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73화 (73/123)
  • 73. 쟤 결혼한대요

    “……에릭은?”

    “나랑 술 한잔했다. 아냐? 그놈 술 엄청 약한 거. 네 발로 집에 기어들어 갔지, 뭐.”

    “그러냐.”

    리트릭이 일리안의 등을 손바닥으로 퍽퍽 두드렸다. 그리곤 그녀의 목에 제 팔을 둘러 어깨동무를 하고선 씩 웃었다.

    “됐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너도 나한테 친구지, 그놈만 친구냐?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주면 고맙고.”

    “너 아직 공사하는 곳 안 가봤지? 시간도 남는 데 가보자. 그럼 너희 분재원도 계획하기 편할 거 아니야.”

    일리안의 손목을 덥석 붙잡은 리트릭이 길 한쪽을 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그에게 손목이 잡힌 채 따라가게 된 리트릭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가이우스의 덩치를 닮은 에릭과는 달리, 리트릭은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듣기로 그의 검술도 힘보다는 속도에 무게를 둔 편이라고 하던 터라 일리안은 손목이 잡히자 제법 놀랐다.

    그의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단순히 힘만 놓고 보자면 헤이븐 윈터의 몸으로는 리트릭의 힘조차도 어쩌지 못할 것 같았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그것은 에릭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처음 보았을 때는 풋내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었는데, 어느새 이만큼이나 자라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네 어머님이 사업을 제안하신 건 네 의견이냐.”

    “어, 뭐, 그렇지. 서로 좋잖아. 우리 집 아줌마도 믿고 맡길 만한 분재원 찾느라 골머리 좀 썩고 있었고, 너도 돈 더 벌면 좋은 거고. 타피아랑 디노 월급 올려줄 때 안 됐냐?”

    “……고맙네.”

    “하, 참나. 됐어. 그 아줌마 돈은 진짜 더럽게 많으니까 잘해봐라. 빼먹을 수 있는 만큼 빼먹어!”

    리트릭은 제 어머니가 남이라도 되는 듯 말했지만, 그의 얼굴은 그러지 못했다. 픽 웃고 있는 얼굴은 그가 제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가 보였다. 리트릭이 그런 성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기에 일리안도 그저 고개를 저을 뿐 나무라진 않았다.

    그렇게 먼저 앞서가던 리트릭이 멈춰 선 것은 그때였다. 덩달아 멈추게 된 일리안은 리트릭의 등에 코를 박을 수밖에 없었다.

    “……야, 헤이븐. 너 먼저 가 있을래? 이 앞인데.”

    “왜?”

    리트릭의 어깨가 너무도 넓어 그의 맞은편이 보이지 않았던 일리안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놀랍게도 그의 앞에는 리트릭보다 키가 한참은 작은 영애 1명이 서 있었다.

    일리안으로선 낯선 얼굴이었다.

    “……리트릭 경과는 친구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윈터 영애?”

    그 질문을 듣고서야 일리안은 그녀를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렸다. 그 언젠가, 파란 화원에서 일리안에게 리트릭과는 무슨 사이냐고 물어왔던 영애였다.

    더불어 친구라고 대답하자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었다. 간신히 그 기억을 떠올려 낸 일리안이 말을 걸려던 순간이었다.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눈을 질끈 감은 영애가 바락 소리쳤다. 눈을 둥그렇게 뜬 일리안이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에는, 이미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리트릭이 곤란한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일리안도 돌아가는 상황을 깨닫고서 제 볼을 긁적였다.

    “아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리트릭과 나는 정말 친구라,”

    “그럼 그 손은 왜 붙잡고 계신가요? 요즘은 친우끼리도 손을 붙잡나 보지요?”

    영애가 일리안의 손목을 붙잡은 리트릭의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던 둘은 허둥지둥 손을 놓았다. 그러나 이미 영애의 눈빛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리트릭 경, 이 일은 정말 실망했어요.”

    “뭐? 아니, 나는,”

    “구차한 핑계는 듣고 싶지 않네요.”

    치맛자락을 붙잡은 영애는 뒤돌아 신경질적인 태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떠나자 머쓱해진 얼굴의 리트릭이 제 뒷머리를 매만졌다.

    “연애하냐?”

    “무슨, 그런 거 아니야. 저쪽이 내가 마음에 든다기에 나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잘해줘라. 울리지 말고.”

    툭 내뱉은 일리안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둘이 도착하기로 한 화원이 코앞이었다.

    잠시 멍하니 일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리트릭은 황당한 얼굴로 그녀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그가 귀찮을 정도로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무언가 몹시도 당황한 것 같았다.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래, 알겠다. 그럼 더 울리지 마라. 남 눈에서 눈물 뽑는 거 아니야, 인마.”

    “윽, 헤이븐! 너 그만 놀려라?”

    리트릭이 장난스럽게 그녀의 목에 제 팔을 감았다. 자신보다 키가 작은 일리안의 머리에 제 이마를 아플 정도로 비벼대자 일리안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웃었다. 그녀 또한 그 모든 상황이 귀엽고 우스웠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떠났던 영애가 돌아와 그런 일리안과 리트릭의 친근한 모습을 모두 목격한 채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 * *

    “헤이븐, 이쪽이에요.”

    “아, 비앙카.”

    비앙카가 천천히 부채를 흔들자 일리안이 단번에 그녀에게 향해 갔다. 제법 오래된 친구 같기도 했다.

    일리안은 마르틴 백작이 연 파티장에 초대되어 이곳에 와 있었다. 마르틴 백작은 그녀가 일전에 유통해 줄 도매상을 찾기 위해 계약을 부탁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와의 관계상 참석을 피치 못했던 일리안은 불편한 얼굴로 도착하긴 했지만, 막상 제 자리를 찾아가기는 힘들었다. 초대한 마르틴 백작은 여러 사람을 만나느라 바빴고 그녀는 고작해야 이제 막 사업에 뛰어든 열일곱 살 영애였던 탓이다.

    그 와중에 비앙카를 발견하자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일리안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마르틴 백작과 동업을 하고 있습니다. 비앙카는요?”

    “저야, 어머니가 마르틴 백작 부인과 친밀해서요. 귀찮긴 하지만…….”

    비앙카는 따분한 얼굴로 부채를 살랑였다. 그녀가 생각보다 파티나 사교 모임을 귀찮아한다는 것은 일리안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바람으로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 다녀야 한다는 모양이었다.

    “무사히 논문을 완성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평가가 대단히 좋던데요.”

    “뭘요, 아버지가 이번에도 돈깨나 들인 거지. 아, 물론 내가 다 쓰기는 했어요.”

    비앙카의 냉소적인 반응에 일리안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푹 터졌다. 그녀가 한 손으로 제 눈가를 가리고 웃자 비앙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그 정도 돈 들여서 배웠는데 그것도 못 쓰면 나도 쫓겨나요. 하, 그냥 나도 사업이나 하고 싶다니까.”

    이번에는 비앙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강단 있는 비앙카의 성격이라면 학자보다는 사업가가 더 어울릴 것 같기는 했다. 단지 그녀의 아버지가 제국에서 이름 있는 학자라는 점만 빼자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안하러 가겠습니다. 투자를 받는 쪽이겠지만.”

    “어머? 괜찮은데요? 우리 집이 묵혀둔 돈은 많거든.”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던 일리안과 비앙카는 문득 눈이 마주치자 서로 웃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열댓 살 영애들 중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는 저들밖에 없을 터다.

    웃음기가 가시자 먼저 입을 연 것은 비앙카였다.

    “맞다, 헤이븐. 축하해요.”

    “예? 뭘 말하는 겁니까.”

    “결혼한다면서요?”

    예……?

    일리안이 얼이 빠진 얼굴로 입을 벌렸다. 자신이 결혼한다니? 물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약혼을 진행하는 이들이 제법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녀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비앙카는 일리안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말을 이었다.

    “리트릭 에단 경과 결혼하신다면서요? 돈 많고 평판도 좋아서 나름 잘 어울린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아닌가요?”

    “누가……. 아니, 어디서 들은 이야깁니까?”

    잠시 스쳐 지나가듯 리트릭과의 결혼 생활을 떠올린 일리안은 얼굴을 완전히 구겼다. 그가 좋은 사람이고 돈이 많고를 떠나서, 일리안은 친구와 결혼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글쎄요? 나도 언뜻 들은 이야기라……. 음, 스키피오 영애의 티파티에서였나?”

    그 이야기에 일리안은 얼굴을 굳혔다. 어느 영애의 티파티에서 이야기가 돌 정도라면 거의 모든 귀족가에 소문이 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제국 신문 일간지에서 조그맣게 자신과 리트릭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리안은 슬슬 지끈거리는 머리에 제 이마를 붙잡았다.

    “아니,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났답니까?”

    “리트릭 경과 헤이븐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서 리트릭 경의 부모님을 만나 뵈었다던 걸요? 아니에요?”

    이런, 미친.

    리트릭의 부모님을 만나 뵌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모두 사업적 이야기를 위해서였으며, 심지어 그날 일리안은 리트릭과 따로 카페에 갔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부풀려질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때였다. 테이블에 둘만 앉아 이야기를 하던 비앙카와 일리안의 맞은편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티의 주인이기도 한 마르틴 백작이었다.

    “오, 비앙카. 못 본 새에 더 예뻐졌구나.”

    “별말씀을요. 제가 예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음, 그래. 이쪽은, 그러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헤이븐이 미소 지으며 그에게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마르틴 백작의 손을 맞잡으며 제 소개를 다시 했다.

    “윈터 분재원을 맡고 있는 헤이븐 윈터입니다, 마르틴 백작. 잘 지내셨습니까?”

    “오, 윈터 남작. 오랜만이군요. 나야 물론 잘 지내었소. 우리 비앙카와 아는 사이였나 보오.”

    비앙카와 일리안을 번갈아 바라본 마르틴 백작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연신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짓는 일리안과는 달리 비앙카는 따분한 얼굴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아차, 내 소식을 들었네만 윈터 남작, 곧 결혼한다면서?”

    “……예?”

    “그래도 애는 나중에 낳는 게 좋겠어. 사업이 잘되어가고 있지 않소.”

    제 얼굴도 잘 기억 못 하는 마르틴 백작이 알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안다는 이야기인가. 일리안은 웃는 얼굴과는 달리 두통에 머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

    상황을 중재한 것은 비앙카였다.

    “마르틴 삼촌, 백작 부인께서는요? 어머니께서 안부 인사를 부탁하셨는데.”

    “아아, 저쪽에 있다. 곧 이쪽으로도 올 게야.”

    “고마워요. 바쁘신 것 같은데 일 보세요."

    마르틴 백작은 그제야 제 턱수염을 매만지며 자리를 떠났다. 일리안은 허탈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헤이븐의 반응을 보니, 결혼은 사실이 아닌가 봐요?”

    “예……. 결혼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잘 되었네요. 사실 저도 헤이븐이 결혼한다는 사실이 안 믿겼거든요.”

    비앙카는 평연한 얼굴로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사이, 일리안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산전수전을 모두 겪어온 백전노장 일리안이었지만 그것은 사실 전쟁터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였다. 사교계에 대해서는 그녀에게도 아직 낯선 곳이었고, 때문에 일을 해결할 생각에 머리가 까마득해졌다.

    “소문을 없애고 싶으세요?”

    “방법이 있습니까?”

    “그야 없죠. 한번 난 소문이 쉽게 잡혔으면, 세상에 루머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을걸요?”

    입을 다물었다. 비앙카의 현실적인 성격이 좋아 친해졌지만 막상 직접 겪자 명치 쪽이 아렸다. 그러자 작게 웃은 비앙카가 덧붙였다.

    “하지만 소문을 덮어버리는 방법은 있죠.”

    “덮는다면?”

    “사람들에게 더 재미난 이야기로 덮으면, 그 이야긴 더 이상 안 흘러나올걸요? 가령…….”

    가령? 일리안이 몹시도 궁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율리어스 공작 전하와의 뜨거운 열애설이라던가?”

    그 말에 일리안은 그만 테이블 위로 푹 퍼졌다. 그러면 그렇지, 소문을 덮는다는 게 그리 쉽게 될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엎드리자 테이블 위로 짧은 머리칼이 조금 닿았다. 그것이 예전보다 조금 길었음을 안 비앙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헤이븐, 머리가 길었네요? 곧 자를 때인가요?”

    “이제 머리 안 자릅니다.”

    “어머, 왜요?”

    다시 똑바로 앉은 일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편이 더 헤이븐 윈터다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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