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78화 (78/123)

78. 같이 가자

“황궁이요?”

“예, 곧 황궁 기사단과 리하르트 기사단이 북부 지방으로 토벌을 나선다지 않습니까. 겨울철이라 한창 먹잇감이 부족한 몬스터들이 날뛸 때라……. 그중 저희는 황궁 기사단의 무기를 맡았습죠.”

황궁 기사단과 리하르트 기사단이 종종 함께 토벌을 한다는 것은 일리안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걸리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토벌이라……. 매년 겨울마다 했던 그거요.”

“예, 예. 제국민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죠. 그런데 이번엔 특별히 황자 전하와 리하르트 공작 전하께서도 직접 참여하신다지 뭡니까? 손수 진두지휘하신다 덥니다. 그러니까 모쪼록 조금의 시일을 주시면…….”

황자와 율리어스가 직접 참여한다면 이제껏 해왔던 토벌 작전보다 더욱 대대적인 작전일 터다. 리트릭으로부터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를 들었던 일리안은 갑작스레 열린 토벌 작전에 신경이 곤두섰다.

“기한이 언제까집니까?”

“기, 기한이요?”

그리드만은 기한을 묻는 이야기에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그녀가 전정 가위를 몹시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사, 사흘입니다…….”

“사흘이요? 양이 얼마나 되기에 고작 그것만 준답니까?”

“그렇지요?! 저희 대장간에만 검 300개를 주문했는데, 그걸 사흘 만에 만들라고 하지 뭡니까! 하아, 그런데 닷새 후에 곧장 북부로 떠나는 터라 어쩔 수가 없답니다. 저희야 뭐,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이건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드만이 과장스럽게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곤란함을 피력했다. 슬쩍 일리안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주문 기한을 늘릴 기회를 살피기도 했다.

“닷새 후에 곧장 출발이라.”

“예, 그러니까 딱 10일만 주시면…….”

“그럼, 전정 가위는 닷새 뒤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예?”

말을 마친 일리안은 서둘러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남아 있는 그리드만과 문하생들만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아직 오후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토벌 작전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일리안은 먼저 리트릭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근무 중일 그를 만나기 위해 리하르트 공작성으로 갈지, 아니면 리트릭의 부모님을 다시 만나 뵈러 갈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야, 헤이븐!”

“……리트릭? 네가 여길, 마침 어떻게?”

“아버지가 너 이쪽으로 갔다던데. 나 화원에서 오는 길이거든.”

아무래도 근무 중에 나온 모양인지 리트릭은 리하르트 기사단의 제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일리안이 마침 잘되었다는 듯 그의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잘됐다. 할 이야기도 많은데.”

“아니, 아니! 잠깐만. 헤이븐, 내가 먼저.”

“……뭔데?”

“전에 내가 그랬었지. 나중에 잘못하면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그거 지금 쓸까 하거든?”

리트릭이 답지 않게 멋쩍은 얼굴로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일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제 뒤를 향해 턱짓했다.

그의 뒤에서 나온 이는 에릭이었다. 다소 살이 빠진 에릭이 멀끔하게 옷을 차려입고서 그녀의 앞에 섰다.

“……헤이븐.”

“뭐냐, 이건.”

일리안이 무감각한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에릭은 차마 그 눈빛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툭 제 고개를 떨궜다.

그 분위기를 무마한 것은 리트릭이었다. 그녀와 에릭 사이를 막아선 리트릭이 제 양손을 흔들며 분위기를 깨트리려 노력했다.

“우리, 친구잖아. 어? 너 이대로 에릭 얼굴 안 볼 거 아니지? ……아니, 에릭도 사과하고 싶어서 그래. 이렇게 끝낼 수는 없잖아.”

일리안이 막아선 리트릭의 어깨를 옆으로 밀어냈다. 얼떨결에 옆으로 밀려난 리트릭은 그녀와 에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에릭이었다. 가만히 일리안을 주시하던 에릭이 그녀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일리안은 고조 없는 눈길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뭘?”

“라울을 납치한 것, 너를 함부로 대한 것, 그리고……. 네게 친구 이상의 마음을 가진 것.”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에릭의 눈빛은 담담했다. 몇 주 전, 식지 않을 것만 같던 눈빛으로 일리안을 바라보던 그는 오간 데 없었다. 그는 정말로 초연하게 제 잘못을 빌고 있었다.

“에릭.”

“어.”

“네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냐,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냐.”

그 질문에 에릭이 고개를 들어 일리안을 바라봤다. 그제야 그녀의 눈빛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이제는……. 널 그만 좋아하고 싶어서.”

에릭은 웃었다.

좋아하고 싶지 않다는 그 말 한마디에 에릭의 모든 마음이 담겨 있었다. 차마 그녀에게는 전해주지 못한 것까지, 모두.

그런 에릭의 웃음을 내려다보던 일리안이 그의 앞에 성큼 다가섰다. 그녀는 에릭과 눈빛을 주고받다 손을 들어 올렸다.

따악.

그의 이마가 붉게 달아올랐다. 장난이라도 치듯 손가락으로 에릭의 이마를 두드린 일리안이 먼저 등을 돌렸다.

“가자. 할 이야기가 많다.”

* * *

근처의 카페에 도착한 3명이 순서대로 자리에 앉았다. 일리안의 옆자리는 리트릭이 차지했고, 그의 맞은편에는 에릭이 있었다.

리트릭은 아직 일리안과 에릭의 어색한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듯 자꾸만 둘의 눈치를 살폈다. 별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사건이 해결되니 기분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리트릭. 할 이야기가 많지?”

“어? ……어! 먼저 이 이야기부터. 내가 고민하다가 가이우스 경에게 먼저 말씀을 드렸거든. 그 왜, 그전에 말한 황자 전하의…….”

리트릭이 말을 마치기 전에 에릭을 슬쩍 바라봤다. 지금 하는 이야기가 그와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 탓이었다.

“말해. 친군데, 뭐.”

친구?

리트릭은 일리안의 친구라는 발언이 에릭에게 상처가 될까 조심스러운 듯했지만, 의외로 그는 슬쩍 미소 짓고 있었다. 거기에 마음을 놓은 리트릭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율리어스 님께서 목표라는 거. 그런데 가이우스 경께선 그다지 놀라지 않더라.”

가이우스를 만나러 갔을 때였다.

“저, 가이우스 경. 이전에 헤이븐과 거리에서 황자 전하를 마주쳤었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율리어스 님을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리트릭 딴에는 제법 긴장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본래 제 상사인 렉스 단장에게 말하는 것이 옳았지만, 율리어스에 관련된 일은 누구보다도 가이우스에게 말하는 게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한 행동이었다.

가이우스는 그의 이야기를 곰곰이 들었다. 그러다 기나긴 설명을 마치자 물어왔다.

“헤이븐 님께선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 헤이븐이요? 그냥, 어, 그냥……. 걱정… 하고 있겠지요?”

공작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가이우스의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헤이븐이 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탓에 리트릭은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말을 둘러대었다.

그러자 가이우스가 웬일인지 환하게 밝아진 얼굴이 되었다. 율리어스가 노려지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는데도 그러했다.

“헤이븐 님께서 율리어스 전하를 걱정하십니까?”

“이, 일단은 율리어스 전하께서 후원자시니까……. 음.”

“아, 후원을 받으셔서……. 예, 그렇군요.”

그 말에는 그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리트릭은 제 말 한 마디에 밝아졌다 시무룩해지기를 반복하는 가이우스에 자신이 더 당황한 얼굴로 질문했다.

“저, 가이우스 경. 율리어스 님께서 노려지고 있으신데…….”

“아, 그 일 말입니까. 걱정 마십시오. 율리어스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리트릭 경께서 많이 놀라신 모양이군요.”

“알고 계신다니요?”

“속사정을 이야기해 드릴 순 없지만……. 율리어스 님께선 그다지 위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가이우스는 리트릭이 보고한 내용에 대해서는 고작 그 정도 반응이 끝이었다. 다소 허무할 정도로 관심 없는 반응과는 달리 리트릭과 함께 들었다는 헤이븐의 반응에 대해서는 몹시도 자세히 물어왔다.

그 때문에 가이우스를 그렇게나 존경하는 리트릭이 먼저 자리를 피해 나와야만 할 정도였다. 그게 몇 주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몇 주 전에 있었던 일을 이제야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리트릭 나름대로 바빴던 데다 가이우스의 반응에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닌가 보다, 싶은 마음이 든 탓이었다.

“아무튼 그렇다더라.”

“곧 황궁 기사단과 함께 토벌 작전에 간다며.”

“어? 어! 어떻게 알았냐? 내가 전에 황궁에 서류를 가져다주러 갔었잖냐. 그게 공동 토벌 작전 관련 서류였다더라.”

그 말에 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고 제 턱을 매만졌다. 그녀의 길어진 머리카락이 일리안의 허리 근처에서 어색하게 흔들렸다.

무언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일리안의 태도에 이제껏 가만히 있던 에릭이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눈썹 한쪽을 찌푸린 채였다.

“야, 헤이븐. 너 설마…….”

“역시 가야겠지.”

“뭐?! 네가 간다고? 헤이븐, 너 진짜 미쳤지? 거기 자칫 잘못하다간 사람 하나 죽어나는 거 드문 일도 아니다.”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란 것은 리트릭이었다. 에릭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잔뜩 구긴 리트릭이 테이블을 탕탕 내려치며 제 주장을 피력했다. 에릭은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 기사만 가는 거야. 치료사단이랑 마법사단도 마찬가지고. 넌 못 가.”

“나, 기산데.”

“……뭐?”

“렉스 경 아래에서 배운 기간만 3년인데, 기사 수료증 하나 못 땄을까 봐. 하급 기사긴 하지만.”

리트릭이 벙찐 얼굴로 입을 벌렸다. 가이우스 경과 렉스 단장 아래에서 그녀가 검을 배웠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새 기사 수료증마저 취득했을 줄은 몰랐다. 물론 하급 기사 수료증이야 아무나 딸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뭐, 곧 신문으로도 신청받지 않나? 토벌 작전은 매년 그랬던 것 같은데. 거기 신청해야겠다. 기왕이면 리하르트 쪽으로.”

그녀의 말대로 매년 있는 토벌 작전은 소속이 없는 기사들의 자율 지원 또한 받고 있었다. 지원은 황궁과 리하르트 각자에서 받는 편인데, 늘 황궁보다는 리하르트 쪽이 인기가 더 많은 편이었다.

“너, 그거 담당자가 가이우스 경인 건 아냐? 헤이븐 네가 하면 절대 허락 안 해주실걸? 방금 내가 그랬잖냐. 율리어스 님이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보다 네 이야기를 더 궁금해하셨다니까?”

일리안은 리트릭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될지 안 될지는 부딪쳐 봐야 아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굳이 리트릭과 충돌하기 싫어 대답을 미루었다.

그 태도에 일리안이 굽히지 않을 것을 안 에릭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도 해.”

“뭘?”

“나도 지원하겠다고. 갈 거면 같이 가.”

그러자 리트릭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그거 무소속 기사만 지원 가능한데?”

에릭은 윈터 가문에 다른 것도 아니고 기사의 맹세를 한 이였다. 그런 에릭이 토벌 작전에 지원하겠다고 하니 나온 말이었다.

“나, 이제 기사 그만둘 거다.”

“뭐?! 야, 미쳤어?”

픽 웃은 에릭은 리트릭이 아닌 일리안을 주시했다. 그녀에게 꼭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범선 타러 가려고. 뭐, 마물 토벌 작전에 짐꾼으로 지원한 이력이 있으면 어디 가서 취업은 하겠지.”

리트릭이 차마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입매를 움찔거렸다. 그가 윈터 가문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전에 지나가듯 범선이나 배우러 가라곤 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다.

일리안도 뭐라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에릭이 먼저 제 큰 손으로 테이블을 툭 쳤다. 둘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그러니까 기사와 관련된 일은 이게 마지막. 같이 가자. 헤이븐, 리트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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