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그러지 마요
에릭은 허탈한 얼굴로 공작성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기는 했지만, 따라갈 수는 없었다. 에릭은 그녀가 잡아주기를 바랐겠지만.
라울과 함께 하루를 보낸 일리안은 저녁 식사 후 율리어스의 침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제 방을 마련해 줄 수 있느냐고 펜서에게 물었지만 그는 곤란한 얼굴로 웃으며 살포시 고개를 저어왔다. 가타부타 변명을 덧붙이지 않는 게 율리어스의 명령을 듣고 움직이는 것이 분명했다.
라울은 펜서의 손을 잡고 아이용 침실로 떠났고, 남은 것은 일리안 혼자였다. 일리안은 제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아 율리어스를 기다렸다.
“이게 무슨……. 일리안, 아홉 살 꼬맹이라고. 정신 차려.”
제 자신에게 세뇌를 걸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율리어스의 품에 안겨 잤던 사실을 기억하면 제멋대로 얼굴이 붉어졌다. 창문에 비친 제 꼴을 본 일리안이 마른세수를 했다.
기실, 율리어스와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단지 그때의 율리어스는 고작 아홉 살에 불과했을 뿐이다. 자신은 무려 스물네 살이었고.
“율리어스?”
“일리안. 같이 자고 싶어요.”
“뭐야, 무섭기라도 한 거냐? 안 그렇게 생겨서는.”
제 집에 숨었던 율리어스는 그 뒤로도 며칠을 일리안의 집에서 머물렀다. 넓지 않은 단칸방에서 아이에겐 침대를 주고 자신은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물론 그것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돈이 되는 의뢰라면 무엇이든 하던 때라 밤마다 나가기 일쑤인 탓에 율리어스는 빈집을 홀로 지킬 때가 많았다.
일리안은 그날도 담배 하나를 입에 문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의뢰 때문은 아니었고, 아이가 있으니 밖에서 한 대 피우고 올 생각이었다. 생각을 바꾼 것은 율리어스가 옷깃을 붙잡은 탓이었다.
“누워 있어라. 옷만 갈아입고 갈 테니까.”
베개를 꼭 껴안고 다가왔던 율리어스는 그녀가 나가지 않는다는 말에 답지 않게 입을 조금 벌렸다. 눈동자로 희미한 행복이 떠오르기에 미소라도 지으려나 싶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대신 화장실로 들어가는 일리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짧은 머리를 타월로 탈탈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아이라면 졸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늦은 시각이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어 다시 일리안을 바라보는 게, 졸린 기색은 아니었다.
“……안 잤냐?”
“같이 자기로 했잖아요.”
“그건 그런데……. 그래, 일단 누워라.”
별생각 없이 침대 아래에 마른 수건 하나를 돌돌 말아 내려뒀다. 짐이 얼마 없던 일리안은 덮을 이불조차도 하나뿐이었고, 그것은 이미 율리어스에게 줘버린 지 오래였다.
때문에 수건 몇 장을 겹쳐 베개를 만들고 두꺼운 겉옷이나 덮고 자는 게 요즘의 일상이었다. 오늘도 그럴 심산으로 잘 준비를 할 때였다.
“일리안.”
“왜?”
“여기서, 같이 자요.”
바닥에 앉아 있던 일리안은 침대에 앉아 제 옆을 가리키는 율리어스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침대는 전 집주인이 쓰던 가구였다. 고작 단칸방이었으니 당연히 침대는 혼자서도 겨우 잘 만한 비좁은 크기였고, 키가 제법 큰 일리안이 누우면 꽉 들어찼다.
같이 자기엔 불편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리안이 되었다며 대충 손을 휘젓고 벌렁 드러누우려던 순간이었다.
“……너 뭐 하냐?”
양반다리를 하고 있던 일리안은 어이없는 얼굴로 제 다리 사이에 곱게 앉아 있는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침대에 앉아 있던 아이는 쪼르르 내려와 일리안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 일리안을 마주했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아이가 강아지처럼 올려다보자 무엇이든 다 들어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커다란 눈을 바라보던 일리안은 결국 손을 들어 텁, 아이의 눈을 덮었다. 대신 아이의 몸을 껴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 내가 졌다. ……그래도 말이다, 같이 자면 좁을 텐데.”
“좁아도 괜찮아요. 제가 바깥에서 자겠습니다.”
“되었어, 인마.”
비좁은 침대에 둘이나 눕게 되자 자칫하다간 바깥에 눕는 이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율리어스가 자신이 바깥에 눕겠다고 하자 일리안은 아이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이렇게 자면 되지.”
아이의 몸을 다시 들어 올렸다. 피죽도 못 먹은 아이처럼 가벼운 무게에 일리안은 순간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아이라지만 남자아이였고, 이렇게 가벼운 건 이상한데.
그러나 내색은 않고서 율리어스를 껴안았다. 이윽고 아이의 몸을 잡아당겨 침대에 누웠다.
순식간에 일리안의 품속에 안긴 채 침대에 눕게 된 율리어스는 천장을 향해 눈을 끔뻑이다 귓가를 붉혔다.
“불을 안 껐네.”
율리어스와 함께 침대에 누웠던 일리안이 중얼거리며 다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일리안을 한번 힐끗 본 율리어스가 조명에 시선을 주었다.
팟, 짧은 소음과 함께 사위가 어두워졌다.
“뭐야. 고장인가?”
“…….”
“마침 잘됐네.”
몸을 일으키던 일리안은 도로 자리에 누웠다. 반쯤 빠졌던 일리안의 팔이 다시 율리어스의 몸을 둘러 안았다. 방 안이 어두워 일리안에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분명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 자라, 유리.”
* * *
“……도망가고 싶다.”
이렇게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율리어스를 마주하느니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힐끗 고개를 돌리자 자신이 늘 벽을 타고 올라왔던 발코니가 보였다.
“도망가고 싶다고 했습니까.”
“율리어스… 님. 언제 왔습니까?”
언제부터였는지 방 안에 서 있던 율리어스는 성큼 걸어와 일리안의 앞에 섰다. 그가 시선으로 일리안을 옭아매듯 내려다보았다. 차마 그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그녀는 고개를 모로 돌렸다.
“또 도망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냥, 해본 말입니다. 도망간다는 게 아니라…….”
율리어스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하필이면 자신이 중얼거린 말이 도망이었는지 깊게 후회했다. 이유는 몰라도 그가 자신이 도망간다는 말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일리안.”
“…….”
“아, 그렇군요. 헤이븐 윈터.”
“예.”
일리안은 제 머리 위로 픽, 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곳엔 조금도 웃지 않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율리어스가 있었다.
“발목을 꺾으면 싫어하겠지. 평생 공작성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하면, 당신은 말라 죽을 겁니다.”
“……그,”
“그런데, 헤이븐. 나는 점점 더 조급해지고 있어요.”
그의 눈동자에 긴 속눈썹 그림자가 드리웠다. 율리어스는 분명히 두려운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가련해 보였다. 외려 자신이 몹시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부디 내 손으로 내 목을 조르게 하지는 마세요.”
머리카락 위로 차가운 손가락이 올라왔다. 그러나 희미하게 떨고 있는 그 손은 일리안의 머리카락조차 쉽사리 잡지 못하고 간신히 몇 가닥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래서였다. 일리안은 그의 이런 모순적인 태도 때문에 그가 무섭지 않았다.
늘 그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 같지만 율리어스는 한 번도 제멋대로 군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일리안에게 만큼은.
“당장은 아니어도 좋습니다. 기다리는 건 늘 내 몫이었으니까.”
“정말 괜찮습니까. 내가 평생이 가도록 헤이븐 윈터라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이었다. 손을 떨어가며 제 머리카락 하나조차 멋대로 잡지 못하는 주제에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딜 수 있는 건지.
평생 동안, 내 숨이 다하는 날까지 네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겠다면.
일리안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때문에 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그러지 마요.”
“…….”
“……그렇게 말하지 말란 말입니다.”
율리어스가 그녀의 양어깨를 우악스레 붙잡았다. 손등에 핏줄이 서도록 꽉 붙잡은 율리어스는 핏발 선 눈으로 일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기나긴 침묵을 가르고 율리어스가 입을 열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당신이 진짜 헤이븐 윈터가 되어 있을까 봐. 아니면 사실 내가 미쳐 버려서 멋대로 당신을 일리안으로 생각하는 걸까 봐.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머릿속을 갉아먹는 벌레가 속삭여. 사실 당신은 이미 날 혼자 두고 죽어버렸다고.”
“율리어스…….”
“헤이븐, 말해봐요. 기뻐하지 말까요. 이렇게 조금씩 미쳐가다 결국 스스로 내 목을 조르는 게 옳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율리어스가 이렇게 매달리듯 굴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어깨에 올라간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버티던 일리안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악력에 윽, 하고 짧게 신음 소리를 내었다. 이마가 찌푸려지자 마침내 율리어스가 손을 떼었다.
“그래요, 잊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늘 도망가기 바빴고, 쫓아가는 것은 나였는데. 오늘도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봅니다.”
조금 전 갈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율리어스는 오간 데 없었다. 대신 공허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제가 지쳐서.”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율리어스가 몸을 돌렸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침실 밖을 향했지만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오늘 에릭이 공작성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인 이유일까.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감정이 일리안의 가슴속을 괴롭혔다.
탁, 하고 침실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일리안은 무거운 정적을 감당해야만 했다.
자꾸만 율리어스의 공허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그런 얼굴을 한 것은 처음이라, 조금은 충격적이기도 했다.
말재주가 나쁘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율리어스를 달래기 위해 어떻게든 입을 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도로 다물어야 했다. 무슨 말을 어떤 식으로 꺼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일리안이 제 이마를 붙잡은 채 괴로워하고 있자 다시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여나 율리어스가 돌아온 것인가 싶어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들어온 이는 안타깝게도 집사장 펜서였다.
“주무실 준비를 해도 되겠습니까, 헤이븐 님?”
“……예, 펜서 집사장님. 감사드립니다.”
교양 있게 고개를 숙인 펜서는 넓은 침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를 확인했다. 시종들이 이미 해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그를 바라보다 일리안도 결국 영 끌리진 않는 얼굴로 침대에 누워야만 했다. 율리어스가 없는 그의 침실에서 자는 것이 쓸쓸했다.
일리안이 잘 준비를 마친 것 같자 들어온 문 옆에 서 있던 펜서가 고개를 숙이고 말해왔다.
“소등하겠습니다.”
“저, 펜서 집사장님.”
“헤이븐 님, 말은 편하게 하셔도 좋습니다.”
“……아니요, 저는 이편이 더 편합니다.”
그녀의 거부에 펜서는 눈을 내리깔 뿐 지적하진 않았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일리안이 입을 열었다.
“율리어스는……. 율리어스 님은 안 주무십니까?”
“집무실로 가셨습니다. 오늘 밤은 남은 일을 처리하신다는군요.”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을 제대로 자지 않는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잘 수 있을 때에 자두는 게 좋을 텐데.
펜서는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헤이븐 님, 모든 게 부질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어떻게…….”
“오늘 정원에서 우연히 들었습니다. 곧 칠순이 되어가는 노인이 한 마디 올려도 괜찮을까요?”
달칵. 침실의 불이 꺼졌다. 방안을 가득 채운 어둠 사이로 펜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끔은 부질없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