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70화 (70/123)

70. 애정이라는 변명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라히텐슈 후작이 라울을 데려간 건가? 아니, 그렇다기에 그 가문은 후계도 없으니 이미 망했을 텐데. 아니면, 단순히 아이가 미아가 된 걸까.

무엇부터 해야 하지? 일단, 멀리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주변을……. 손가락을 움찔거린 일리안이 허망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저들끼리 떠드느라 바빴다.

“헤이븐.”

“…….”

“일리안!”

어깨가 와락 잡혔다. 일리안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그제야 초점을 바로 하고 앞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율리어스가 그녀를 붙잡은 채 응시하고 있었다.

“이봐, 율리어스, 아이가……. 라울이, 없어졌어.”

“멀리 가지 않았을 겁니다. 눈을 뗀 시간이라곤 고작 10초 남짓이었으니, 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율리어스는 침착한 태도로 그녀를 달랬다. 일리안만이 당황에 빠진 얼굴로 멍하니 율리어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렸다.

“……마법으로 주변을 둘러보겠습니다. 이곳 미아보호소에도 연락을 해둘 테니, 그런 얼굴은 하지 마세요. 내가 찾아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리안, 나를 믿어요?”

“율리어스.”

“그래, 내가 바로 율리어스란 말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에 가깝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내 마나를 모조리 써서라도 찾아낼 테니 울지 말란 말입니다!”

일리안의 볼 위로 느릿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율리어스의 말에 손을 들어 제 뺨을 닦아냈다. 그녀 자신도 울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결국 일리안을 보다 못한 율리어스가 그녀의 등을 붙잡아 껴안았다. 그의 큰 손이 일리안의 뒷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일리안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도 멍하니 눈물을 흘리기 바빴다.

“울지 마요. 당신이 그런 얼굴을 하면 내가 어떻게 두고 갑니까.”

조심스레 일리안을 제 품에서 떼어낸 율리어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손을 들어 일리안의 눈 아래를 훔쳤다.

일리안은 그런 율리어스를 바라보다 이내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강한 힘이 아니었는데도 그가 쉽사리 떨어져 나가자 그녀는 제 앞머리를 한번 쓸어 올렸다. 그러자 일리안의 눈빛이 단번에 바뀌었다.

“……난, 주변을 돌아봐야겠다.”

“찾거든 제 이름을 부르세요. 당신이 어디 있든 들을 수 있으니까.”

율리어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법사의 존재는 귀했다. 때문에 그가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멈춰 서서 율리어스를 구경했다. 경외의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반, 조금은 꺼림칙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반이었다.

일리안 또한 그 자리에서 율리어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무수히 많은 사람들 사이로, 율리어스는 단 1명만을 바라봤다. 결국 먼저 등을 돌린 것은 일리안이었다.

“세상에, 마법사인가 봐.”

“난 마법사들은 조금 꺼림칙하더라. 물론 마법을 써주는 건 고맙긴 한데. 사실 타고났을 뿐이지, 대단한 건 아니잖아?”

“하하,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 인간이 아닌 것 같지?”

“어, 좀 다른 종 같아.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왜 몬스터 중에도 인간형이 있잖아, 그런 류의…….”

누군가의 이야기가 들려오자 일리안은 문득 방금 전 율리어스의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에 가깝다며, 저 자신을 생채기 내는 말을 하면서도 일리안의 눈물이 마음 아픈 것 같은 얼굴을 했었다.

비늘이 돋는다 한들, 그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마법을 쓴다고 한들 누가 그를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봐요, 형님들.”

“예, 예? 저희요?”

“그 사람, 인간 맞습니다.”

“그게 무슨…….”

“망할, 내 눈엔 더럽게 사랑스럽기만 한 인간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습니까?”

대화를 나누던 이들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일리안은 눈시울이 조금 붉기는 했지만 조금도 기죽지 않은 모습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슬며시 흩날렸다.

* * *

공원은 넓었다. 식당가, 놀이 구역, 동물원, 식물원 등이 모두 합쳐진 곳이라 그녀 혼자 모든 곳을 둘러보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오늘은 휴일이라 다른 날보다도 유독 사람이 터져 나갔다.

일리안은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주변에 금발 머리의 푸른 눈을 한 남자아이를 보았느냐며 묻고 다녔다. 그게 무려 5시간째였으니, 이미 해는 천천히 지고 있었다.

“……벌써 해가 져?”

라울이 추워할 텐데.

하, 하고 낮게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쏟아졌다. 밤이 되면 지금보다도 훨씬 추워질 터다.

만약 이대로 찾지 못한다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작 10초 남짓 눈을 떼었을 뿐인데 아이가 사라진 지 벌써 5시간이 지나갔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돌리고 싶었다.

이제는 정말 그만 울려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아이를 쫓아다니는 것들은 모두 사라졌으니, 라울이 좋아하는 것만 시키며 편하게 살아야겠다고. 그 결심을 한 지가 1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10초. 그게 무어란 말인가?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서 잠깐이라도 눈을 뗀 자신이 잘못했다. 보호자로서 책임을 못 다한 제 잘못이었다.

“저, 실례합니다만 혹시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아이가 혼자 다니는 걸 못 보셨습니까?”

“아이참, 이 사람 보게. 1시간 전에도 저기서 우리한테 물었잖아요! 못 봤다니까! 귀찮게 굴지 마요.”

“엄마, 이 사람 신발에서 피나요.”

“신경 쓰지 마. 이상한 사람이야, 정말. 어서 가자.”

팔을 붙들렸던 여자는 일리안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대신 제 아이의 손을 붙잡고 멀리 가기 바빴다. 일리안은 그런 모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자신도 저렇게 라울의 손을 잡고 있어야 했다. 꼭 잡고, 놓아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손을 놓아버려서.

그때였다. 그녀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피가 나잖습니까.”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율리어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는 일리안의 오금에 팔을 넣고 번쩍 들어 올렸고, 일리안은 균형을 잡느라 율리어스의 어깨를 짚어야만 했다.

“……율리어스? 라울은. 찾았어?”

율리어스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벤치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일리안이 자리에 앉자 그가 옷이 망가지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양손으로 조심스레 발을 들어 올려 신발을 벗겨냈다.

“발이 부르텄습니다.”

베이지색 가죽신은 검은 잉크라도 묻은 양 흉하게 번져 있었다. 신발이 벗겨지자 일리안의 흉하게 찢어진 발이 드러났다. 신발 안에 신는 쇼셰트 또한 얼기설기 찢어져 상처와 뒤범벅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상처가 난 줄도 모르고 움직였을 터다. 모르는 아이가 흠칫 놀랄 정도로 신발이 피에 젖었으니 상처의 크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되었어, 이런 것쯤은. 그보다 라울은?”

“나한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면서 이러시는 겁니까.”

“지금 내 발이 중요하냐. 아이가 없어졌다고.”

“내겐 당신 애도 아닌 그 꼬마보다 발에 난 상처가 더 중요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자 일리안은 낮게 제 미간을 짚었다. 두통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율리어스는 들러붙은 천 조각들을 떼어내고 마법으로 발을 씻겼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피가 흐르자 자신의 크라바트를 찢어 지혈했다.

“……그래. 발은 치료하도록 할게. 라울부터 찾고.”

“아이는 찾았습니다.”

“뭐?! 어디. 어디서?”

다급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묻자 율리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답을 하는 대신, 그는 일리안을 다시 안아 들었다.

발이 다친 그녀를 걷게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리안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려진 몸에 균형을 잡느라 엉거주춤하자,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눈을 가렸다.

“율리어스? 갑자기 눈은 왜…….”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큰 손이 사라졌다. 다시 앞을 바라봤을 때에는, 이미 공간이 바뀌어 있었다. 그곳은 게릭의 집 앞에 있는 텃밭이었다.

“에닉! 감자, 감자가 있어요!”

율리어스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일리안의 시야에 아이의 조그만 등이 들어왔다. 라울은 무언가를 품에 꼭 안고서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상대는 나무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라울의 너머에 앉아 있던 이가 갑작스레 벌떡 일어났다. 그 반동에 나무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어떻게……. 어떻게 이곳에.”

일리안이 율리어스의 어깨를 툭 치자 그가 그녀를 바닥에 내려뒀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일어선 상대의 앞으로 향했다.

“헤입븐! 나, 오늘 에닉이랑…….”

“에릭. 어떻게 된 일이냐. 네가 설명해.”

턱수염이 거뭇하게 난 에릭이 멍청한 얼굴로 일리안을 바라봤다. 그는 입만 뻐끔뻐끔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둘의 근처에 서 있던 라울은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대신 멀리 선 율리어스에게로 달려가 매달렸다.

“……헤이븐, 나는, 그러니까.”

“네가 아이를 데려갔냐?”

“……응.”

퍽, 살이 맞는 소리와 함께 에릭의 뺨이 돌아갔다. 주먹으로 한 방을 날렸던 일리안은 숨 한 번 가다듬지 않고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에릭은 붉어진 뺨을 한 채 다시 일리안을 바라봤다.

“왜?”

“네가, 나를 봐주지 않으니까…….”

퍽. 다시금 에릭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이번엔 일리안을 바라보지 않고 얻어맞은 그대로 고개를 멈췄다.

“미쳤구나, 에릭.”

“그래. 난 이미 미쳤어, 헤이븐.”

“내가. 내가! 라울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런 짓을 했다고? 에릭, 네가?”

일리안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눈가가 자꾸만 달아올랐다. 새로운 생을 살며 그나마 가까운 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제게 상처를 줄 것을 알면서도 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에릭은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실, 이대로 라울을 데리고 제국을 떠날까 생각했다고 하면. 다시는 나를 보지 않을 거냐?”

“…….”

“내가 라울을 데리고 이대로 사라진다면 너는 나를 죽어도 잊지 못하겠지. 그게 비록 좋은 감정은 아니라도 말이야. 아니, 어쩌면 평생 나를 찾기 위해 움직일지도 몰라. 너무 솔깃한 이야기잖아.”

나는 이미 미쳤어, 헤이븐.

에릭이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공원에서 다른 이를 시켜 라울을 불러내고, 아이를 품에 안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라도 헤이븐의 머리에 남는다면, 남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고작해야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나는 차마 실행에 옮길 수가 없더라.”

“…….”

“그런데 말이다, 헤이븐. 내가 아니라 저놈이었다면? 네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다른 이를 향한다면, 내 상황과 저놈의 상황이 바뀌었다면 과연 참았을까?”

에릭이 일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 너머로 서 있는 율리어스를 노려보았다.

“알고 있잖아. 그는 나보다도 미쳐 있어. 내가 아니라도 좋아. 네가 보는 게 내가 아니라도 좋으니까, 저놈만은 안 된다고!”

그녀가 에릭을 밀어냈지만, 그는 팔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조금만 밀어도 스르륵 밀려 나갔던 율리어스에 비하자면 몹시도 강경한 태도였다. 결국 일리안은 두 손으로 그를 밀쳐낼 수밖에 없었다.

“에릭, 정신 차, 읍!”

에릭이 일리안의 양 뺨을 붙들고서 갑작스레 입을 맞추었다. 게걸스레 그녀의 입술을 탐한 지 몇 초가 되지 않아 에릭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떨어져 나갔다. 그가 바닥을 굴렀다.

“율리어스!”

율리어스는 무감각한 눈으로 발을 들어 에릭을 짓밟으려 했다. 그것을 멈춰 세운 것은 일리안이었다. 그녀가 율리어스의 옷깃을 붙잡자 그는 우뚝 멈추었다.

일리안이 율리어스를 뒤로 밀고서 대신 주저앉은 에릭의 앞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바닥을 보는 에릭에게 그녀가 말했다.

“에릭.”

“…….”

“과연, 날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어느 쪽일까.”

함부로 입을 맞춘 사람? 고작해야 옷깃을 붙잡은 것만으로도 멈추는 사람?

그녀의 얼굴은 장난스럽지 않았다. 일리안은 단호한 얼굴로 에릭의 잘못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잘못을 알려주는 것처럼.

에릭이 그런 일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뺨으로 기나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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