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두 남자의 화학 반응
“공작성을 나가도 좋다고요?”
“예. 의원으로부터 거동해도 좋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치료가 끝나셨으니, 가문으로 돌아가셔야지요. 다들 걱정하고 계실 겁니다.”
그녀의 아침 식사를 돕던 펜서는 한 손을 허리에 얹고서 빈 잔을 다시금 채웠다. 그가 너무도 여상한 말투로 말해 일리안은 순간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다.
“율리어스가 그렇게 명령했습니까?”
나가도 좋다니. 물론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금방일 줄은 몰랐다. 어젯밤 이후로 율리어스를 보지 못해 이대로 나가기엔 걸리는 게 많기도 했다.
설마 어제 일로 그가 자신을 쫓아내는 것인가, 생각하던 중이었다.
“율리어스 님께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예.”
펜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잘 모르셨겠지만 헤이븐 님의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예? 일어나자마자 바로 움직였는데…….”
“그야, 율리어스 님의 마나를 받으신 덕분이지요.”
포크를 잡고 있던 손이 움찔했다. 율리어스에게선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던 이야기였다.
물론 처음 눈을 떴을 때에는 온몸에서 고통이 밀려와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동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 몸 상태에 대해 묻기도 전에 신관과 의원들이 들이닥쳐 치료를 해준 터라 별생각 없이 지나치기도 했다.
그런데 율리어스의 마나를 받을 정도로 위급했다니.
마나는 생명과 직결된다. 괜히 마나를 다른 말로 생명의 샘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마나를 다른 이에게 보내줄 정도로 멍청한 마법사가 있다는 이야긴 들어본 바가 없었다.
“자칫하면 목소리를 잃을 뻔하셨습니다. 목뼈가 보일 정도로 베였으니까요. 그런데 상처가 그뿐이었겠습니까. 머리를 집중적으로 맞으셨는지 온 얼굴이 부은 것은 물론이고, 헤이븐 님이 정신을 잃으셨을 때 눈두덩을 들어 올린 의원이 뇌를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했었습니다.”
“제가… 그 정도로 위험했단 말입니까?”
“예, 수도에 있는 유명한 신관과 의사들이 모였지만 그래도 모든 상처를 없던 일로 돌릴 수는 없었지요. 한 신관은 헤이븐 님이 일어났을 때 어딘가 잘못되어 있을 수도 있다더군요.”
더듬더듬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옅은 흉터가 있다는 것이 손끝을 따라 느껴지기는 했지만 베였던 것이 남 일 같을 정도로 희미했다.
거기다 일어났을 때만 여기저기에 붕대를 둘렀을 뿐, 하루 만에 거의 모든 붕대를 풀었다. 물론 치료사들은 그녀에게 아직 좀 더 감아야 한다고 말해오기는 했지만 일리안이 거추장스럽다며 그것을 거절했다.
붕대를 거절할 때만 해도 그들이 고작 이런 상처에 왜 이렇게도 극성으로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펜서의 말을 듣고서야 그들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점차 생각나기 시작했다.
“율리어스 님께선 마나가 필요하다는 신관의 말에 곧장 자신의 팔을 베었습니다.”
“…….”
“이 늙은이 심장이 얼마나 철렁했는지요. 이번엔 다행히 헤이븐 님께 마나를 주기 위해 그은 것이긴 했지만.”
“부족하면 내 팔을 잘라라.”
이미 깊게 베여 넘치도록 피가 흐르는 팔을 두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율리어스가 잠든 일리안의 입가에 팔을 가져다 대었지만 정신을 잃은 일리안이 그것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먹을 리는 만무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은 모두 그녀의 입으로 들어간 것보다 입 주변으로 흘리는 게 더 많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입을 맞춰서 먹여주는 게 나을 것 같다고.
그러나 율리어스는 그녀에게 입 맞추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일리안의 턱을 받쳐 들고, 흘러넘치는 제 피를 가끔 손가락으로 떠올려 주며 그녀가 삼키도록 도왔다.
직접 피를 먹여 마나를 넘겨주는 것은 아주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본인이 원한다면 손만 맞잡아도 마나를 넘겨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전해지는 양보다 흐르는 게 더 많았다. 때문에 율리어스는 고민도 하지 않고 제 팔을 벤 것이다.
“하지만, 아시지요? 율리어스 님의 신체는 물론 마나도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요. 때문에 혹여나 헤이븐 님의 몸에서 받아들이지 못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리어스 님이 나가지 말라고 하신 건 그런 이유에섭니다.”
단순히 자신을 일리안 하인리히라고 확신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에 그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치기 어린 감정으로 묶어두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고.
“헤이븐 님께서도 조금쯤 눈치채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율리어스 님은 단 한 번도, 헤이븐 님을 가볍게 대하신 적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펜서는 사라에게 잠시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홀로 남은 일리안이 묵묵히 제 앞에 있는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제 앞에 있는 이는 고작 아홉 살이던 어린아이라고,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꼬마에 불과하다고 늘 되뇌었다.
그것은 자신이 감히 그의 마음을 마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아무리 자신이 열일곱 살 헤이븐 윈터라고 보일지라도, 적어도 자신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율리어스가 제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뭇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 따위처럼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한 감정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은 그의 마음을 외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손으로 직접 구한, 라울만큼이나 그 의미가 특별한 아이를 어떻게 자신이 다가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 핑계를 만들어야만 했다. 자신이 괜한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마흔이라는 나이가 부끄럽지 않도록.
“그런데 왜 이런 마음이 들게 해.”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를 가려 버렸다. 자신이 부담스러울까 한마디도 하지 않은 그의 마음이 사랑스러웠다. 당황스러운 감정이었다.
어쩌면, 율리어스는 제 생각처럼 어리지만은 않을지도 몰랐다.
* * *
라울의 손을 맞잡은 일리안은 공작성의 활짝 열린 철문을 밟고 밖으로 나갔다.
갑작스러운 귀환이라 윈터 가문의 사람들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차 1대는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꼼꼼한 성격의 가이우스가 그녀와 라울을 배려해 준비해 둔 게 분명했다.
“라울, 재미있었어?”
라울이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흥분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윈터 저택도 넓기는 했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주택에 비한 것이었고, 이곳은 무려 공작성이었다.
아이에겐 모험심을 유발시키는 장소인 모양이었다. 제 앞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이곳저곳을 쏘다니기 바빴던 것을 보면.
아이가 자신을 닮아 돌아다니기를 즐기나 싶어 웃은 일리안이 거칠게 라울의 머리를 헝클였다.
여덟 마리의 말이 서 있는 마차는 리하르트 가문의 문양이 붙은 것답게 몹시도 웅장했다. 마차로 올라서는 계단의 턱이 제법 높아 일리안은 라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라울, 마차 문 좀 열어보자.”
라울을 안고 있는 덕에 일리안은 마차를 열 수가 없었다. 대신 라울이 문을 열자 일리안이 재빨리 아이를 마차에 올려 보냈다.
“아?”
“응? 라울. 무슨 일이야. ……아?”
뒤따라 마차를 오르던 일리안은 웬일로 라울이 낸 소리에 아이를 바라보다 마차 내부로 고개를 돌렸다. 라울은 오동통한 검지 하나를 들어 마차 안을 가리키고 있는 채였다.
“율니.”
“……라울, 율리가 아니라 공작 전하.”
“공작 저나.”
마차의 내부는 상대적으로 넓은 편에 속했지만 율리어스가 앉아 있자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그의 긴 다리가 마차 한쪽을 꽉 채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쩐… 일이십니까?”
“도망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렴, 저는 쫓아가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도망이 아니라,”
일리안은 제 볼을 긁적였다. 그러나 말을 잇지는 않고서 라울을 자리에 앉혔다. 마차가 곧 출발한다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흔들린 탓이었다.
라울을 율리어스의 앞에 앉히고서 그녀는 아이의 옆에 앉았다.
“제가 언제 도망간다고 했습니까? 돌아가라고 하신 게 누구인데요.”
“평생 있어줄 것도 아니잖습니까.”
툭 내뱉은 율리어스는 관심 없다는 듯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 모습이 어딘지 토라진 것 같다고 느껴지다니, 일리안은 제 눈이 잘못되었나 싶어 눈을 끔뻑였다.
“……쫓아오는 사람 안 같습니다.”
“당신의 눈에 착한 아이인 척하는 건 관두기로 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구는지는 이미 볼 만큼 본 것 아닙니까.”
일리안은 헤이븐 윈터의 몸으로 들어오고도 종종 이전 생에서의 율리어스를 떠올리곤 했다. 사실, 그녀의 앞에서 그는 ‘조금 차갑지만 다정한 아이’였다.
무엇이든 좋은 게 생기면 무턱대고 자신에게 가져오고, 비록 웃지는 않아도 올곧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아이를 두고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처음 헤이븐 윈터로서 율리어스를 만났을 때에는 당황스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 다정하기는커녕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율리어스가 자신에게 얼마나 살랑살랑 굴었는지는 이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더 해보았자 애새끼 이상으로는 보지도 않을 것 같고.”
심장이 푹 찔렸다.
오늘 아침 식사를 하며 펜서와 이야기를 나누다 들었던 생각을 그가 듣기라도 한 것 같았다. 사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아직은 불편할 정도로 신경 쓰고 있던 생각이기도 했다.
그 순간, 내내 창밖만 바라보던 율리어스가 일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럴 바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이 너무도 직설적이라 귓가가 붉어졌다. 내용 자체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쑥스러웠다. 일리안은 라울의 양쪽 귀를 만져주는 척하며 슬쩍 아이가 듣지 못하게끔 막았다.
“헤입븐.”
제 귀에 손을 올리자 토끼처럼 움찔거린 라울이 일리안을 바라봤다. 왜인지 울상인 아이가 입술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곧 라울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요령 있게 아이의 상태를 눈치 차린 일리안이 다정하게 볼을 매만졌다.
“라울. 화장실이 가고 싶어?”
손가락을 꼼질 거린 라울은 조그맣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입은 꾹 다문 것이 답답할 법도 했지만 일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면? 배가 고픈가?”
그러자 이번엔 라울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이번엔 조금 더 고민하던 일리안이 멀미가 나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불쑥 그녀와 라울 사이에 끼어든 커다란 손이 아이의 몸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되었나.”
쑥 공중으로 치솟았던 라울은 사뿐히 율리어스의 다리 위에 착지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멍때리던 라울이 활짝 웃었다.
“응!”
제 뒤에 있던 이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라울이 방긋 웃자 율리어스는 아이의 머리통을 잡고 도로 원위치시켰다. 아직 목이 짧은 라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기엔 제법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모습을 다소 어이없는 눈으로 지켜보던 일리안이 물었다.
“……뭐가 된 겁니까?”
“다리가 겹쳤어요!”
“마차가 좁습니다.”
율리어스의 다리 위에 앉아 있던 라울이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율리어스도 한 손을 아이의 배에 둘러 흔들리는 마차에 라울이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해왔다.
아무래도 율리어스의 다리가 길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라울이 내내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라울이 왜 자신이 물을 때는 말하지 않았는지, 율리어스는 대체 어떻게 그것을 눈치챘는지 알 수 없던 일리안은 눈썹을 구겼다.
“이렇게 앉으면, 그 짧은 목을 그만 돌릴 생각인가.”
그사이 라울은 평소답지 않게 자꾸만 율리어스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댔다. 평소의 그 조용하고 낯가리는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모습이었다.
율리어스는 그런 라울을 다시 번쩍 들어 이번엔 마주 보도록 고쳐 안았다. 그의 너른 품 안에 안긴 라울이 슬며시 그에게 기대었다.
“율니.”
“공작 전하라고 했을 텐데.”
“우리 같이 가요!”
허엉, 떨어지기 싫어요…….
그날, 라울이 무언가 조르는 모습을 처음 본 일리안은 질투심에 배가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