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74화 (74/123)
  • 74. 결혼 상대

    “타피아, 머리를 기르려면 얼마나 걸릴까.”

    “얼마나 기르시려고요?”

    “흠, 남들이 보기에 긴 머리라고 생각할 정도.”

    일리안의 이야기에 타피아가 반색했다. 타피아는 그녀의 탁한 붉은색 머리가 선대 윈터 남작 부인을 꼭 닮았다며, 예전부터 늘 머리를 길러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오곤 했었다.

    화장대 앞에 앉은 일리안의 뒤에 선 타피아가 그녀의 머리에 오일을 발랐다. 이제는 목을 덮을 정도로 길어진 머리를 조심스럽게 빗어 내렸다.

    “제 머리 길이 정도로 기르시려면, 적어도 반년은 걸리실걸요.”

    “뭐? 그렇게나 오래 걸린다고?”

    “그럼요. 생각보다 머리는 늦게 자라요.”

    “난 2주마다 머리를 잘랐잖아. 얼마나 귀찮았는데.”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보던 일리안이 턱을 매만졌다. 지금은 목을 겨우 덮는 길이의 머리가 길어질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도 오래 걸렸다.

    일리안이 고민하자 타피아가 눈치껏 물어왔다.

    “갑자기 머리는 왜 기르시려고요?”

    그녀가 머리를 기르려는 이유는 단 1가지뿐이었다.

    더 이상 율리어스에게 그가 찾는 일리안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만 했다. 그것이 비록 율리어스에게 있어선 절망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일리안에게 있어서 율리어스에게 자신이 일리안임을 인정하는 것은, 결국 그의 마음을 받아준다는 것과도 같았다. 그가 아무리 헤이븐 윈터가 일리안 하인리히라고 확신하더라도 결국 그녀가 거부하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타피아가 늘 바랐잖아. 한 번이라도 머리를 길렀으면 좋겠다고.”

    “어머, 제가 그랬었나요?”

    “미용사가 머리를 잘라줄 때마다 잘려 나가는 머리를 얼마나 아쉬운 눈으로 쳐다봤는데?”

    타피아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일리안이 이제껏 머리를 잘랐던 이유는 단순히 귀찮음뿐이었다. 율리어스의 문제는 물론 제가 아끼는 사람이 원한다면 머리를 길러도 별일은 없을 터다.

    “그럼 반년은 뒷목이 간지럽겠는데…….”

    “머리를 빨리 기르시고 싶으면 마법을 이용하는 건 어떠세요?”

    “마법?”

    타피아는 일리안과 달리 미용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그런 그녀가 머리를 빨리 기르는 방법을 알려주자 일리안 또한 귀를 기울였다.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 마법이라도 있나?”

    “설마요. 그건 결국 시간과 관련된 마법인걸요. 아무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런가.”

    “대신, 덧입히는 방법은 있어요. 원래 머리가 자랄 때까지 마법으로 긴 머리 형상을 덮어씌우는 거죠.”

    제법 솔깃한 이야기였다. 이전에 용병 일을 할 때에는 종종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변장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타피아가 이야기해 준 마법도 그것과 비슷한 원리일 것이 분명했다.

    “안 불편할까?”

    “마법인걸요. 물론, 돈이 제법 많이 들기는 하지만…….”

    타피아의 손을 잡은 일리안이 윈터 저택을 나선 것은 다음 날이었다.

    * * *

    “야, 헤이븐! 미쳤어?”

    “왜.”

    저 멀리서 리트릭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리트릭의 부모님과 계약을 체결한 뒤, 일리안은 먼저 파란 화원을 비롯해 그들이 운영하는 화원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 일행으로 리트릭이 발탁된 것이었다.

    일리안과 리트릭이 만나기로 한 곳은 ‘붉은 화원’이었다. 언젠가, 비앙카가 영식들이 자주 사용하는 곳이 도처에 있으니 가보라고 했던 그 화원이기도 했다.

    “머리! 머리가 길어졌잖아!”

    리트릭이 일리안의 허리까지 미치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챘다. 그의 목소리가 커지자 화원 내에 있던 영식들이 슬쩍 눈길을 주었다.

    눈썹을 꿈틀거린 일리안이 그의 손아귀에서 제 머리카락을 빼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제 손에서 부드럽게 흩어지는 머릿결에 한 번, 그리고 마법인데도 실물처럼 느껴지는 촉감에 두 번 놀랐다.

    “목소리 낮춰.”

    “아니, 그게 지금 가능하냐? 네가 머리를 길렀는데!”

    그러나 리트릭은 이미 일리안의 곁에 바짝 붙어 목소리를 낮춘 지 오래였다. 일리안은 그사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법이라 무게는 느껴지지 않건만 이상하게 머리가 간지러웠다.

    “드디어 나랑 결혼하기로 했구만?”

    “……들었냐?”

    “당연하지! 리하르트 공작의 소중한 그녀, 그러나 결혼 상대는 리트릭 에단 경?!”

    리트릭이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가 방금 이야기한 제목은 바로 어제 제국 신문 일간지 가장 첫 장에 적혀 있던 글이었다. 그러나 리트릭은 예상외로 어깨를 떨어가며 웃음을 참기 바빴다.

    일리안은 제 이마를 붙잡고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앙카와 설마 신문에 나겠느냐며 웃었던 게 며칠 전이건만, 얼마 되지 않아 일이 터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그 정도로 유명 인사일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 그거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아냐? 너랑 내가 결혼? 다들 미쳤어. 차라리 가이우스 경이랑 결혼을 하고 말지!”

    “……그건 네 바람이겠지.”

    “가이우스 경이랑 결혼하면 나한테도 검술을 가르쳐 주시려나?”

    그의 중얼거림에 일리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리트릭이 가이우스를 몹시도 존경해 결국 리하르트 기사단으로 들어갔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그래서 어떡할까, 헤이븐.”

    “뭘?”

    “남들이 나더러 너랑 결혼하냐고 물으면 어떡해?”

    일리안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당연히 아니라고,”

    “리하르트 공작 전하 때문에 골머리 앓고 있지 않냐.”

    “……어떻게 아냐?”

    그러자 리트릭이 짧게 웃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에릭이라면 몰라도 리트릭에게는 한 번도 언질해 준 적이 없던 일이었다. 일리안은 제 고민을 친구와 나누는 편이 아니기에 더더욱 그랬다.

    “인마, 형님은 네가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거든?”

    “해봤자 에릭한테 들었겠지.”

    “……응, 술 마시고 훌훌 털어놓더라. 근데 기억도 못 해.”

    일리안이 짧게 혀를 찼다. 제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에릭이고, 술까지 마셨다면 나무랄 수도 없었다.

    “아무튼 리하르트 공작 전하를 거절하기 어려운 거면 날 이용해도 좋아.”

    “뭐?”

    “그렇잖아. 네 신분에 어떻게 그분을 막 거절하냐? 상대가 있다고 하면 포기라도 하시겠지.”

    제법 솔깃한 제안이었다. 꼭 사귀지 않더라도 사귀는 척이라도 한다면 율리어스 또한 그것이 거절의 뜻임을 모르지 않을 터다.

    그러나 깊게 고민하던 일리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남들이 묻거든 확실하게 아니라고 해라.”

    “……진짜?”

    “그래. 됐고, 이제 그만 화원 쪽으로 가자. 일하러 왔지 않냐.”

    이제 자신보다 한참은 큰 리트릭의 머리 위에 손을 툭 얹었던 일리안이 먼저 발을 떼었다. 그녀가 미련 없이 자리를 뜨자 리트릭은 그런 일리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난 진짜 상관없는데.”

    홀로 중얼거리는 리트릭의 얼굴은, 늘 웃음기 가득하던 그답지 않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확실히 영식들이 이용하는 곳이라 좀 다르긴 하네. 이쪽은 꽃이 많이 없는데?”

    “응. 심어두면 웬 놈들이 다 꺾어서 파란 화원에 갖다 바치기 바쁘다더라. 그래서 죄다 나무야.”

    “……그래서라고?”

    화원의 건물 입구에 선 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묘하게 꽃보다 나무가 많은 것 같다 싶더라니, 리트릭의 이유가 어쩐지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에단 부부의 새로운 화원이 ‘밀회’가 주제라면 이용자들의 나이대와 성별을 고려해 화원을 꾸며야만 했다. 일리안은 가져온 수첩에 간단히 메모하며 리트릭과 함께 길을 걸어갔다.

    “이제 그만 나가자. 오후 중에는 파란 화원도 들려야 하니까.”

    “거기도? 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가던 곳이었는데? 꼭 가봐야겠냐.”

    “매일은 무슨. 거기다 꽃의 위치까지는 나도 자세히 안 봤다.”

    리트릭은 귀찮은 얼굴로 연신 툴툴대면서도 일리안의 옆을 떠나지는 않았다. 일리안과 리트릭이 화원의 입구쯤까지 나갔을 때였다.

    “저, 헤이븐 님.”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아, 저는 타소니아 가문의 로드만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웬 말쑥한 사내였다. 리트릭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그가 슬며시 얼굴을 붉히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두 분 결혼하시는 게 사실입니까?”

    “설마요, 아닙…….”

    “우리 약혼반지는 언제 찾으러 가지?”

    일리안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리트릭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직감적으로 그가 장난을 치고 있음을 눈치챘다.

    “정말… 결혼하신단 말입니까?”

    리트릭에게 미쳤냐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일리안의 귓가에 제 입을 가져갔다.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남자, 너한테 마음 있는 것 같은데? 받아줄 거 아니면 맞장구 좀 치지?”

    일리안이 앞을 바라봤을 때에는 남자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트릭의 태도가 배우자라기에는 몹시도 장난스러워 보였고, 그렇다고 아니라기엔 귓속말을 속닥이는 게 너무 친밀해 보였다.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일리안은 제게 바짝 붙어온 리트릭의 어깨를 밀쳤다. 리트릭이 과장스럽게 아차차, 하며 몇 걸음 떨어졌다.

    “……단순히 좋은 관곕니다.”

    “좋은, 관계라면?”

    “제가 말씀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군요.”

    단호하게 말한 일리안이 남자를 스쳐 지나갔다. 조금 뒤에 떨어져 있던 리트릭도 남자의 어깨를 위안하듯 툭툭 치고서 그녀를 따라갔다.

    길게 이어진 화원의 입구는 흰색 대문과 이어져 있었다. 그곳에 가기 앞서 일리안이 언제부터인지 제 옆에 선 리트릭을 노려봤다.

    “확실히 하라고 했을 텐데.”

    “뭐, 방금 정도는 괜찮잖아. 타소니아 가문이면 그렇게 높지도 않아. 소문날 확률도 적고……. 너도 피곤한 일은 면했지 않냐.”

    리트릭이 말끝을 흐리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도 제 장난이 조금 지나쳤음은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눈길을 주던 일리안은 손을 들어 리트릭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세게 때렸다. 딱,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스읍……. 야!”

    “봐줬다.”

    리트릭에게서 시선을 뗀 일리안이 먼저 흰색 대문을 나섰다. 잠시 멈췄던 리트릭은 이마를 맞은 게 억울했는지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리트릭이 일리안에게 달싹 붙어 있던 때였다.

    “……율리어스?”

    “내가 왜 율리어스냐? 응? 그건 리하르트 공작 전하 이름인데?”

    멍청하게 중얼거린 리트릭이 고개를 들었다. 일리안이 바라보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곳엔 리하르트 가문의 마차와 함께 율리어스가 서 있었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녀의 목에 걸쳐진 리트릭의 팔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율리어스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갔다.

    “어……. 그러니까, 내가 빠져줄 차롄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한 리트릭이 슬금슬금 일리안에게서 팔을 빼냈다. 일리안이 그에게 소중한 친구이기는 했지만 리트릭도 제 목숨이 중요한 줄은 알았다.

    그는 실실 웃으며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여긴 무슨 일… 입니까, 율리어스 님?”

    그녀의 말투가 어느새 다시 존댓말로 돌아가 있었다. 일리안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짧게 흔들렸다. 그것을 바라보던 율리어스는 툭, 내뱉었다.

    “결혼하십니까?”

    일리안은 그 질문에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보다도 옆에서 먼저 대답이 튀어나온 탓이었다.

    “한다고 하면 어쩔 겁니까?”

    리트릭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율리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