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72화 (72/123)
  • 72. 친구

    “리트릭.”

    “어, 헤이븐. 왔어?”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리트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리안은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성큼 다가갔다.

    그곳엔 리트릭 말고도 중년 부부 한 쌍이 앉아 있었다. 일리안은 자리에 앉기 앞서 말쑥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중 여자 쪽이 그 손을 맞잡았다. 리트릭은 일리안과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못 말린다는 듯 제 고개를 저어댔다.

    “반갑습니다, 어머님. 그동안 미처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는데, 헤이븐 윈터입니다.”

    “만나서 반갑군요. 음, 윈터 남작 가문이라고 했나요?”

    “하하, 친구의 어머님 앞에서 사소한 작위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편하게 헤이븐이라고 불러주시죠.”

    여자는 호, 하고 중얼거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따라서 일리안 또한 그 맞은편에 착석했다. 4인 테이블이었던 탓에 리트릭 또한 일리안의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리트릭의 말대로 특이하네요. 너는, 저렇게 멋있는 아이였으면 어서 나한테 소개를 시켜줬어야지.”

    “아줌마, 그쪽은 바빠서 내 얼굴도 못 보는데 무슨 얘를 봐? 오늘도 일 때문이 아니었으면 평생 만날 일도 없었을 거면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찻잔을 들어 고상하게 마시던 여자는 그 아래에 있던 찻잔 받침을 들었다. 그것으로 리트릭의 이마를 내려친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아! 장난쳐?! 이거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위험하잖아!”

    “아쉽게 되었구나. 이게 깨졌으면 네 머리통도 깨졌을 텐데.”

    “……엄마.”

    “그래, 나 네 엄마 마리타 에단이다.”

    마리타는 눈을 내리깐 채 차를 한 모금 더 홀짝였다. 리트릭이 대놓고 투덜댔지만 그것까지 나무라지는 않았다.

    “자자, 마리타. 너무 그러지 마오. 리트릭도 나이가 있는데 예쁜 여자 친구 앞에서 창피하고 싶지는 않겠지.”

    “미쳤어요, 아버지? 얘가 왜 내 여자 친구야?”

    “옌스. 내가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거기다 ‘예쁜’ 여자 친구라니. 멋지다고 하는 게 훨씬 더 어울려요.”

    옌스라고 불린 남자는 시무룩한 얼굴로 응……. 이라고 소심하게 대답했다. 마리타는 그런 옌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일리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리안은 마리타의 뜨거운 시선을 받자 멋쩍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리트릭을 통해 조금은 들었는데, 분재 사업을 한다죠?”

    “예, 그렇습니다. 아직 유명한 편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이름을 쌓아온 디버튼 분재원이 윈터 분재원으로 이름을 바꾸어서요.”

    “호오. 그 디버튼 분재원이란 말이군요? 그곳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없어진 줄 알았더니 이름을 바꾸었던 거로군요.”

    불같은 리트릭의 성격은 아무래도 어머니 쪽을 닮은 것 같았다. 마리타는 오로지 제 힘으로 일궈낸 사업을 통해 준귀족의 자리에 오른 여자였다. 그녀의 사업 수완은 이 근방에 사는 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이야기였다.

    “뭐, 그래요. 본론부터 이야기하죠. 화원을 하나 더 차릴 예정이에요.”

    “파란 화원 같은 곳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죠. 하지만 똑같은 형식의 화원을 근방에 하나 더 차릴 필요가 있겠어요? 이번 화원의 주제는 ‘밀회’랍니다.”

    마리타가 찻잔을 조금 밀어두고서 제 턱을 매만졌다. 남편은 그녀의 찻잔을 조금 더 치우고 그 앞에 가져온 종이를 꺼내 들었다.

    “우리도 내도록 계약을 해온 분재원이 있었는데, 워낙 인기가 많은 곳이다 보니 새로운 화원의 물량까지 감당하기엔 버겁다더군요. 리트릭에게 들은 것도 있고……. 그 화원에 들어갈 꽃들에 대해선 헤이븐 양에게 맡겨보고 싶은데. 되겠어요?”

    일리안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종이 계약서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그곳엔 특별히 유리하지도, 그렇다고 불리하지도 않은 계약 내용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계약서를 읽는 동안 에단 부부는 가만히 그녀를 기다렸다. 리트릭만이 일리안의 옆에 바짝 붙어 제겐 필요도 없는 계약서를 함께 읽으려 들었다.

    그 모습이 남들이 보기엔 신혼부부로 오해할 만큼 가까워 보였다. 일리안은 자꾸만 붙어오는 리트릭을 어깨로 슬쩍 밀어냈다.

    “아직 이름도 알리지 못한 작은 분재원인데, 과분한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뭐, 내 아들놈의 친구라는 이유가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헤이븐 양을 보고 나서 마음을 결정한 것도 있으니 기죽을 필요는 없답니다.”

    아름다움보다는 깔끔함에 더 무게를 둔 일리안의 겉모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마리타의 턱 끝에서 딱 떨어지는 단발머리가 찰랑였다.

    “기죽진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궁금한 것?”

    “주제가 밀회라면 아직 보진 못했지만 보통의 화원들처럼 개방되어 있지 않겠군요. 그렇다면 번잡하진 않으면서 은밀한 분위기가 나야 할 것 같은데…….”

    일리안이 엄지로 제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화원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꽃을 보내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꽃과 나무를 어디에 배치하고, 사후 관리까지 담당한다는 뜻이었다. 윈터 분재원에는 귀족가의 정원을 꾸며본 일이 제법 있었지만 이런 특별한 형태의 화원을 맡아본 적은 없었다.

    일리안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마리타가 갑작스레 호탕한 웃음을 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리트릭과 에릭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하! 내 살면서 헤이븐 양 같은 귀족 영애는 처음 보아서요. 리트릭이 웬 귀족 영애 친구가 사업을 한다기에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무시를 했었는데, 그래선 안 되겠군요.”

    웃음기가 가신 마리타는 제 남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옌스가 기다렸다는 듯 펜을 건네었다. 마리타는 펜으로 계약서의 한편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계약금 부분이 처음보다 조금 더 올라가 있었다. 일리안은 바뀐 계약서를 다시 읽었다.

    “이 화원을 꾸미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헤이븐 양의 안목은 믿어보고 싶군요.”

    “실망시킬 일은 없을 겁니다.”

    “대답 마음에 드네요! 노력해 보겠다느니, 그런 대답이 딱 싫다니까.”

    마리타는 제가 들고 있던 펜을 일리안의 앞에 내려두었다. 계약을 재촉하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계약서를 들고 가서 읽어보고 우편으로 보내도 좋아요. 지금 서명을 해주면 더 좋고. 뭐가 되었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거든.”

    “뭐……. 다음 약속이라도 있어? 오늘은 내 친구 보는 거기도 하니까 약속 잡지 말랬잖아.”

    “내가 언제 약속 있다고 했니? 나도 내 아들놈 친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궁금했다.”

    “그럼 이렇게 재촉하는 이유는?”

    리트릭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리타는 제 옆쪽을 턱짓할 뿐이었다.

    그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 옆에는 행색이 제법 좋아 보이는 사내 몇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남자들은 일리안의 테이블을 향해 힐끗힐끗 시선을 주다 리트릭이 바라보자 재빨리 눈을 피했다.

    거기다 일리안의 테이블은 창가 자리였다. 전면이 유리로 된 창 앞에 앉아 있던 리트릭이 그곳을 바라보자 양산을 들고 길거리를 건너던 영애들과 눈이 마주쳤다. 영애가 옆에 있던 이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 리트릭에게도 보였다.

    “내 아들놈에게 저런 멋진 신부가 생겼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헤이븐 양에게 너무 미안하지 않겠어?”

    “엄마!”

    “불만이면 그렇게 달라붙지를 말든지. 계약서 읽을 때 네가 입술을 얼마나 내밀었는지 아니? 입 냄새라도 날까 싶었다.”

    마리타의 말대로 괜한 소문이라도 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파란 화원을 리트릭과 함께 다닌 뒤로 어떤 사이인지 물어보는 이들이 종종 있었으니 곧 결혼을 한다는 소문이 돌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리안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계약서에 날인을 했다. 그리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제가 밀회인 화원이라니, 제법 잘 될 것 같습니다. 지금만 봐도 남의 눈이 없는 자리가 필요하긴 하겠군요. 계약서는 제가 챙기고,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보아요. 다음번엔 우리 집으로 초대하도록 할게요. 식사라도 한번 하고 싶으니까.”

    그녀가 자리를 떠나자 리트릭이 마리타를 힐끗 바라보고선 따라갔다.

    남편과 둘만 남은 마리타는 제 아들의 뒷모습을 향해 쯧쯧 고개를 저었다.

    “제 옆에 있는 보석을 못 알아봐. 이러니 내가 사업을 못 맡기지.”

    “마리타, 보석이라니?”

    “저런 아이가 며느리로 들어오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이야.”

    마리타가 일리안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안 옌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가에 진 주름이 접히며 마리타를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럴 때가 사랑스러워.”

    “미쳤어?”

    “아직은 아니니 걱정 말아. 리트릭의 저런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밖에 못 하는 게 사랑스럽다는 뜻이야. 리트릭은 정말 당신을 닮았다니까.”

    마리타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불 송아지 같은 제 아들이 자신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자 옌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좋아하는 것 보는 눈이 똑같잖아.”

    * * *

    “야, 헤이븐! 기다려!”

    “리트릭?”

    “암만 나랑 신혼부부로 보이는 게 싫어도 그렇지, 그렇게 빨리 가냐? 어디 갈 데라도 있어?”

    일리안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리트릭의 부모님과 식사라도 할 참이었는데, 제 생각보다 보는 눈이 많아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 탓에 빈 시간이 제법 되었다.

    “에릭이 집으로 돌아갔다더라.”

    “……들었냐.”

    “윈터 가문으로 만나러 갔는데 없기에 그 녀석 집으로 가봤거든.”

    리트릭이 에릭에게 찾아간 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리트릭이니? 마침 잘 왔구나.”

    저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방에서 꼼짝을 안 하지 뭐니.

    에릭의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리트릭은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대낮부터 찾아간 리트릭이 본 것은 방 안에 내려앉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에릭은 방 안의 불을 모두 끄고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리트릭이 퍽, 에릭의 허리를 발로 찼다.

    “인마. 여기서 뭐 하냐? 헤이븐은?”

    “……리트릭.”

    그가 죽은 눈을 하고 리트릭을 올려다보았다. 생기가 없는 데다 주변이 어두워 꼭 시체 같았다.

    “어쩌면 좋지. 나, 다시는 헤이븐을 못 볼지도 모르겠다.”

    “왜?”

    “하면 안 될 짓을 저질렀거든…….”

    리트릭은 쯧, 짧게 혀를 차고 에릭의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자리가 비좁아 겨우 걸터앉은 것 같기는 했지만.

    “차라리 잘됐네. 너 딱히 기사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잖냐.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범선이나 배우러 가.”

    “나는 범선보다도 헤이븐을 더 좋아했어.”

    그의 목소리는 희미한 물기에 젖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 녀석이 내 범선을 만지던 순간부터, 나는 그깟 배 모형보다도 그 손에 더 눈길이 갔어.”

    ‘배를 좋아해?’

    헤이븐 윈터는 에릭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었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부터 에릭은 눈길을 뗀 적이 없었다.

    에릭은 폭력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헤이븐과 리트릭, 둘을 데리고 무술 대회를 보러 갔을 때에도 살이 터지는 소리에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기사는 폭력을 쓰는 직업이 아니었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베어야 하는 일이었다. 기사 수련생이었던 리트릭을 보며 에릭은 자신이 그 직업과 참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헤이븐이 말했다. 넌 기사가 아니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에릭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깨달았다. 자신이 기사가 되어 헤이븐 윈터에게 속한다면 평생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다고. 그것이 비록 보답받진 못할지 몰라도, 고작 친구인 것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그렇게 자신을 위안했다. 그리고 에릭은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 날, 자신의 방에 있던 모든 배 모형을 불태웠다.

    “어떡할까. 리트릭, 나도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죽을 것 같다…….”

    에릭이 제 팔을 들어 눈 위를 가렸다. 리트릭은 그런 에릭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좋아했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상투적인 위로를 건넬 수도 없었다. 그가 위로를 머뭇거리는 사이 에릭은 그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들었다.

    겨우 에릭이 잠이 들었음을 안 리트릭은 해가 질 때까지 곁에 앉아 기다렸다. 에릭이 정신을 차리면 강제로 데리고 나가서라도 술을 마실 심산이었다. 단순한 리트릭에게 있어서 술만큼 고민 해결에 좋은 것도 없었다.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던 리트릭은 고개를 돌려 눈을 가린 에릭을 힐끗 바라봤다. 낮은 한숨이 몰려왔다.

    “새끼, 친구라고 양보해 줬더니 등신같이.”

    한탄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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