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69화 (69/123)
  • 69. 아이는 날 수 있다

    “그런데 에릭은?”

    디노와 놀다 잠이 든 라울은 일리안의 품에 안겼다. 아이의 엉덩이를 한 팔로 받친 일리안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없으면 으레 연무장에 가곤 하던 이라 당연히 그곳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울이 잠들 때까지 에릭의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의문이 든 것이다.

    일리안이 의아한 눈으로 디노에게 눈길을 주자 그는 눈을 끔뻑거렸다. 오히려 자신이 더 의아하단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예? 헤이븐 님, 못 들으셨단 말입니까?”

    “무엇을?”

    “에릭 경은 자택으로 돌아간다고 하셨습니다. 헤이븐 님께서 공작성에 있으니 야간 호위는 필요 없다며, 모든 짐을 빼셨는데요. 에릭 경이 공작성에 가셨을 때 못 들으셨습니까?”

    물론 들은 적이 없던 이야기였다. 에릭에게서 들은 것이라곤 고작해야 함께 윈터 저택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뿐이었다.

    문득 그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율리어스는, ……다르니까.”

    “……결국.”

    그녀의 말을 들은 에릭이 허탈한 얼굴로 하, 하고 숨을 내쉬었다. 반쯤은 예상한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상처받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에릭이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었구나.”

    율리어스를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말이 그에겐 다른 의미로 들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 생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에릭에겐 안타까운 이야기였지만 차라리 이렇게 오해하게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그가 자신에 대한 마음을 빨리 포기할 수 있도록, 일리안은 그에게 선을 그어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뭐?”

    “나는 절대로. 죽어도… 안 되는 거야?”

    에릭은 그녀의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추잡하고 구차해 보인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율리어스의 앞에 가 무릎을 꿇고 빌 수도 있었다.

    “에릭.”

    하지만, 일리안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에릭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길 바랐고, 그가 이렇게도 애타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를 원했다. 에릭이 주는 모든 마음을 그녀가 바라지 않았다.

    일리안은 안쓰러운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숙인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했다. 그러나 멈칫한 손은 결국 에릭에게 닿지 못하고 거둬들여 졌다.

    “고마웠다.”

    나에게 네 온 마음을 주어서.

    그녀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사과를 하는 순간 그가 오래도록 지켜온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에릭의 마음에 대한 인사뿐이었다.

    에릭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주먹이 쥐어졌다.

    그러나 다른 말이 나오진 않았다. 그는 그렇게 일리안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헤이븐 님, 그럼 에릭 경을 만나지도 못하신 겁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 만나긴 했으니 걱정 마.”

    “휴, 다행이군요. 헤이븐 님께 무슨 일이 있고 난 뒤부터는 걱정만 늘었지 뭡니까?”

    디노가 멋쩍은 얼굴로 제 뒷머리를 긁었다. 에릭의 검술이면 사실 위험한 일이 생기는 게 더 힘들 터다.

    “그럼 에릭은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지?”

    “예, 윈터 저택으로 들어오신 후 한 번도 휴가가 없었으니 타피아와 제가 의논해서 쉬라고 전했습니다. 헤이븐 님께서도 없으시다 보니까…….”

    “잘했어. 내일은 게릭 아저씨네 집에 가봐야… 아, 이런. 내일은 일이 있는데.”

    “일이요?”

    일리안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은 라울이 아기 새처럼 입을 쩍 벌렸다. 몇 번 입맛을 다시다 가만히 잠이 든 아이를 한 번 추어올려 안았다.

    “어, 공작 전하를 만나기로 했거든. ……라울도 같이.”

    마차에서 내린 일리안과 라울이 저택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내린 율리어스의 발치에 라울이 매달렸다.

    그리곤 언제 만날 수 있냐며 졸라댄 덕택에 율리어스는 내일, 이라고 간결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가 대단히 한가한 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게릭 아저씨네는 아침 일찍 들러야겠네. 이런, 라울. 쉬이. 방으로 들어가자.”

    일리안이 라울의 등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타피아와 디노에게 눈짓을 하고선 먼저 제 방으로 사라졌다.

    * * *

    라울의 손을 붙잡은 일리안은 거리에 있는 시계탑 아래에 서 있었다. 타피아가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둘의 옷은 하늘색으로 색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늘색의 두툼한 양털 겉옷을 입은 라울이 귀여워 지나가는 이들 몇몇이 힐끔거렸다.

    그러나 정작 라울의 손을 잡은 일리안은 아이의 귀여움에 빠져 있을 새가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게릭의 집에 다녀왔지만 부인에게 에릭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걱정하는 일리안과는 달리 부인은 다 큰 성인 사내놈이 납치를 당했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공작성에서의 일 때문에 그가 떠난 건가. 일리안은 사라진 에릭이 걱정되어 애꿎은 제 입술을 괴롭혔다. 곁에 선 라울이 그런 일리안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올려보았다.

    “헤입븐. 아파요?”

    “뭐? 내가 아프긴 왜 아파.”

    라울의 물음에 일리안이 픽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라울은 머리를 눌리고도 연신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니 아이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다시 라울에게 주의를 기울이려 할 때였다.

    일리안의 옆에서 뻗어 나온 손이 입술을 훑었다.

    “피가 나지 않습니까.”

    “율니!”

    챙이 넓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율리어스가 어느새 그들의 곁에 와 있었다. 전체적으로 남색의 단조로운 옷을 입은 율리어스는 제 얼굴이 눈에 띈다는 것을 아는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려둔 상태였다.

    그가 율리어스임을 단번에 알아챈 라울이 덥석 그의 정강이에 매달렸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아이를 정강이에 매달고도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대신 엄지로 일리안의 입가를 문질렀다. 그의 흰 손가락에 붉은 피가 묻어져 나왔다.

    “씹을 게 필요하신 겁니까?”

    “뭐? 아니, 예?”

    “그런 거면 차라리 내 팔을 무세요.”

    그가 일리안의 입가로 자신의 팔을 쑥 내밀었다. 팔소매를 반쯤 걷어 올린 데다 그녀의 눈을 직시하는 눈빛이 진심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일리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팔을 도로 돌려주었다. 그러자 율리어스가 담담히 제 팔을 거둬들여 소매를 내렸다.

    “아까워서 그럽니다. 그렇게 씹어버릴 입술이 아닌데.”

    팔소매를 내린 율리어스는 차분히 손목 부근의 단추를 끼워 넣었다.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말이 묘하게 야하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아직 목덜미가 붉어지진 않았다. 대신 황급히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어딜 가는 게 좋겠습니까?”

    “더 이상 일리안이라고 부르지 않을 테니 존댓말은 치우세요. 어차피 처음에도 반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일리안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이제껏 제멋대로 존댓말과 반말을 뒤섞었으니, 이제 와 반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터다.

    “어딜 가는 게 좋을까.”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그럼, 베어글 공원으로 가자. 라울이 거기 가는 거 좋아하거든.”

    일리안이 라울을 데리고 수도로 올라올 때면 종종 가던 곳이었다. 아이들이 놀기에 적절하게 만들어진 공원은 무성하게 심어진 꽃과 나무는 물론 조그만 놀이 공간도 존재했다.

    베어글 공원에 도착하자 제법 많은 이들이 보였다. 오늘이 주말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긴 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꽤나 복잡한 상태였다.

    아이들이 자주 찾는 곳답게 곳곳에선 가족 구성들이 많았다. 한 손에는 라울의 손을 잡고, 반대편에는 조용히 자신을 따라오는 율리어스를 둔 일리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산책길을 걸어갔다.

    “율리어스, 이런 곳에 와본 적은 있어?”

    “사업차 방문했었습니다.”

    “아, 사업차……. 뭐? 그럼 여기가 네 길이란 말이냐?”

    “정확히 제 길은 아니고 황궁에서 하는 수도 조성 사업에 투자를 했습니다.”

    일리안은 평연하게 자신의 부를 이야기하는 율리어스를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결국 이 공원을 제 돈으로 만들었다는 소리나 다름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공원에 조성된 모든 꽃들을 제치고 그녀에게만 눈길을 주는 율리어스를 애써 무시한 일리안은 라울에게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라울이 일리안의 손을 붙잡은 채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리안은 아이의 시선을 따라 제 눈동자를 움직였다.

    “……이런.”

    그곳엔 부모의 손을 하나씩 붙잡은 남자아이가 있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양쪽에서 붙잡아주는 부모의 손을 따라 날아오르는 아이의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라울이 걸려 목마를 해주지 않았던가. 일리안은 씁쓸히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울. 부러워?”

    “…….”

    라울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입술이 조금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시무룩한 표정인 채였다.

    “아?”

    라울은 갑작스레 들어 올려진 제 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깨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손을 잡고 있는 율리어스가 눈에 들어왔다. 라울은 입을 벌리고 놀라다 아!, 하고 눈을 반짝였다.

    아이가 재빨리 일리안의 손을 잡아챘다. 얼떨결에 나란히 서게 된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그녀에겐 시선을 주지 않았다. 단지 키 차이가 너무도 나는 라울을 위해 애매한 자세로 어깨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둘의 손을 붙잡은 라울이 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일리안과 율리어스는 단지 손만 잡고 있어도 알아서 라울이 폴짝폴짝 뛰어댔다.

    아이가 그토록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늘 조용하고 낯가리기 바빴던 라울답지 않았다. 이렇게나 활발한 아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헤입븐! 율니! 나 날아요! 날고 있어요!”

    라울이 폴짝 날아올랐을 때였다. 율리어스가 힐끗 라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라울의 몸이 미묘하게 조금 더 두둥실 떠올랐다. 저 멀리 똑같이 부모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이와는 확연히 차이 날 정도였다. 라울은 자신이 구름을 밟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리안은 그저 손만 꼭 잡고 있어도 알아서 두둥실 날아오르는 라울의 모습에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하다 율리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가 라울에게 말없이 마법을 걸어주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한참을 날아오르던 라울을 슬슬 지쳤는지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제 양손을 붙잡은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라울, 그렇게 좋아?”

    “헤입븐. 율니. 좋아요.”

    연신 둘을 살펴보던 라울이 갑작스레 둘의 손을 죽 끌어당겼다. 라울은 장난감이라도 붙이는 양 둘의 손을 부딪치게 만들었다.

    먼저 반응한 것은 일리안이었다. 차가운 손과 닿자 움찔거린 일리안이 제 손을 거둬들이려 했다. 그것을 제지한 것은 율리어스였다.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천천히 감싸듯 붙잡은 율리어스는 손을 꽉 붙잡았다. 사실, 옭아맸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몰랐다.

    “……율리어스.”

    일리안이 손을 놓기 위해 살살 흔들어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율리어스는 이미 제 일이 아니라는 듯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러나 일리안은 알고 있었다. 율리어스의 기분이 몹시도 들떠 있다는 것을.

    짧은 한숨을 내쉰 일리안은 나머지 손으로 라울을 붙잡기 위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손을 잡게 해주고 뒤로 빠진 터라 당연히 뒤에 있을 줄 알고 한 행동이었다.

    “……라울?”

    그런데, 그곳엔 아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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