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75화 (75/123)

75. 못 놔줘요

언제였던가. 예전에도 한번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비록 그때에는 파란 화원의 앞에서였고, 리트릭이 아니라 에릭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파란 화원과 붉은 화원은 외부 구조가 동일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일리안은 마차를 세워둔 채 서 있는 율리어스를 따라 당장이라도 마차에 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어쩔 거냐고 물었습니다, 공작 전하.”

율리어스의 눈동자가 리트릭을 향했다.

가끔 리트릭은 몹시도 무모할 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현재 리하르트 기사단에 속한 입장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율리어스를 노려보는 눈이 무척이나 무례한 것을 보면.

일리안이 먼저 리트릭과 율리어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뒤로 고개를 힐끗 돌려 리트릭에게 말했다.

“먼저 가 있어. 이 앞 대로에서 기다려라.”

“야, 헤이븐……!”

“리트릭, 그만. 거기까지만 해.”

리트릭의 머리 위로 툭 손이 올라왔다. 그를 달래듯 머리를 흩트리자 리트릭은 눈을 찡그리면서도 자리를 떠났다. 멀리 걸어가면서도 연신 툴툴대는 것이 리트릭다웠다.

그가 떠나자 일리안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율리어스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율리어스였다.

“머리는 왜 기르시는 겁니까.”

“나름 예뻐서 기릅니다.”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율리어스의 손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일리안은 그 손이 어쩌면 떨리고 있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고작 머리를 기르는 게 어때서요.”

“내가, 당신이 일리안 하인리히가 아니라고 생각하길 바라는 거잖습니까.”

그의 눈이 일리안을 직시했다. 일리안 또한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율리어스에게 단호하게 안 된다고 통보를 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

“내가 잘못했어요. 당신에게 무례한 마음을 가져서, 감히 바라선 안 될 것을 가지고 싶어 해서. 이 세상에서 당신이 일리안임을 아는 게 이제는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들뜨게 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예전처럼 멀리서 바라만 볼 테니까…….”

일리안 하인리히가 살아 있다고만 해줘요.

그렇게 덧붙이는 율리어스의 말끝은 떨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일리안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율리어스의 목소리가 몹시도 가슴 아팠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어떤 결심을 한 건지 여실히 느껴졌다.

“율리어스. 그럼 하나만 묻자.”

율리어스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고조 없이 가라앉아 있었지만 희미하게 기대가 어려 있었다. 일리안은 늘 그에게 약했으니까.

“내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네 목숨을 바쳐서 살릴 수 있다면. 너는 날 포기할 수 있을까.”

“…….”

“네가 다른 무엇에도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알아. 그래, 그러면 다른 건 아니어도 좋으니까, 적어도 네 목숨은 아끼겠노라고 장담할 수 있냐.”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비록 다른 어떤 것에도 감정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것은 일리안이 가르쳐 주고 다룰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숨은 아니었다. 일리안은 제 목숨마저도 쉽게 놓는 이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그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내가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나를 놓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율리어스의 눈동자가 까맣게 죽었다. 그 새까만 홍채에 일리안의 흰 얼굴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율리어스에게 있어서 이미 한번 보았던 일리안의 죽음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죽은 일리안을 따라갈 수 없는 자신의 신체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그녀는 조금도 몰랐다.

흰 눈이 쌓였던 발로란 산맥에서 고깃덩이가 된 일리안의 시체를 본 날부터 율리어스는 자신이 미쳐가고 있음을 느꼈다.

누가 그랬던가. 드래곤의 죽음은 정신적인 사망이라고.

기나긴 이명과 함께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된 몸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율리어스는 그날부터 오로지 일리안을 따라가기 위해 움직였다.

그 기나긴 절망을, 단언컨대 일리안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당신은 늘 제게……. 새로운 감정을 알려줘요.”

“율리어스.”

“슬픔도, 고통도, 내가 내 자신을 좀먹어가는 이 기분도. 일리안 당신이 준 것이니 받아들여야겠지.”

일리안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녀가 그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그따위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율리어스에게 좋은 감정을 알려주고 싶었다. 처음 만났던 아홉 살 때부터, 늘.

“당신이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놓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까?”

율리어스의 눈동자가 뱀의 것처럼 늘어졌다.

“아니요, 일리안. 나는 당신을 죽어도 놓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단언하는 율리어스의 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강제로 일리안을 제 품에 넣을 것처럼 말한 주제에, 율리어스의 내려앉은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결국 일리안에겐 감히 손길 한 번 들이밀지 못하면서. 그녀의 손목을 잡고 공작성으로 데려가 가둬두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를, 일리안은 미워할 수가 없어 서글펐다.

“머리는 마음껏 기르세요. 나는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 인정하지 않아도 이젠 내 멋대로 생각하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라울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율리어스를 두고 먼저 자리를 떠나는 것은.

일리안은 자꾸만 일그러지는 제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기 싫어 먼저 걸음을 떼었다. 어서 리트릭이 있는 곳에 가야만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제게 보여주기 위해 머리를 기른 게 아닙니까.”

“…….”

“예쁘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일리안의 발걸음이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움직였다. 그녀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서 자리를 떠났다.

* * *

“야, 헤이븐! 왜 이렇게 늦어?! 1분만 더 늦었어도 그냥 돌아가려 했……. 뭐야, 울어?”

성난 얼굴로 쏘아붙이던 리트릭이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손으로 제 눈가를 가린 채 리트릭에게 다가오던 일리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탓이었다.

“뭘 울어. 헛소리하기는.”

그러나 그가 다가오자 일리안은 제 손을 내렸다. 눈가가 조금 붉어진 감이 있기는 했지만 운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매만진 것이었다.

리트릭은 싱겁다는 얼굴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일리안이 눈가를 가리고 있을 때만 해도 안절부절하지 못했던 얼굴이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태도였다.

“뭔 얘기했냐?”

“그냥, 뭐. 너랑 결혼한다는 헛소리.”

“진짜 그렇게 말했어?!”

화들짝 놀란 리트릭의 목소리가 커졌다. 길가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슥 눈길을 주자 일리안은 그의 목젖을 수도로 내려쳤다. 컥, 컥 하고 제 목을 붙잡은 리트릭이 눈물 한 방울을 툭 흘렸다.

“넌 목소리가 너무 크다니까.”

“아니, 됐고! 진짜 그렇게 말했냐?”

그 말에는 잠시 멈칫했다.

율리어스라면 자신의 결혼 소식에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가 붉은 화원 앞에서 결혼을 하느냐고 물어왔을 때에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한 부분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리트릭이 떠나자 율리어스는 결혼에 대해선 조금도 묻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닌 것처럼.

에릭의 팔은 그렇게도 자르고 싶어 했으면서, 리트릭에겐 별다른 살기를 세우지도 않았고.

대체 무슨 차이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사이 리트릭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왜?”

“지금 세 번째 묻는다! 너, 나랑 결혼한다고 했냐니까?”

“안 했다.”

“그럼? 솔직하게 대답한 거야? 으이씨, 내가 내 핑계 대라고 했잖아. 너 이제 어떻게 거절할 건데? 고작 남작 주제에.”

“고작 남작? 어이, 고작 기사. 경은 작위가 어디기에 말을 편하게 하나?”

리트릭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투덜대었다. 일리안은 픽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리트릭과 이야기할 때에는 이런 점이 좋았다. 아무리 무거운 고민이 있더라도 실없는 소리나 하며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솔직하게 대답하지도 않았어.”

“뭐야, 그럼?”

“별로 안 궁금해하던데.”

왜?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얼굴의 리트릭은 가던 걸음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리안도 잠시 멈춰서 그에게 힐끗 눈길을 주긴 했지만 이내 먼저 앞장섰다.

“너 안 좋아하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가 뭐냐. 안 좋아하는데 그렇게 굴어? 그건 완전 미친놈이지!”

“……너, 리하르트 기사단 월급을 누가 주는지는 아냐?”

‘어쩔 겁니까?’라고 물었던 것만으로도 리하르트 기사단에서 잘리기에는 충분한 이유였다. 아니, 율리어스가 원한다면 그를 귀족 모욕죄로 재판에 세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리안은 가끔은 무모하다 못해 생각이 없는 리트릭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건가? 내가 너무 친구처럼 보여서?”

“뭐?”

“그렇잖아. 사실 너랑 내가 어딜 봐서 결혼할 사이냐? 어디서 듣기라도 한 거 아냐? 헤이븐 윈터랑 리트릭 에단은 친구일 뿐이라고. 그래서 가만히 둔 건가?”

리트릭이 탐정이라도 되는 양 제 턱을 붙잡고 열심히 추리를 해갔지만 일리안은 어깨를 으쓱일 뿐 대꾸하진 않았다. 그가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신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농담이라도 하듯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일리안과 리트릭이 파란 화원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 길을 비켜라! 황자 전하시다.”

껄렁한 걸음으로 걸어가던 리트릭이 몸을 바로 세웠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검 위에 한 손을 올린 채 절도 있는 자세를 짓자 일리안도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그녀 주위에 있던 이들 또한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러나 행렬은 몹시도 느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일리안은 제 앞에 서 있는 황궁 기사단원들이 각을 맞춰 걸어가는 것을 바라봤다.

슬슬 목이 아려올 때였다. 결국 일리안은 슬쩍 턱을 돌려 제 옆에 선 리트릭을 바라보았다.

“살려줘.”

턱을 빳빳이 든 채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리트릭이 일리안의 눈길을 눈치채고는 입을 뻐끔거렸다. 하긴, 평민인 척 고개를 숙인 일리안과 달리 검을 찬 탓에 팔을 들고 경례를 취해야 하는 리트릭이 더 힘들 터다.

그녀가 리트릭의 옷깃을 슬쩍 잡아당기며 몰래 수신호를 주고받으려던 순간, 기사단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일리안은 혹시 자신과 리트릭이 떠드는 것을 들켰는가 싶어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들려온 것은 황자의 나긋한 목소리였다.

“잠시 멈추어라.”

황자의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왔다. 기나긴 행렬 중 하필 일리안과 리트릭의 앞에 황자가 멈춰 선 모양이었다.

“황자 전하, 저런 천한 이를 부르는 것은…….”

“허어, 내가 아는 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길을 막지 말라.”

그 탓에 황자와 기사단장으로 추정되는 이의 실랑이 또한 코앞에서 목격할 수도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일리안은 대체 그 ‘천한 이’가 누구인가 싶어 몰래 눈을 들었다.

“……어.”

그녀 자신도 모르게 말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리를 옮기도록 하겠다. 저들은 내 마차 뒤로 따라오라고 하라.”

“푸른 새벽 용병단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혼자인 놈이 뭘 할 수 있다고……!”

죽기 직전 보았던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녀를 강물로 뛰어들게 만들었던 사내들이 황자의 마차 뒤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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