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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71화 (71/123)
  • 71. 겨울이 지나가려면

    일리안은 라울을 품에 안은 율리어스의 곁에서 그를 묵묵히 따라갔다. 이미 해는 바닥으로 가라앉아 사위가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잠이 든 라울을 품에 안고 윈터 저택에 오는 동안, 율리어스는 가끔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피가 나는 발이 못내 신경 쓰인 탓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라울을 안아 들지 않으면 그녀가 다친 발로 대신 안아 들었을 것을 알고 있었다. 차마 그 모습만은 볼 수 없어 율리어스는 라울을 품에 안은 것이었다. 일리안에게 마법으로 이동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조금 걷고 싶다고 대답했다.

    “헤이븐 님! 잘 다녀오셨어요?”

    “……아, 타피아. 그래.”

    저택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타피아와 디노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일리안에게 인사한 그들은 곁에 있던 율리어스에게도 예의 있게 인사했다.

    이어서 일리안이 율리어스로부터 라울을 받아 들었다. 율리어스는 그녀가 당연히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는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채였다.

    그러나 일리안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디노에게 라울을 맡겼다. 갑작스레 라울을 받아든 디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헤이븐 님?”

    “디노, 타피아. 율리어스와 내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먼저 들어가도록 해.”

    “아, 율리어스… 님과 말이군요. 예! 알겠습니다.”

    디노는 순간 일리안이 율리어스를 편하게 부른다는 사실을 자각한 눈치였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잠이 든 라울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타피아와 함께 먼저 저택으로 들어갔다.

    일리안이 뒤로 돌아섰을 때에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율리어스가 있었다.

    무미건조한 그의 얼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일리안은 알고 있었다. 제 앞에 있는 율리어스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할 이야기가 있어 잡아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전 생에서 일리안 하인리히로 살 때에는 조금도 느끼지 못하던 것이었다.

    “율리어스.”

    “예.”

    무턱대고 그를 부른 일리안은 입을 열다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자신이 일리안 하인리히가 맞음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관둘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율리어스가 내도록 보여준 행동들과 에릭의 이야기를 듣고서 일리안 또한 느끼는 바가 있던 탓이었다.

    “……왜, 발로란 산에서 라울이 죽도록 내버려 뒀어?”

    “보내지 않는다.”

    라울이 산의 아래로 향했음을 알았던 율리어스가 내린 명령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는 순간 라울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했다.

    그가 준비했던 사람이 반으로 나뉘어 쫓아갔더라면, 확실하게 살 확률은 떨어지더라도 둘 중 하나가 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불확실한 둘을 살리느니 일리안 하인리히 하나를 확실히 살리고자 했었다.

    “…….”

    “오늘은, 그래. 라울이 사라졌지. 내 발에 난 이깟 상처보다도 나는 라울이 더 소중했다. 율리어스,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만약, 만약에. 라울에게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그래서 내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 아이를 죽일 겁니다.”

    담담히 아이를 죽일 것이라 말하는 율리어스의 눈은 무감각했다. 그는, 일리안 하인리히의 일이 아니고서는 조금도 인간의 눈빛을 하지 못했다.

    “그 아이 탓에 당신이 위험에 처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습니까? 일리안, 나는 오늘 당신의 발에 상처가 난 것만으로도 아이를 없애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보다도 미쳐 있어.”

    에릭이 한 이야기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일리안은 그가 비록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마법을 쓰더라도, 인간의 감정을 지닌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생각의 모순을 깨달았다.

    율리어스, 그는 일리안과 관련된 일이 아니고서는 인간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정은 오로지 일리안 하인리히로부터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대체 왜 라울을 살린 거냐. 동굴에서 아이를 구해 데려와 살린 건 율리어스, 너였을 텐데.”

    주먹이 꽉 쥐어졌다.

    라울을 살리지 말았어야지, 라는 타박이 아니었다.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상처를 입은 라울을 데려와 신관을 붙여준 것은 결국 율리어스였다. 때문에 일리안은 그가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쯤 라울을 아끼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질문은 그녀의 마지막 보루였다. 율리어스가, 조금쯤 자신의 이상함을 깨닫고 대화로 풀어갈 수 있는 마지막 선.

    “―아이는 당신이 일리안 하인리히라는 증거니까.”

    그의 눈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율리어스는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오로지 그것만을 배워온 아이처럼, 그는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느낄 줄 몰랐다.

    아직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라울에게서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고, 아이의 어머니인 일리안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했다. 그의 사랑은 지독히도 외골수였다.

    사람은 모두 태어나서 몸을 뒤집고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그다음엔 걷는 법을 배워 조금씩 세상을 알아간다.

    율리어스를 그것에 비유하자면, 그는 처음부터 걷는 법만을 배웠다. 뒤집는 것도, 일어서는 것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인간으로 태어나 배운 감정을 느끼는 법은 오로지 일리안 하인리히, 그녀를 통해서 뿐이었다.

    “실망했습니까.”

    율리어스가 성큼 다가섰다. 그의 차갑게 식은 손이 일리안의 비어 있는 손을 붙들었다. 일리안은 그 체온이 몹시도 차가워 꼭 잘 만든 인형이 붙잡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껏 그가 한 말에 비하자면 너무나도 인간다워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율리어스는 자신이 라울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순간 일리안이 실망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거짓 없이 그녀에게 이야기한 것이었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에요, 일리안. 결국 내 모든 행동의 동기는 일리안, 당신이 헤이븐 윈터가 아니라 일리안 하인리히라는 이유에서 나오는 거라고.”

    입을 다물고 있던 일리안은 끝내 실소가 터졌다.

    자신이 오늘 낮에 무어라 말했던가. 제 눈엔 더럽게 사랑스럽기만 한 인간이라고, 그를 꺼림직해하던 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나.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지금도 그러했다. 일리안은 제가 없으면 삶을 포기하는 그 드래곤을 사랑하고 있었다. 제 도덕적 잣대로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어도, 그것을 모두 눈 감고 저 녀석을 사랑해 주어야겠다고.

    그리고 일리안은 지금 이 순간 그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율리어스.”

    “예, 일리안.”

    “다시는 나를, 일리안이라고 부르지 마라.”

    제 손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을 털어냈다. 일리안은 뒤돌아서서 먼저 걸음을 떼었다.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댔다.

    문득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마요.”

    몇 발자국 떼었던 일리안이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바로 뒤에 율리어스가 따라붙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얼핏 간절하다고 느껴졌다. 뒤돌아서 있어 율리어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가지 말라고 하는 그의 목소리가 진심임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율리어스, 마지막으로 묻자.”

    일리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콧대에 차가운 무언가가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눈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언제든 너라면 충분히 아이를 없앨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냥 둔 거냐.”

    오래도록 대답이 없었다.

    그는 제 감정을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율리어스가 세상에 태어나 배운 것이라고는 고작 일리안 하인리히뿐이었으니 헷갈릴 이유도, 혼란할 이유도 없었다. 단지 그가 오래도록 대답을 고민한 것은…….

    “아이가 사라지면, 당신이 울잖습니까.”

    자신이 대답을 하는 순간, 일리안이 자리를 떠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율리어스는 조금이라도 더, 그녀가 대답을 기다리는 그 찰나의 순간이라도 일리안을 보고 싶어 했다.

    자연스레 나오는 대답에 일리안은 순간 울컥 감정이 쏟아졌다. 이제는 받아줄 수 없는 그의 마음이 벅찰 정도로 느껴져 왔다.

    입매를 움찔거린 일리안은 돌아보지 않고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리안.”

    율리어스라면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걸어가는 그녀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마법 같은 대단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일리안의 옷깃이라도 붙들었다면 그녀는 충분히 멈추었을 것이다.

    일리안 또한 그가 혹시 붙잡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옷깃 하나, 이름 하나 부르는 것이 소중해 그럴 수 없었다. 율리어스는 차마 붙잡지 못한 손만 허무하게 들어 올렸다 내릴 뿐 그녀를 강제하지 않았다. 그에겐 충분히 그럴 힘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결국 그녀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 * *

    “헤이븐 님, 몸이 다 식으셨어요. 따뜻한 물을 준비해 둘까요?”

    저택에 들어온 일리안은 그러고도 몇 분을 가만히 문에 기대어 있었다. 그러다 타피아가 말을 걸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들었다.

    단번에 다가온 타피아는 일리안의 어깨 위에 조금 남아 있는 눈송이를 툭툭 털어냈다. 그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던 일리안은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타피아.”

    “네, 헤이븐 님. 말씀하세요.”

    “내가 가지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일리안은 제법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녀는 나름대로 그간 쌓아온 제 삶의 방식이 있었고, 규율도 있었다. 그것은 무릇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일 터다.

    그러나 율리어스를 만나고서 그 아이가 자신에게 가지는 마음이 어떤지를 깨닫고서는 그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를 사랑하려면 일리안은 자신이 지켜온 삶의 규율을 모두 깨트려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지고 싶었다.

    오로지 혼자였던 일리안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가져본 욕망이었다. 타파는 계집애가 가지고 싶은 것 하나가 없다며 나무랐고, 미하엘은 욕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타박했으니 그녀로서는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사실, 내가 가지기엔 너무 크더라고…….”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감정을 모두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일리안을 강제한 적이 없었고, 늘 그녀를 우선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모두 일리안이 바라는 것과 상충하지 않을 때였다.

    만약 그녀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일리안이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두 하고 말 터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이라 하더라도.

    “헤이븐 님, 가지고 싶은 게 있으셨어요? 말씀을 하지 그러셨어요.”

    “하하, 그러게. 이제 제법 돈도 모았는데 말이야.”

    “재정을 아껴볼까요? 조금 사치스럽게 생활하고 있는 것도 있으니 그 부분을 줄이면…….”

    “무슨. 되었어, 돈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돈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말에 타피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에게 말했다.

    “가지기엔 너무 크다니, 갖고 나서 말씀하셔도 되지 않겠어요?”

    “뭐?”

    “그러고 나서 반품해도 늦지 않다고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하고도 자신과 율리어스의 마음이 상처받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꼭 한번 가지고 싶으셨다면서요.”

    “…….”

    “후회하실지도 모르는 일인걸요.”

    중얼거리듯 말을 마친 타피아는 한편에 난 창가로 다가갔다.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기 위해서였다.

    창 너머로 흰 눈송이들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끝물이 되어가는 겨울 속에서, 아마도 마지막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에 타피아가 잠시 몸을 떨었다.

    마지막 추위와 함께 겨울이 지나가려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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