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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65화 (65/123)

65. 부질없는 것

홀로 침실에 남은 일리안은 눈썹을 찌푸렸다. 침실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 율리어스가 집무를 하러 나간 뒤였다.

“……일리안 하인리히의 말만 듣는다니.”

후작의 발길질에 정신을 잃어 대체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고작 후작에게 자신이 일리안 하인리히라 알렸던 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율리어스는 없었는데.

제가 한 말을 들은 건가? 그렇다고 해서 함께 돌아왔다는 가이우스와 에릭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자신이 일리안 하인리히라고 주장했었다고 하면 미쳤냐고 물을지도 몰랐다.

어깨에 이불을 두른 채 고민하고 있던 일리안의 귓가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도도,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라울이 침대 머리맡에 달라붙었다.

“라울?”

입을 꾹 다문 라울은 올망졸망한 눈으로 일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라울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쑥 넣어 안아 올렸다. 그러자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밥은. 먹었어?”

라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리안은 그 모습이 귀여워 부드러운 금색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도 모르게 다시 생각은 율리어스를 향해 흘러갔다. 그가 자신을 자꾸만 일리안 하인리히라고 주장해 온다면 인정하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아니, 아니었다.

율리어스는 그녀에게 몹시도 매달리고 있었다. 그런 이에게 어정쩡한 책임감을 세운 채 섣불리 다가가는 것은 옳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완전히 뒤바뀐 공작성 사람들의 태도만 보아도 그랬다. 물론 단순히 열두 살 헤이븐 윈터일 때도 그녀에게 충분히 잘해주긴 했었지만 이제는 국빈을 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력이 적은 공작성에서 열이 넘는 시종들이 그녀에게 붙었다. 주방장 사라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만들어댔고, 펜서는 안 그런 척하지만 율리어스보다도 자신에게 더 힘을 들이고 있었다.

모든 일의 뒤에는 율리어스의 명령이 있었겠지.

자신이 진짜 일리안 하인리히였던 시절에도 받아본 적 없는 대우를 받자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헤입븐.”

“……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일리안은 황급히 제 품에 안긴 아이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제게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라울이 입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였다.

“이런, 라울. 토라졌어?”

“……응.”

“풀어줘야겠네. 둘이서 밖이라도 나가볼까?”

“응!”

곰살맞게 웃는 라울에 마주 미소 지은 일리안은 아이를 침대에 내려뒀다. 이미 외출복 차림인 라울은 두고 자신이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스르르 다가왔다. 그녀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옷과 외투를 챙겨온 그들은 하나둘씩 치장을 도왔다.

이런 점이 부담스럽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뭘 하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던 시절이 좋았다.

그러나 일리안은 내색하지 않고 그들의 시중을 받았다. 옷들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율리어스가 입는 것들처럼 값비싸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라울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가자 싸늘한 바람이 불어댔다.

“이건 시클라멘. 겨울에만 피는 꽃이지.”

“……와아.”

“온통 붉은 시클라멘 투성이네. 프레딕은 안 그런 척하면서 분홍색, 붉은색에 환장한다니까. 라울, 이거 보여? 곧 겨울이 지나면 여기서 꽃이 피는 거다.”

라울은 맑은 콧물을 흘리면서도 신이 나 정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몇 년간 분재 사업을 하느라 꽃 상식이 넓어진 일리안의 설명을 들으면서 구경하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일리안도 프레딕이 홀로 조금씩 정리해 둔 정원을 돌아보았다. 이건 꽤 비싼 건데. 오, 저건 번식하게 조금 나누어 달라고 해볼까, 하는 사업가적인 생각이 전부긴 했지만.

그러다 저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이븐!”

“……누가 날 부른 것 같은데.”

주변을 살피자 쇠창살로 막혀 있는 공작성의 출입구가 보였다. 걸어 다니다 보니 어느새 이곳까지 와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분명 출입구 너머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쇠창살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라울에게 잠시만 이곳에 있으라 한 일리안이 그곳에 다가갔다.

“에릭?”

“헤이븐, 돌아가자.”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보세요!”

경비병이 그를 철문에서 떨어트리기 위해 무서운 얼굴로 일갈했다. 아무래도 에릭이 이곳에서 매달려 있던 게 잠시간은 아닌 것 같았다.

일리안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려는 경비병을 말렸다. 좋은 말로 설득하려는 심산이었다.

“저, 이 사람은 제가 아는 분입니다. 정 걱정되신다면 여기서 대화만 할 테니…….”

“헤이븐 님의 아는 분이셨습니까? 실례했습니다. 이봐, 여기 문 열도록 해!”

입을 연 채로 멍하니 경비병을 바라봤다. 한 마디만 내뱉었을 뿐인데 경비병은 대단히 잘못한 것처럼 허리를 굽히고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곧 커다란 철문이 묵직한 소음과 함께 양방향으로 열렸다. 창살에 매달려 있던 에릭은 손을 탁탁 털며 안으로 들어왔다.

결국 일이 잘 풀리긴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이것도 율리어스가 자신을 일리안 하인리히라고 확신해서 일어난 일인가.

“헤이븐,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너 여기서 무슨 일을 벌인 거냐?”

“……내가 뭘.”

“저 사람 좀 봐라. 허리가 굽다 못해 반으로 접혔는데.”

그 말이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에릭은 그녀에게 몸을 바싹 붙여 귓가에 속닥였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일리안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튼,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그래.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 타피아와 디노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 내가 공작성에서 치료 중이라고 해뒀다.”

그녀가 치료 중이라는 말에 디노와 타피아가 양쪽에 매달려 얼마나 다쳤냐는 질문을 던져댄 게 수십 번이었다. 둘의 극성을 내내 들어야 했던 에릭은 잠시 생각났는지 얼굴을 구겼다.

아무튼, 타피아와 디노를 대표해 그녀를 데려오기로 한 참이었다. 말을 마친 에릭은 당장 이곳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헤이븐? 안 가?”

“그게,”

“그게 뭐가 되었든 일단 가자. 나 잔소리 그만 듣고 싶다.”

그녀가 따라오지 않자 에릭은 일리안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그것을 당기며 걸음을 옮기려다 어쩐지 움직이지 않는 일리안에 다시 뒤를 돌아봐야만 했다.

일리안이 제 볼을 긁적이고 있었다.

“왜 그래?”

“지금은 못 가는데.”

“……뭐? 어째서. 디노와 타피아가 기다리고 있다니까.”

어딘지 에릭이 성급해 보였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나가지 않으면 버럭 화라도 낼 것 같았다. 늘 무뚝뚝하기만 했던 에릭답지 않았다.

“율리어스가 아직이라고 했어.”

“아직? 하, 헤이븐. 그 사람이 아직이라고 한 게 왜? 아니, 것보다 언제부터 율리어스라고 부른 거냐.”

에릭은 화를 참고 있는 듯 이를 사려 물고 말했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치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디노와 타피아 핑계를 대며 율리어스 몰래 헤이븐을 어떻게든 윈터 저택에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동굴에서의 일 뒤로 자꾸만 그녀를 품에 안고 있던 율리어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더군다나 동굴에서 돌아온 뒤로 자신은 헤이븐을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모두 율리어스가 막은 탓이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굴었다. 이러다간 헤이븐의 곁에 다시는 설 수 없을 것 같아서. 겨우 만난 헤이븐이 제 생각보다 안색이 좋아서, 불안감이 높아졌다.

“에릭, 전에도 말한 적이 있을 텐데. 넌 내 호위지, 감시꾼 역할이 아니라고.”

“나는……!”

“곧 돌아갈 거야. 타피아와 디노에겐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일리안은 에릭을 안심시키려는 듯 그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에릭은 찌푸린 얼굴을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돌아간단 거지.”

허리가 당겨짐과 동시에 등 뒤로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낮은 목소리는 율리어스의 것이었다. 뒤에서 다가온 그가 일리안을 당겨 제 품 안에 가두었다.

일리안의 뒤에 선 율리어스는 그녀를 안은 채 앞에 있는 에릭을 바라보았다.

“……헤이븐은 윈터 저택에서 마저 치료를 받을 겁니다. 그렇게 아십시오.”

에릭이 당장이라도 율리어스로부터 일리안을 떨어트리기 위해 그녀의 비어 있는 손목을 잡아챘다. 일리안의 손목에 차갑게 식어버린 체온이 닿아왔다.

율리어스는 눈동자만 움직여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했다. 일리안은 미묘한 정적이 감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에릭의 손을 털어내고 제 허리에 두른 율리어스의 손을 붙잡으며 외쳤다.

“율리어스!”

“…….”

“……그만두시죠. 에릭은 기사지 않습니까.”

그를 오래 알아온 일리안은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방금 전 율리어스는 에릭의 손목을 없애 버리려 했다. 자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게 하려 했다는 뜻이었다.

동굴에서 사라졌던 이들처럼.

“에릭과 따로 이야기하고 오겠습니다. ……놓아주시죠.”

“가지 마요.”

율리어스는 에릭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머리를 조금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귓속으로 곧장 흘러 들어갔다.

“도망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직, 안 갈 겁니다……. 잠깐 이야기만, 하고 오겠다는!”

일리안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분명, 귀가 물린 것 같았는데? 그러나 율리어스는 이미 그녀의 허리를 놓아준 지 오래였다.

뒤늦게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른 일리안이 허둥지둥 에릭의 소매를 붙잡고 자리를 움직였다. 에릭은 주먹을 꽉 쥔 채 율리어스를 바라보다 그녀를 따라갔다.

코너를 돌아 율리어스가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한 일리안은 붙잡았던 에릭의 소매를 놓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릭이었다.

“너, 뭐야.”

“뭐?”

“저 자식이 왜……! 왜 그렇게 가깝게 구느냐고.”

에릭은 그녀를 당장이라도 뺏길 것 같았다. 조바심 탓인지, 방금 본 장면으로 인해 화가 났는지 심장이 거세게 뛰어댔다. 에릭은 제 심장 부근을 움켜쥐고 그녀를 마주했다.

“에릭, 내가 예전에 물었었지. 나를 좋아하느냐고.”

“……그건 왜?”

“좋아하지 말라고도 했었다. 그건 아직도 유효해.”

“좋아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해?!”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결국 말꼬리에 이르러서 언성이 높아졌다. 에릭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열다섯 살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게 열다섯이었고, 스물이 된 지금까지 5년간 홀로 좋아했다. 그런 제 감정이 부정당하자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열다섯이야. 처음 널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5년 동안 좋아했어. 받아달라고 했냐? 나와 연애 놀음이라도 하자고 했어? 내가 혼자 좋아하겠다고, 내 감정,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감정이 북에 바친 에릭이 악을 쓰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떨렸다.

그런 에릭을 담담히 바라보던 일리안은 그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어느 정도 호흡이 가라앉자 겨우 입을 열었다.

“에릭, 나는 네 감정을 받아줄 수 없어.”

“……어째서?”

“내 눈엔 모두 스쳐 갈 것들로 보이니까.”

에릭은 어렸고, 세상에 있는 숱한 사람들을 겪어보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을 좋아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나이대의 아이라면 주변에 있는 어른스러운 사람을 좋아할 법도 하니까.

감정도, 관계도, 그리고 죽음조차도. 그것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일리안은 모르지 않았다. 모두 지나갈 것들임을 알면서도 에릭의 감정에 헛된 기대를 불어 넣어줄 수는 없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럼, 공작 전하. 그 사람은?”

“율리어스는,”

그를 떠올리자 불편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율리어스는, 자신이 구했던 그 아이는.

“……다르니까.”

에릭, 나는 그 녀석을 내버려 둘 수 없어.

일리안은 언제나 율리어스의 앞에만 서면 한없이 약해졌다. 그의 간절한 눈빛을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일리안은 그러지 못했다.

무언가 깨달을 것 같았다. 일리안은 그것을 애써 무시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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