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깊고 검은 바다
“율니. 율니?”
율리어스의 품에 앉은 라울이 그의 가슴팍을 잡고 연신 흔들어댔다. 정갈하게 잠겨 있던 그의 옷자락이 라울의 오동통한 손가락에 의해 헤집어졌다.
일리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제 이마를 짚었다. 한 번도 저런 적이 없던 아이가 유난스레 율리어스에게만 매달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게 하고 싶었지만 라울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모습에 차마 다그칠 수도 없었다.
차라리 율리어스가 라울에게 한마디라도 한다면 자신이 나설 텐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제 다리 위에 앉아 있는 아이의 머리통을 처음 보는 생명체라도 되는 양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뚜둑, 하는 소리가 마차 내부를 울렸다.
율리어스의 옷깃이 뜯어졌다. 아이가 계속해서 잡아당기고 있던 부분이었다. 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그 부분을 바라봤다.
“……라울.”
“……흐윽. 흐엉.”
“라울!”
뜯어진 옷깃을 꾹 움켜쥔 라울이 입매를 움찔거리다 눈시울이 발개졌다. 눈가에 차오른 눈물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찰랑거렸다.
“네가 뜯어놓고 울어선 안 되지.”
그 말에 라울이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얼굴로 어떻게든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크게 치뜨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리안은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아이의 훈육을 위해 겨우 참았다.
“자, 사과하자.”
“율니. 미안해요.”
“율니가 아니라 공작 전하.”
“미안해요, 공작 저나.”
양손으로 뜯어진 옷깃을 꼭 붙든 라울이 조심스레 그것을 율리어스에게 내밀었다. 아무리 뜯어졌다 하더라도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율리어스는 그런 아이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부딪치자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율리어스였다.
그는 손을 들어 라울의 머리 위에 툭, 제 큰 손을 올려두었다.
“그래.”
단지 그렇게 중얼거린 율리어스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실밥이 튀어나온 목 아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자 눈을 반짝인 것은 라울이었다. 율리어스가 제 사과를 받아줬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아이가 그의 가슴팍에 푹 얼굴을 묻었다. 양팔을 쭉 뻗어 율리어스를 안으려 했지만 팔이 짧아 그저 매달린 게 되었다.
“율니!”
“공작 전하다.”
“집에 가치 가요.”
응?
아이가 간절한 눈으로 율리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눈물을 참느라 나왔던 콧물을 컹, 하고 훌쩍인 것은 덤이었다.
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일리안이었다. 율리어스는 그런 성격이 아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이의 부탁을 거절하는 게 일반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 생각의 바탕에는 율리어스가 당연히 라울의 바람을 거절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는 했다.
“라울. 안 되는 건 안 된,”
“일정을 잡지.”
“예?”
일리안은 자연스럽게 라울의 허리를 잡고 다시 제 품으로 데려오려 했다. 그러나 율리어스의 갑작스러운 일정 이야기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라울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집을 가는 건 힘들지만 따로 시간을 내겠다고 했다.”
“지짜, 진짜?”
“가짜일 리는 없겠지.”
그 말에 살포시 웃은 라울이 다시금 율리어스의 가슴팍에 폭 머리를 묻었다. 양쪽으로 흔들흔들 움직이는 동그란 뒤통수만으로도 충분히 아이가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율리어스… 님. 일정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내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까.”
“아니, 평소엔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애당초 율리어스는 쓸데없는 일에 허투루 시간을 흘리지 않는다. 공작위가 그 정도로 한가한 자리는 아니었으며, 제국에서 제일가는 가문이라는 이름이 그저 전통으로만 얻어낼 수는 없었다.
율리어스가 물끄러미 일리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툭 내뱉었다.
“원래도 당신에게 한해서는 평소와 달랐습니다.”
몰랐다고 할 작정입니까?
그는 외려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그 말에 라울로 인해 잠시 가라앉았던 심장이 널뛰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목덜미부터 천천히 물들듯 붉어지기 시작한 피부색은 덤이었다.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알 때까지 할 예정이니까.”
그러자 일리안의 얼굴이 완전히 불타올랐다. 제 얼굴에 오른 열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일리안이 한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피부색이 원망스러웠다.
조금이나마 진정하기 위해 시야를 가렸을 때였다. 일리안의 목덜미에 차갑게 식은 손가락이 닿아왔다.
화들짝 놀란 일리안이 제 손을 내렸다. 그러자 라울을 한 팔로 안고서 나머지 팔을 일리안의 목덜미에 뻗고 있던 율리어스가 보였다. 그가 손을 뻗어 제 목덜미를 만진 것이다.
그녀가 멈칫거리느라 멀어지자 율리어스는 조용히 제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헤이븐 윈터가 되어서 좋은 점도 있군요.”
그렇게 말하며 그가 짧게 웃었다. 몹시도 희미하고 빠르게 스쳐 지나간 웃음이라 잠시 착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일리안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윈터 저택에 돌아오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디노와 타피아였다. 뒤늦게 소식을 들었는지 자신들을 불렀다면 데리러 갔을 것이라며 성화를 내었다.
“괜찮다니까. 공작 전하께서 데려다주셨어.”
“공작 전하께서요? 그분이 어째서요?”
“……글쎄. 라울이 귀여웠나 보지.”
그 말에 디노가 라울을 번쩍 안아 들었다. 타피아 또한 확실히 그런 이유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라울 님은 공작성에 맡길 필요가 없는 거지요?”
디노의 품에 안긴 라울이 양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슬쩍 그의 가슴을 밀었다. 아무래도 안아준 이가 이번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디노는 아무것도 모르고 헤실 웃으며 라울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둘이 노는 사이 타피아는 일리안에게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라울에겐 들려주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래.”
“헤이븐 님, 정말 너무하셨어요.”
“……어?”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저희와 의논을 하셨어야죠. 다짜고짜 공작성에 라울 님을 맡긴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납치당했다가 구출되셨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에는 정말…….”
에릭이 나름대로 이들에게 잘 말해준 듯했다. 타피아는 입술을 쭉 내밀고 서운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녀 나름대로 가볍게 넘기려 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타피아와 디노는 제 걱정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터다.
부러 제 마음이 무겁지 않도록 토라진 척하는 타피아의 마음이 예뻤다. 일리안은 손을 들어 타피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자 타피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과 키가 비슷한, 자신보다도 어린 이로부터 머리가 쓰다듬어질 줄은 예상도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제 나이가 이제 스물일곱이에요, 헤이븐 님.”
“그래. 아직 젊네.”
아직 어리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일리안은 자신이 벌써 스물일곱이나 되었다고 주장하는 타피아가 귀엽게만 보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아이 취급하실 거예요? 헤이븐 님은 저보다도 어리시면서.”
“음… 글쎄. 타피아와 디노가 마흔이 되면?”
“예? 마흔이라고 하셨습니까? 라, 라울 님! 죄송합니다!”
라울과 놀던 디노가 잠시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다시 아이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라울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하향 곡선을 타는 것 같으면 그는 어쩔 줄 모르는 눈치로 허둥지둥 아이를 달랬다.
타피아는 그런 디노를 웃으며 바라보다 일리안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가끔요, 헤이븐 님.”
“가끔?”
“헤이븐 님이 열두 살이었을 때, 마차 사고를 겪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요.”
소심한 남작 영애였다는 헤이븐 윈터는, 부모와 함께 마차 사고를 겪었지만 홀로 살아남았다. 그것도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고 했다.
일리안은 자연스레 자신의 죽음을 떠올렸다. 새벽이라 그랬는지, 유난히 깊고 짙은 검은 색의 강물로 뛰어들어 미친 듯이 물을 먹다 죽은 기억이 아직도 선연했다.
“그 마차 사고를 겪은 이후로, 헤이븐 님께선 마흔 살쯤 나이를 먹은 사람 같아요.”
움찔거린 일리안이 슬며시 타피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듯 일리안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동방에서는 마흔이라는 나이를 불혹이라고 부른대요.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고 해서요. 헤이븐 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연애 감정도, 부와 권력도, 힘도. 이분께는 무엇도 되지 못하구나 싶은 거죠.”
“…….”
“그래서 걱정이 되었어요. 헤이븐 님은 아직 열일곱 살이시잖아요. 조금 더……. 조금 더 원하는 걸 취하셨으면 좋겠어요.”
눈을 내리깔고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가던 타피아는 말을 마치자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리곤 눈을 접어 활짝 웃었다.
“제가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네요!”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일리안은 타피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러다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조금은 목이 멘 것 같은 발음으로 말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취하길 바라?”
나는 마흔이었고, 그는 스물다섯이었다.
처음 율리어스를 만났을 때엔 그의 나이 고작 아홉 살이었다. 자신은 스물네 살이었고, 제 허리에 겨우 미치는 율리어스가 아직도 기억에 또렷했다.
만약 그를 마흔에 처음 만났더라면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가 다 성장한 후에 만났더라면. 그러나 자신의 가장 첫 기억 속 율리어스는 자신의 목숨조차도 중요한 줄 모르던 고작 꼬마에 불과했다.
내 손으로 직접 구한 아이였다.
라울과는 달랐지만 덜 소중했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자신이 지켜주어야만 할 것 같았던 아이를 어떻게……. 어떻게 성애의 의미로 바라볼 수 있을까.
큰 죄를 저지르는 것만 같았다. 라울을 볼 때마다, 그리고 율리어스를 볼 때마다 그 감정은 반복되었다. 제 손으로 키운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를 마음에 담는 것은, 일리안의 알량한 도덕적 잣대로는 옳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헤이븐 님. 누구도 나무라지 않아요.”
“…….”
“마흔이든, 스물일곱이든, 열일곱이든. 우리는 결국 사람이잖아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고, 바라는 것 하나를 갖겠다는데.”
내가 없으면 죽을 것만 같은 눈을 하던 그 아이를, 나에 한해선 언제나 예외였다는 그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무엇이 되었든 가지세요. 헤이븐 님은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되니까요. 열심히 살아오셨잖아요.”
그의 웃음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율리어스는 언제나 그렇게 웃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표현에 인색했던 일리안 하인리히가 얼굴이 잘 붉어지는 체질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겁이 나서 차마 제 마음 하나 표현하지 못하던 자신이 율리어스와 닿는 것을 쑥스러워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나 좋았던 거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해 왔다.
물러서면 쫓아가고, 몰래 입을 맞추는 것조차 어려워하며, 조그만 표현 하나로도 웃었다. 그녀로서는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율리어스의 깊고 검은 마음속에서 이제야 눈을 떴다. 겨우 그의 진심이 와닿았다.
내가,
그런 너를 가져도 될까.
그에게 닿지 못할 의문이 속내를 갑갑하게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