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드래곤을 잡을 수 있는 방법
“내 목에 얼마가 걸려 있냐. 그래도 만 골드는 걸려 있겠지?”
“뒤지면 돈 못 받는가 보다?”
그래, 그랬었다.
쫓겨 다니다 결국 강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그들이 돈 때문에 자신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었다.
그러나 헤이븐 윈터가 된 뒤로는 라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과 살아가기에 급급해 그것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볼 새가 없었다. 이미 지나간 삶이라는 생각에 굳이 고뇌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끊어진 인연일 줄 알았던 이들은 다른 곳도 아닌 수도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자신을 죽였던 이들을 보고서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들이 핀튼 마을에서 살던 산적단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핀튼 마을을 약탈해 언뜻 보기엔 마을 주민처럼 행동하지만 사실 뿌리 깊게 썩어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의뢰를 수행하며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러나 핀튼 마을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지방의 시골 마을이었다.
“야, 헤이븐! 우리 어디 가냐니까?! 파란 화원 안 가?”
그런 이들이 대체 어째서 수도까지 올라온 것일까. 일리안은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려 황자의 뒤를 밟았다.
마차가 워낙 화려하고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들킬 염려는 없었다. 대신, 핀튼 마을 산적단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들을 수 있었다.
“얼마나 준대냐?”
“거야 모르지. 그래도 황자님인데 설마 대충 챙겨줄까. 이건 무조건 맡아야 해.”
“그런데 우리를 대체 왜 고용하냐고.”
일리안이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을 따라가자 곧이어 리트릭도 눈치를 채곤 입을 닫았다. 대신 일리안과 그들의 앞에 있는 사내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핀튼 마을 산적단의 사내 중 1명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앞서가는 황궁 기사단원들의 눈치를 슬쩍 보다 목소리를 낮췄다.
일리안과 리트릭 또한 바짝 붙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사실 정식 제국민은 아니잖냐. 그런 이유라던데?”
“뭐? 정식 제국민이 아닌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 근방만 좀 둘러봐도 불법 체류자가 꽤 많을걸?”
“아니지. 그런 사람 중에 우리만큼 이름 날린 산적단이 있냐?”
저들끼리 수군거리던 사내들은 제법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핀튼 마을을 비롯해 근방에서 악명 높은 산적단인 것은 일리안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이! 더 빨리 움직이지 못해?!”
“이런, 망할. 우리가 노예인 줄 아나. 어엿하게 고용된 사람들이라고!”
기사단원 중 1명이 재촉하자 사내가 소심하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기사단원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말을 탄 채 황자의 마차를 따라갔다.
“화, 황궁이다.”
“내 생애 황궁을 다 들어가 보네!”
핀튼 마을 사내들이 황궁에 들어서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철문이 내려왔다. 황자의 행렬 뒤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들이 문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리안과 리트릭에게도 포함되는 이야기였다. 일리안은 창살 너머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야 인마, 헤이븐. 그래서 여긴 왜 왔는데?”
“아는 얼굴이라.”
“뭐? 저기 저 시골 아저씨들을 네가 안다고? 수도를 벗어나 본 적도 없는 네가?”
리트릭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도 남작 영애인 그녀가 아무리 보아도 어디 시골 하급 용병쯤으로 보이는 이들을 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게 왜? 대체 여기까지 왜 따라왔는데? 저 사람들이 너 죽인대냐?”
“날 죽여?”
“그래. 들어보니까 그런 것 같던데.”
그때까지 닫혀 버린 황궁의 문을 바라보던 일리안이 리트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 턱을 매만지며 어딘지 의문스러운 얼굴이었던 리트릭이 조심스레 제 의견을 털어놓았다.
“왜 저 사람들이 그랬잖아. 지들이 정식 제국민이 아니어서 고용된 거라고. 그중에서 무술을 좀 하는 놈들이 필요했다며?”
“그랬… 었지.”
“너야 잘 모르겠지만 요즘 리하르트 기사단에서 하는 일이 그거거든. 불법 체류자 잡아들이기.”
“그런 일도 했다고?”
“어. 하는 일은 거의 황궁 기사단이랑 똑같아.”
리트릭의 말에는 제법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리하르트 기사단과 황궁 기사단이 기사들이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근데 봐라, 우리랑 황궁 기사단이 왜 이 악물고 불법 체류자들을 잡아들이겠냐? 요즘 그게 기승이거든. 그 사람들이 범죄 저지르는 거 말야. 제국민이 아닌 사람이 필요했다는 건 결국 떳떳한 일은 아니겠고. 거기다 칼질로 악명 좀 높다며?”
“…….”
“그럼 누구 1명 죽이려는 거지. 칼질하는 사람들 불러다 농사시키려는 건 아닐 거 아냐.”
놀랍게도 리트릭의 말은 제법 신뢰가 갔다. 자신이 그들에게 일전에 죽은 적이 있었으니 당연스레 드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죽이게 되는 건 누구일까.
황자가 고용한 이들이니 목표가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이전 생에서 죽을 때 그들을 고용한 이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리트릭.”
“왜. 이제 파란 화원 가려고? 아서라, 이미 문 닫았다.”
“그게 아니라……. 저 사람들한테 사람 좀 붙일 수 있을까.”
“뭐야, 진짜 너 죽인대? 그럼 내가 그 전에 먼저 칠까?”
리트릭이 제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올렸다. 물론 그도 그녀가 목표물이라고는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일리안을 위해 검을 뽑아 들 생각은 얼마든지 있는 것 같았다.
일리안은 픽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목표가 누군지 궁금해서.”
“알면 뭐 하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자가 명령하는 거야. 네가 막는다고 막을 수 있겠냐.”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들이 죽인 것은 전생의 자신이었고, 이미 시간이 되돌려진 이상 없던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일리안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이번 생에선 아직 푸른 새벽 용병단이 핀튼 마을을 소탕하지 않았다는 점도 그러했다. 핀튼 마을에 뿌리 깊게 스며든 산적단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위세가 상당히 높은 시기일 터다.
“알아보기만 해줘. 다른 건 더 부탁 안 할 테니까.”
“됐다. 어머니한테 말만 하면 저 사람 속옷 색깔도 알아올걸. 그 아줌마, 이런 쪽엔 이상하게 인맥이 많으니까……. 아무튼 그러면 나도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일리안이 되묻듯 그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을 용케도 잡아낸 리트릭이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나중에 내가 잘못하면 한 번만 용서해 줘라.”
“……사고 쳤냐? 뭔데. 돈 필요해?”
“사고는 무슨! 아무튼 그렇게 알아둬. 내가 이거 알아 오면 한 번만 용서해 주기다?”
세뇌하듯 자꾸만 반복하는 그의 말이 어딘지 마음에 걸렸지만 일리안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서야 리트릭이 푹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인마, 리트릭! 잘하고 와라! 어? 실수하지 말고!”
“예, 렉스 단장. 제가 어디 실수하는 거 봤습니까?”
“너 목 아래 단추 잘못 끼웠는데.”
“지, 진짜요?”
리트릭이 민망한 얼굴로 자신의 제복을 다시 매만졌다. 렉스가 껄껄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그가 옷매무새에 그다지도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 1가지뿐이었다. 현재 리트릭이 향하는 곳이 다름 아닌 황궁이기 때문이었다.
황궁 기사단과 리하르트 기사단은 하는 일이 종종 겹치는 덕분에 애초부터 교류가 잦은 편이었다. 때문에 리트릭이 렉스의 명령으로 황궁 기사단에 서류 하나를 가져다주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렉스가 리트릭을 신뢰해 이 일을 맡긴 것은 아니었다. 지원자를 찾는 렉스의 앞에서 리트릭이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이 가겠노라 외친 탓이었다.
“뭔 엄마한테 부탁을 해? 내가 직접 하면 되지!”
처음에는 리트릭도 제 어머니께 부탁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로 그의 어머니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만큼 바빴고, 두 번째로 리트릭은 자신이 직접 해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두 그가 나중에 일리안에게 부탁할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리하르트 기사단에서 보낸 리트릭 에단입니다.”
그가 정중히 소개하자 신분증을 확인한 병사들이 황궁 입구를 열어줬다. 리트릭도 처음 들어와 본 황궁의 안쪽 모습에 슬쩍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구경했다.
렉스를 졸라 겨우 맡은 일이었다. 이런 기회가 두 번 오는 것은 흔하지 않으니 이번에 성공해야만 했다. 만약 핀튼 마을의 사내들이 이미 황궁을 나갔다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황궁 기사단 건물이 어딥니까?”
“여기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있소.”
병사의 말대로 왼쪽으로 돌아가자 넓은 연병장과 함께 덩그러니 놓여 있는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리트릭은 핀튼 마을의 사내들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연신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사단 제복을 입지 않은 이는 없었다. 그것은 리트릭이 황궁 기사단장의 집무실에 들어갈 때까지도 여전했다.
“아 씨. 망했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리트릭이 문을 닫고 나왔다. 렉스의 명령으로 전해주기로 한 종이마저 전달해 준 뒤였다.
들어온 김에 제멋대로 황궁 내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리하르트 기사단 제복을 입은 리트릭은 단연 눈에 띄었고, 때문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어느새 기사단 건물을 빠져나온 리트릭이 터덜터덜 황궁 정원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곳만 지나치면 곧바로 황궁 출입구가 있었다.
“이걸 어쩌냐. 헤이븐한테 뭐라고 말하… 어?”
리트릭은 순간적으로 무릎을 굽혀 앉았다. 정원에 무성하게 자란 수풀 덕분에 키가 큰 리트릭도 몸을 구겨 겨우 숨길 수 있었다.
“전하, 핀튼 용병단입니다.”
“그래, 일은 언제 시작할 참이지?”
고개를 내밀자 익숙한 인영들이 보였다. 리트릭이 속으로 쥐를 닮은 사내라고 생각했던 핀튼 마을의 사내 1명과 더불어 두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에 설치된 나무 의자에 앉은 황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우아하게 들었다. 그 앞에 시립해 있던 핀튼 마을 사내들은 고개를 숙인 채였다.
“저희는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시면…….”
“빠를수록 좋다고 했을 텐데. 왜, 겁이라도 나나?”
“그것이 아니오라, 돈이 필요해서…….”
황자가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시종 1명이 그들의 앞에 자루 하나를 툭 내려뒀다. 멀리 있는 리트릭이 보기에도 제법 묵직해 보였다.
“꼭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되었다. 기대도 안 되는구나. 하, 그래. 만약 성공한다면 내 그 돈의 2배를 약속하마.”
“저, 정말이십니까?”
황자가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핀튼 마을 사내들은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부터 준비할 게 많아서…….”
3명의 사내들이 물러가자 황자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에게 붙어 있던 시종이 따뜻한 차를 한 번 더 따랐다.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뭐, 작은 상처라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지. 그 괴물을 어찌 죽인단 말인가? 약점마저도 이미 죽어버렸는데.”
차를 마시던 황자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표정이 없던 시종은 묵묵히 그의 수발을 들며 대화를 이어갔다.
“안타깝단 말이지. 이제야 그놈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아챘는데 그 방법이 죽어버릴 건 뭔가?”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되었어. 그런 녀석이 제 약점을 그렇게 함부로 돌려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괴물? 약점?
리트릭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자꾸만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황자와 시종 탓에 목표를 정확히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리트릭이 조금 더 자세히 듣기 위해 한 발짝 움직였을 때였다. 바람결을 타고 황자의 목소리가 정확히 귀에 꽂혀왔다.
“하아, 그 괴물 같은 드래곤 새끼를 죽일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이 세상에 리트릭이 아는 드래곤과 관련된 이는 1명밖에 없었다. 또한 리트릭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그가 속해 있는 리하르트 기사단의 깃발과 제복에는 드래곤의 얼굴이 수놓아져 있기 때문이었다.
“목을 잘라도 살아 있을지 정말 궁금하단 말이지.”
황자가 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리트릭은 그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