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네 말은 안 들어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것은 일리안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그녀가 이다지도 긴장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던 일리안은 침대 위에 놓인 이불을 좀 더 끌어당겼다.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제 귀부터 목까지 붉게 달아올랐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헤이븐 윈터의 피부가 하필이면 몹시도 희어 붉어지는 것이 눈에 띈다는 점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가까워지던 발걸음 소리가 멈추었다. 인기척이 침대 바로 옆에서 느껴진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던 일리안은 무릎을 덮은 이불에 코를 박듯 고개를 숙였다.
“일리안.”
“…….”
“헤이븐이라 부르면 대답하실 겁니까.”
일리안은 그 말에 결국 고개를 제 옆으로 돌렸다. 무어라 말하려던 일리안은 하려던 말조차 잊을 정도로 놀랐다.
그가 너무도 가까웠다.
오늘 하루만 몇 번째 그의 얼굴을 지척에서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주 본다고 해서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얼굴이 붉습니다. 부끄러우신 겁니까.”
“그건……!”
“헤이븐 윈터의 피부가 희어서 쉽사리 붉어지나 봅니다.”
제가 속으로 생각했던 변명을 그대로 내뱉는 율리어스에 입을 벌렸다. 아니, 다시 표정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이래서야 제가 일리안 하인리히라고 대놓고 말하는 꼴이 아닌가.
아직 머리가 조금 젖은 율리어스는 수면용 하의와 함께 목욕 가운을 입은 채였다. 벌려진 가운 사이로 그의 탄탄한 가슴팍이 은근히 보였다. 일리안은 그곳에 계속 눈을 둘 수 없어 다시 앞을 바라봐야만 했다.
비록 호위로서긴 했지만 율리어스와 한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도 적지 않았고, 때문에 그의 벗은 몸을 보는 것도 처음은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그녀의 사정은 모르는 척 침대 위로 올라섰다. 그의 무게 탓에 푹신한 침대가 출렁였다.
“머… 리! 머리를 말려야 감기에 안 걸리죠.”
그가 올라옴과 동시에 일리안이 도망치듯 침대에서 내려갔다. 율리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가 하는 짓을 살펴볼 뿐이었다. 도망쳐 봤자 제 손아귀 안이라는 것을 아는 걸지도 몰랐다.
구비된 타월 하나를 챙겨온 일리안은 머뭇거리면서도 율리어스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발을 내려둔 채 앉아 있던 그는 일리안을 힐끗 보고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드러운 촉감의 타월이 율리어스의 검은 머리칼 위로 살포시 얹어졌다. 일리안은 침대에 앉아 율리어스의 뒤에서 느릿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는 제법 능숙하게 머리를 말려갔다.
이것 다음엔 어떻게 시간을 벌까.
율리어스의 뒤에서 머리카락을 조물거리며 필사적으로 방법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그와 함께 침대에서 자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최대한 천천히 말리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율리어스의 길지 않은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말랐다. 마를 대로 마른 그의 머리카락에서 그녀가 조심스럽게 수건을 떼어냈을 때였다.
율리어스가 손목을 움켜쥐어 왔다.
“끝났군요.”
“아니, 그게, 머리를 한번 빗…….”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손목을 움켜쥔 율리어스가 순식간에 그녀를 이불 속으로 끌고 간 덕분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이불 속에서, 율리어스의 품 안에 갇힌 일리안은 눈을 끔뻑거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이상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뛰고 있었다.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않습니까. 눈 감으세요.”
일리안의 목 너머로 팔을 두르고 있던 율리어스는 나직이 말하며 그녀의 뒷머리로 손을 올렸다. 큼지막한 손이 일리안의 작은 머리통 전체를 덮고서 느릿하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타월로 율리어스의 머리를 매만질 때보다도 더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몸이 뻣뻣이 굳었다. 심장은 거세게 뛰는 데다 몹시도 긴장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일리안은 굳은 얼굴로 율리어스의 가운 속 가슴팍을 마주해야만 했다.
자신은 지금 열다섯 살이나 어린아이의 품에 안겨 있다. 업어주고 안아서 키웠던 그 아이다…….
그렇게 몇 번이고 자신에게 다잡았지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태연한 척, 심드렁하게 구는 것이 제 특기였으니 이번에도 원만히 발휘되면 좋으련만 제 심장은 그래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일리안은 정적만이 가득한 방 안에서 어디선가 묘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쿵, 쿵, 쿵…….
근원은 바로 앞에 있었다. 제 눈앞에 있는 율리어스의 가슴팍에서 커다랗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였다. 그것이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은 긴장한 일리안도 알 수 있었다.
율리어스도, 자신만큼이나 긴장하고 있는 걸까.
어디서 용기가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일리안은 제 머리 위에 있는 율리어스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보지 마요.”
텁.
일리안의 눈가가 오늘 아침 일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큰 손에 의해 덮였다. 일리안의 조그만 얼굴 위로 커다란 손이 얹어지자 모두 가려졌다.
율리어스의 보지 말라는 목소리가, 꼭 그가 아홉 살이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거의 가이우스에 필적하는 키를 가진 그가 귀여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은 컸지만 그 탓에 손가락 사이 틈도 컸다.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손가락 틈 사이로 슬쩍 보이는 목덜미가 붉다는 사실에 조금 더 웃었다.
웃음기가 가시자 그제야 졸음이 몰려왔다. 아직 몸이 낫지도 않았을뿐더러 하루 종일 미열에 시달렸더니 피곤했다. 일리안은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지 않고 그곳에 제 몸을 실었다.
“…….”
“……잡니까?”
일정한 숨소리가 들리자 율리어스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치웠다. 그러자 한눈에 헤이븐 윈터의 얼굴이 가득 찼다.
일리안과는 달랐다. 조그만 얼굴과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젖살은 어렸으며, 태양빛에 고생해 본 적 없는 흰 피부와 힘주어 잡으면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은 도저히 닮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품 안에 있는 온기만으로도 심장이 벅차 숨을 쉬기가 힘겨웠다. 제 품으로 돌아와 준 그녀에게 감사해서, 다시 떠날까 두려워서……. 율리어스는 난생처음 겪는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 품에 안긴 채 잠든 헤이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라앉은 밤의 침묵이 귓가를 먹먹히 채웠다.
율리어스는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아주 조금, 숨이라도 거칠게 쉬면 곧바로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결국 그것은 실행되지 못했다.
눈을 뜬 채 그녀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율리어스는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바라만 보았다. 해가 뜨도록 그녀의 입술에 무언가 내려앉는 일은 없었다.
그에게 그것은 쉽사리 훔쳐갈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못했다.
* * *
번쩍.
어제와는 달리 단번에 눈을 뜬 일리안은 제 시야를 가득 채운 살색 물결에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이게 뭘까. 곰곰이 생각하던 일리안은 그제야 어제의 일이 모두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뺐다. 아니, 빼려 했다. 그러나 무언가가 뒷머리를 감싸듯 움켜쥐고 있어 물러설 수도 없었다. 고개를 천천히 들자 눈을 감은 율리어스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몇 번을 보아도 율리어스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사실 여자인 자신보다도 아름답다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일리안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렸다. 피부가 아니라 솜털을 만진다 하는 게 옳을 정도로 미묘한 손길이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보는 사람도 없건만 어쩐지 죄책감이 들어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자 예의 가슴팍이 다시금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딜 돌려도 율리어스의 몸, 혹은 얼굴밖에 없었다.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그와 꼭 맞닿은 하반신이 느껴졌다.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른 일리안은 어서 빨리 침대를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런.”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히 몸을 움직였다. 자신을 둘러 안은 팔은 묘하게 힘이 들어가 있어 아래로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았다.
성공이 눈앞이었다. 몸을 뒤로 뺐으니 머리만 숙여 율리어스의 팔 사이를 통과하면 무사히 침대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잖습니까.”
“너……!”
“그만 도망가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일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대체 언제부터 눈 뜨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잠자는 척을 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억울해 무어라 따지려 했을 때, 몸이 당겨졌다. 율리어스는 거의 다 빠져나갔던 일리안을 도로 제 품에 돌려놨다.
“조금 더……. 이제 내가 잠을 자주 못 잔다는 것도 알잖습니까. 조금만 더 잘게요.”
응석 부리는 것 같은 말투에 잠깐 마음이 약해졌다. 그가 불면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제는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 덕분에 편하게 잤다면 그가 다시 잠들 때까지 안겨 있을 요량도 있었다.
“이게, 무슨! 이봐. 율리어스!”
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안일했다.
그가 잠들면 빠져나와야지, 라고 생각하던 일리안의 몸 위로 기다란 다리가 얹어졌다. 일리안은 율리어스에게 거의 묶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품 안에 갇혔다.
그는 처음부터 일리안을 제 품에서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율리어스는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일리안의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율리어스의 무게에 더불어 두툼한 겨울 이불까지 감당하게 되자 숨은 쉴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기상하실 시간입니다, 공작 전하.”
펜서의 목소리였다.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이불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율리어스의 품속으로 숨는 꼴이 되었지만 별수가 없었다. 펜서에게 이 모습을 들켰다간 제 양심은 물론 수치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숨어드는 일리안에 율리어스가 픽 웃었다. 그리곤 그녀를 한 번 더 껴안아 숨겨주며 펜서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집무 시간을 늦추지.”
“……예, 그렇다면 아침 식사는 어떻게.”
“1시간쯤 뒤에 준비하도록. 아, 2인분이어야겠군.”
이불 안에서 벌게진 얼굴로 숨어 있던 일리안이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제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율리어스도 이불 속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고 그녀를 구경하던 참이었다.
왜, 2인분이라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입니까.
일리안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율리어스는 이미 희미하게 웃는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펜서가 나가자 일리안이 폭, 하고 이불 속을 빠져나왔다. 두터운 이불 속에 갇혀 있느라 숨쉬기가 벅찼는지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었다.
“잠도 다 깨신 것 같으니, 가겠습니다.”
“보내주기 싫다면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으십니까?”
일리안이 퍽 곤란한 얼굴로 제 볼을 긁었다. 존댓말을 쓰는 율리어스가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 모습은 그녀에게도 낯선 일이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아니라 헤이븐 윈터라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그와 어제부터 내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주제가 흘러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목소리가 너무도 평연해 당연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리안 하인리히의 말만 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