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고작 남작 가문
“살펴 가십시오.”
막 황궁을 빠져나온 리트릭이 어딘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황궁의 앞은 곧장 번화가로 이어지는 터라 지나다니는 이들이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대로 앞에서 멈춰 선 리트릭이 제 손톱을 조금 물어뜯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황자가 공작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이 일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것은 헤이븐 윈터였지만 이렇게 된 이상 리트릭도 아주 관계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먼저 렉스 단장에게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가이우스 경?
“아으, 내가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냐? 몰라, 일단 헤이븐한테 가자.”
곧바로 리하르트 공작성으로 돌아가려던 리트릭은 일단 발걸음을 윈터 저택으로 돌렸다. 렉스 또한 별일이 없다면 물건을 전달한 후 바로 퇴근을 해도 좋다고 하였으니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차분히 길을 걸어가던 리트릭의 머릿속으로 순간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일전에, 황궁 무도회에서 불이 모두 꺼지며 큰 소란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다. 리트릭은 그 당시 이미 리하르트 기사단의 정식 단원이었던 터라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던 일이었다.
렉스 단장은 기사단을 모아놓고 무도회에서 공작 전하를 시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니 보안에 더 주의하라고 했었다. 때문에 리하르트 기사단원들끼리는 황궁 기사단의 보안도 별 볼 일 없다며 낄낄거렸지 않았었나.
사실, 그 모든 게 황자가 모두 눈감아주어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리트릭이 멍한 얼굴로 고민을 하는 사이, 어느샌가 윈터 저택의 앞에 와 있었다. 다소 다급한 손길로 윈터 저택의 벨을 눌러댔다.
“뭐야, 리트릭? 무슨 일……. 뭘 알아내기라도 한 거냐?”
“야, 헤이븐…….”
“왜.”
“이거 좀 큰일 났는데.”
리트릭이 곤란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자 일리안은 조용히 그의 팔목을 붙잡고 정원으로 향했다. 조그만 티 테이블 하나가 놓인 곳에 앉은 일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
“야, 그게, 아,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냐.”
잠시 제 머리를 부여잡던 리트릭이 이내 일리안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그녀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가 툭 이야기를 털어놨다.
“목표가 공작 전하시란다.”
“……뭐?”
“목표가 율리어스 님이시라고.”
일리안이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목표가 율리어스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 일리안의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리트릭은 차근히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근데 말이 좀 이상했어. 뭐, 약점이 있었는데 그 약점이 이미 죽어버렸다나……? 그게 율리어스 님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대.”
그러자 문득 한 기억이 떠올랐다.
현시대의 일리안 하인리히가 죽었을 때, 율리어스의 미쳐가던 모습들. 발로란 산맥에서 그녀의 시체를 발견한 율리어스는 자신의 마나를 폭발시켜 사망하려 들었다. 그 영향으로 그에게 다가갔던 일리안에게 온갖 상처가 나지 않았던가.
그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약점.
일리안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자신임을 알았다. 황자가 이미 죽어버렸다고 말한 것은 이 시대의 일리안 하인리히가 사망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일 터다.
“어떻게?”
“뭐?”
“어떤 방식으로 율리어스를 죽이려는 거냐고.”
이제는 율리어스가 자신의 생각만큼 지켜줘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켜주어야 했던 아홉 살 꼬마 율리어스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째서 이다지도 불안한 것일까.
그들에게 한번 죽었던 적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뒤바뀌기 시작한 미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일리안의 감이 자꾸만 적신호를 보내오고 있을 뿐이었다.
“어……. 그건 못 들었는데.”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다소 실망한 얼굴이 되기는 했지만 금방 표정을 다잡았다. 그가 이 정도만 알아낸 것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다.
“아무튼 어쩌지? 렉스 단장한테 말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가이우스 경……?”
“가서 말해. 들은 것 그대로.”
“아, 씨. 나 이런 거 진짜 못 하는데. 완전 부담스럽다고.”
리트릭이 신경질적인 태도로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가 보고를 하게 된 이상 리트릭은 어쩔 수 없이 이번 일의 담당자가 될 터였다.
그런 리트릭을 보며 곰곰이 생각하던 일리안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니, 그 이야긴 하지 마라.”
“무슨?”
“유일한 약점이 이미 죽어버렸다는 이야기.”
그가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떻게 나올지는 이제 조금쯤 예상할 수 있었다. 황자가 일리안 하인리히를 노리고 있었음을 안 순간, 그는 황자를 죽이려 들거나 자신을 보호하려 할 게 분명했다.
율리어스의 마음을 거절했던 일리안으로서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이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는 순간, 거리낌 없이 제 목숨을 던질 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황자는 헤이븐 윈터가 사실 일리안 하인리히라고는 생각도 못 하지 않던가. 그녀는 자신이 위험해질 일도 없으니 굳이 이야기를 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아… 퇴근했는데 다시 가야겠네. 야, 헤이븐. 나 그럼 이만 간다.”
리트릭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리안은 그가 저택을 떠날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 * *
“알렉 형님! 이쪽 좀 부탁드려!”
“어? 으, 응…….”
윈터 분재원이 정원 일에 제대로 착수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주가 흐른 뒤였다. 대강의 계획을 잡은 윈터 분재원은 이제껏 기른 꽃과 나무를 날라 에단 부부의 정원을 꾸며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난 일리안 또한 오랜만에 두터운 장갑을 끼고 손을 보태었다. 그녀가 무거운 것을 나르려 할 때마다 디노가 달려와 안절부절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묵묵히 제 일을 하고 있던 일리안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게릭이었다.
“헤이븐!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손님이요?”
게릭의 말에 일리안이 제 손에 쥐어져 있던 나뭇가지들을 잠시 내려놓았다. 고개를 돌리자 정원의 입구에 서 있는 에단 부부가 보였다.
붉은색의 챙이 넓은 모자를 쓴 화려한 부인과는 달리 밀색 튜닉을 차려입은 리트릭의 아버지는 부부 같기보다는 주인과 시종 같았다.
“일은 잘되어가고 있나요?”
“물론이죠. 절반은 마무리했으니 지금 둘러보셔도 좋을 겁니다.”
일리안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에단 부인이 정원 바깥쪽으로 걸어가려 할 때였다. 일리안 또한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 따라가려 하자 누군가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
디버튼 분재원의 원장이자 현재 윈터 분재원장이 소심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리안은 에단 부부를 슬쩍 보고는 그에게 눈짓으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저, 헤이븐……. 그게 말이다. 일전에 주문한 전정 가위가 영 올 생각을 안 해서 말이지.”
“전정 가위가요? 주문한 지가 1달도 넘게 지났을 텐데……. 1주일이면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응, 그래서 알렉이 대장간에 다녀왔는데 주문이 밀려서 시일이 더 걸린다지 뭐냐? 하아, 우리야말로 급한데. 전정 가위가 들어와야 겨우 시일을 맞출 수 있다고.”
그 말에 일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있는 전정 가위가 모두 낡고 이가 빠져 좋은 곳에서 새로 맞추기로 한 참인 터라 가위가 제 시일에 맞춰 와야지만 이번 계획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자칫하다간 모든 계획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에 일리안이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었다.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고 있는 에단 부부를 힐끗 바라보고서 원장에게 말했다.
“저 대신 안내 좀 부탁드릴게요. 저는 대장간에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래 주겠니? 아니, 그런데 듣기로는 무척이나 높은 분들의 명이라 우리 가위가 밀렸다지 뭐냐…….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응?”
“걱정 마세요. 제가 누굽니까.”
일리안은 원장이 안심하도록 씩 웃어주고선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빠져나갔다.
보아하니, 자신들의 가위 주문이 어느 높은 분의 명령으로 미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에는 숫기 없는 정원사들을 보내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게 일 처리가 빨랐다.
에단 부부의 정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장간에 도착했을 때에는 대장장이들을 비롯해 문하생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리안은 그중에서 일전에 자신과 계약을 체결한 대장장이의 자리를 찾아갔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난 남자가 열심히 망치질을 해대고 있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그리드만 씨.”
“그리드만이고 뭐고, 난 지금 바쁘니까 다른 사람한테 가!”
“일전에 선 계약금 천 골드를 지불한 윈터 가문인데요.”
“뭐, 뭐……?”
그 말에 그제야 그리드만이 망치질을 관두고 일리안을 바라봤다. 키가 작은 그의 바로 뒤에서 일리안이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속한 시일은 분명 어제까지였을 텐데, 왜 아직도 가위가 오지 않았나 의문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리드만에게 가위를 맡긴 이는 원장이었다. 때문에 일리안을 처음 본 그리드만은 그녀를 단지 윈터 가문에서 나온 시종으로만 생각하고서 버럭 노성을 질렀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 윈터 가문은, 응? 고작 남작 가문 아니야! 못해도 이번 달까지는 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지른 그리드만이 다급하게 다시 망치질을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몹시도 급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급한 것과는 별개로 돈을 받은 것은 그리드만이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일리안이 성큼 다가가 그리드만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허, 허억! 뭐 하는 거야! 왜 자꾸 일을 방해하나?!”
“아니요, 대체 어느 높은 분의 명령을 받들고 만드는 것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만드는 순서가 계약을 한 날짜 기준이 아니라 가문의 위치 기준이라니 저도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다음번에 또 저보다 높은 어느 가문에서 주문이 오면 다시 밀리지 않겠어요?”
차분히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어보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는 그리드만을 나무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던 그리드만이 겨우 내용을 이해하고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가문의 직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주문은 좀 특별한……! 잠깐만, 너보다 높은 가문?”
“예, 제가 고작 남작 가문인지라.”
그 말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리드만의 바로 옆에서 조용히 눈치를 보며 망치질을 해대던 문하생들도 일순 손을 멈출 정도였다.
“호, 혹시……. 윈터 남작이십니까?”
일리안이 그 말에 씩 웃었다. 제 목에 맨 볼로 타이를 한번 조였다. 그 몸짓에는 제법 그럴듯한 교양이 담겨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작 남작 가문의 주인, 헤이븐 윈텁니다.”
텅, 터엉…….
그리드만의 손에 꼭 쥐어져 있던 망치가 툭 떨어졌다. 입을 멍하니 벌린 채였다.
윈터 남작 가문은 소문에 무지한 대장장이들도 최근 들어 제법 이름이 자주 들려오는 곳이었다. 분재 사업으로 꽤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며, 윈터 가문의 주인이 리하르트 가문이나 후작 가문의 비앙카와 친하다는 소문들이 그것이었다.
그 명성 때문에 그리드만이 소속된 대장간에서도 이번 전정 가위 제작 의뢰를 수락한 것이었다. 그의 대장간 또한 수도 내에서 제법 이름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통 시종이 찾아왔으면 찾아왔지, 가문의 주인이 직접 대장간에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특히 그리드만의 경우 아직 정식 대장장이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직접 귀족을 보는 것은 처음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그리드만이 먼저 허리를 굽혀 사과하자 이제껏 일리안을 본척만척하던 문하생들도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 의뢰가 워낙 대단하신 분께서 내려온 명령이라……. 대장간에 있는 모든 대장장이들이 이 일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제발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제껏 반말을 해대던 그리드만이 순식간에 정중한 태도로 그녀를 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정말 피할 수 없는 의뢰가 들어오긴 한 모양이었다.
일리안이 대장간 내부를 살펴보다 지나가듯 물었다.
“대체 어디 가문이기에 그러십니까?”
“어디 가문이 아니라……. 황궁입니다, 윈터 남작.”
그리드만을 비롯해 모든 대장장이들이 만들어대던 검에는 모두 황가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