런 웃음을 짓는 이가 흔할 리 없었다.

    면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체력적인 부분은 이미 그전에 시험을 본 터라 보여주어야 할 것은 없었다. 질병은 없는지, 어떤 점이 자신 있는지 같은 상투적인 질문이 오갔다.

    마지막 질문에 다다르자 면접관 중 여자 1명이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특별히 기대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용기가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 말에 일리안은 눈을 끔뻑였다. 용기? 무난히 면접을 통과하기 위해 차분하게 대답을 해왔지만 이런 식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질문은 처음이었다.

    눈을 내리깐 채 고민에 잠겼다. 그녀가 움직인 것은 1분 남짓 흘렀을 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안이 의자 위에 올라섰다. 갑작스레 그녀가 움직이자 면접관들 또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의자 위에 서서 면접관들을 하나씩 내려다보던 일리안은 제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뒤로 넘어간 의자와는 반대로 일리안은 앞으로 떨어졌다. 의자 아래 바닥으로 착지하기 위해 뛰어내린 게 아니라 건물 위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몸에 힘을 풀고서 추락한 것이다.

    의자가 앉았을 때 발이 닿을 정도로 낮은 것이라는 사실이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정말 제 몸이 부러질 것은 한 치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처럼 바닥에 온몸으로 부딪쳤다.

    조금의 반사적인 반응도 없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자 면접관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거의 머리와 상체가 동시에 바닥에 닿은 터라 자칫하면 머리가 깨질 수도 있었다. 그 소리의 크기마저 심상치 않았다.

    “이, 이봐요! 괜찮습니까?”

    질문을 던졌던 면접관이 일리안에게 달려왔다. 바닥에 엎어진 일리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마가 붉게 물든 채였다.

    “제 용기는 이런 겁니다.”

    바닥에 주저앉은 일리안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몹시도 개구지게 보여서, 그녀가 방금 전까지 죽음을 결심한 사람처럼 의자에서 뛰어내렸던 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 * *

    “에릭?”

    윈터 저택의 정원에서 물을 주던 일리안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물뿌리개를 든 그녀의 눈에 저택의 대문 너머로 서 있는 에릭이 보였다.

    그가 휴가를 받고서 윈터 저택을 나간 뒤 처음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물뿌리개를 든 채로 일리안이 대문을 열었다.

    “붙었다며.”

    “토벌 작전? 어, 그렇게 됐다.”

    가타부타 붙었냐고 묻는 에릭이 아는 이유는 1가지밖에 없었다. 일리안이 토벌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기겁한 디노와 타피아가 그 사실을 에릭에게 일러바친 덕분이었다.

    디노와 타피아는 아직 에릭이 기사를 그만둘 것이라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녀를 말려 달라는 둘의 부탁에 등살이 밀린 에릭은 윈터 저택을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단지 디노와 타피아의 부탁 때문에 윈터 저택에 방문한 것은 아니었지만.

    “3차 지원군?”

    “응. 너도 그렇지?”

    “난 이제 기사가 아니니까. 보통 짐꾼은 3차로 들어가지.”

    선발대로 출발한 리하르트 기사단과 황궁 기사단은 이미 북부 지방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그들을 통솔하는 황자와 율리어스 또한 함께 떠났다는 것을 신문으로 본 바가 있었다.

    물론 상급 기사인 리트릭 또한 선발대로 떠났다. 둘만 남은 에릭과 일리안만 곧 3차 지원군으로 떠날 준비를 마쳐야 했다.

    에릭을 지척에 있는 의자에 앉힌 일리안은 정원에 주고 있던 물을 이어서 뿌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토벌 작전으로 몬스터를 마주할 사람답지 않게 놀라울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그 어느 곳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일리안을 허탈하게 웃으며 바라보던 에릭이 입을 열었다.

    “사흘 뒤?”

    “어, 사흘 뒤라더라.”

    “내가 데리러 올게.”

    그의 말에 일리안이 에릭을 보지도 않고서 손을 내저었다.

    “됐다. 어차피 모이는 장소가 여기서 멀지도 않아.”

    “……너, 모르나 본데.”

    “뭘?”

    에릭이 미간을 구겼다. 어쩐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3차 지원군 통솔자가 누군지 아냐.”

    “누군데?”

    “가이우스 경.”

    그러자 일리안이 멈칫했다. 그녀는 그제야 물뿌리개를 내려두고서 에릭에게 눈길을 주었다. 눈빛에는 그 말이 사실이냐는 묵언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대체, 왜? 율리어스 님과 같이 가지 않았다고? 가이우스 경이?”

    “어. 리트릭한테 들었으니까 확실해.”

    지원서에 적당히 스물네 살의 성이 누락된 헤이븐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였다. 그곳에서 가이우스를 만나기라도 하는 순간, 북부 지방으로 떠나기도 전에 모든 계획이 무너질 게 분명했다.

    차라리 이미 북부 지방에 어느 정도 들어간 뒤라면 가이우스에게 들켜도 상관이 없었다. 그때는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 일리안은 심각한 얼굴로 들키지 않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짐마차로 들어가.”

    “뭐?”

    “네가 내 자리로 들어가라고. 어차피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정렬해서 확인할 테고, 그때까진 내가 네 대신 거기 서 있을 테니까. 나중에 바꿔.”

    지원서에 여자라고 작성했으니 지원서와 에릭을 두고 비교하면 곧장 들통 날 게 뻔했지만, 보통 그 정도로 꼼꼼히 신원을 확인하진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에릭과 일리안은 곧 방법을 만들어갔다.

    그 뒤로도 제법 구체적인 계획들이 오갔다. 언제 서로 원래 자리로 돌아갈지, 만약 계획이 망가진다면 두 번째 계획은 무엇인지.

    처음엔 타피아와 디노의 부탁으로 슬쩍 가지 말 것을 권유해 보려던 에릭은 어느새 일리안과 한마음 한뜻으로 계획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들이 친구인 것에는 무릇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몇 가지 많은 방법들을 준비한 일리안과 에릭에게 사흘 뒤는 빠르게 다가왔다. 약속한 대로 얼굴이 최대한 가려지도록 마법으로 앞머리를 늘린 에릭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서 하나씩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에릭과 일리안은 제법 많은 계획을 세워왔다. 만약 기사 중에서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으면 어떻게 할지, 다시 서로의 자리로는 언제 돌아갈지, 같은 이야기들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에릭과 일리안의 예상에는 없던 것이 있었다.

    에릭이 서 있는 줄의 가장 앞에서부터, ‘가이우스’가 직접 지원서를 들고 기사들의 사진과 얼굴을 대조하고 있었다.

    졸지에 스물네 살의 듬직한 여기사가 된 에릭은 멍하니 가이우스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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