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63화 (63/123)

63. 목줄은 부디 꽉 움켜쥐길

깜빡, 깜빡.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 떴지만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빛이 너무 밝아 그런가 싶었지만,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도 이마 부근에서 얼얼한 통증이 올라왔다.

일리안은 결국 얼굴을 찌푸린 채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눈이 부셔 빛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번 통증을 자각하자 온몸에서 고통스러운 감각이 몰려와 손을 들기도 벅찼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커다랗고 차가운 손이 그녀의 눈가를 한 움큼 덮었다. 얼굴을 만지는 것을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아직 눈뜨지 않아도 좋습니다.”

고조 없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일리안은 아직 몽롱한 정신으로 누구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열이 오른 제 얼굴과는 반대로 사내의 손이 차가워 기분이 좋았다.

“불을 모두 끌까요.”

말투가 꼭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의 율리어스 같았다. 목소리는 싸늘한 주제에 말투만은 제가 시킨 대로 존댓말을 하느라 그렇지 않았던……. 잠깐, 율리어스?

“유리……?”

“불렀습니까.”

아직 누워 있는 그녀의 눈 위로 커다란 손이 덮인 채였다. 일리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제 손을 들어 그의 손을 끌어 내렸다. 열이 올라 붉어진 뺨의 일리안이 겨우 제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율리어스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다. 일리안은 설마 자신이 이전 생으로 돌아온 것인가 싶어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다 문득 끌어 내렸던 그의 손이 보였다. 율리어스의 손은 아직 일리안에게 붙잡힌 채였는데, 그의 손에 비하자면 제 손은 아이의 것 같았다.

그 손들을 보고서야 현실이 와닿았다. 자신은 지금 헤이븐 윈터였다.

정신을 차린 일리안이 아직까지 붙잡고 있던 율리어스의 손을 황급히 그에게 되돌려 줬다. 제 손을 원위치시키는 율리어스가 어쩐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면, 자신이 이상한 걸까.

“율리어스 님, 왜 존댓말을… 하는 겁니까?”

“아직도 도망치는 겁니까.”

율리어스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껏 다정하게 행동했던 것은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죽은 당신의 시체를 껴안고 미쳐가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어요?”

“그게, 무슨…….”

“혹은, 내가 죽으면 당신을 놓아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애석하게 되었습니다.

율리어스는 눈 한 번 감았다 뜨지 않고서 그녀를 직시했다. 그의 빛 한 점 들지 않는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옭아매었다.

“그랬으면 더 조심했어야지, 일리안.”

“…….”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사라졌는데.”

그는 더 이상 그녀를 헤이븐 윈터로 보지 않았다. 무기질의 눈동자 위로 헤이븐 윈터의 모습이 보였지만, 이미 율리어스에게 있어선 일리안 하인리히였다.

일리안은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돌렸다간, 그에게 잡아먹힐 것만 같아서.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간신히 말을 더듬지 않고서 그에게 무어라 대답을 하려 했다. 그녀답지 않게 몹시도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둘밖에 없던 방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일리안은 그 틈을 타 재빨리 들어온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헤입븐, 헤입븐!”

“라, 라울 님, 그곳에 들어가셔선……!”

자신답지 않게 흥분해 달려온 라울의 뒤로 다급하게 가이우스가 따라 들어왔다. 율리어스는 들어온 이에게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제 시선을 비껴간 일리안을 나무라지도 않았다.

방으로 침입한 라울이 아직 제겐 높이가 제법 되는 침대에 딱 달라붙어 그곳에 누워 있는 일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눈을 끔뻑이던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시울이 그렁그렁했다.

“헤입븐이 그랬어. 엄마는 살아 있다고.”

“…….”

“내가 간저리 보고 싶어 하면 볼 수 있댔써요.”

“……죄송합니다, 시녀들이 함부로 떠드는 걸 라울 님이 들으신 것 같습니다.”

아이는 제 말에 동의해 달라는 눈빛으로 침대 시트를 꼭 움켜쥐었다.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일리안 하인리히의 아들이 공작성을 돌아다니니 라울이 이상한 이야기라도 들은 모양이었다.

“헤입븐. 엄마 이제 못 봐요……?”

일리안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라울을 한 번, 그리고 율리어스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아이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율리어스에게 자신이 일리안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아니라고 말하기엔 당장이라도 아이가 울 것 같았다.

가이우스가 혹시 아이를 데리고 나가줄까 싶어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차마 율리어스가 있는 곳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는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대답이 늦어지자 결국 라울이 눈물을 터뜨렸다.

“……라울, 설마. 네가 간절히 원하면 언젠가는 볼 수…….”

속삭이듯 말하며 슬며시 율리어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는 픽 웃고 있었다.

놀란 일리안이 말을 잇지 못하고 멈칫하자 율리어스가 라울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아이를 들어 올렸다. 아이를 한 번도 안아본 적이 없을 율리어스가 제법 능숙한 태도로 라울을 품에 안았다.

“라울이라고 했나.”

“……히끅.”

“살아 있으니, 걱정 마라.”

고개를 숙인 가이우스의 어깨가 흠칫거리는 것이 일리안에게도 보였다. 방 안에서 아무렇지 않은 이는 라울과 율리어스 뿐이었다.

*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출입이 불가능하다더니, 지금은 나가는 게 불가능하단 말입니까?”

“그것이, 율리어스 님의 명이라…….”

가이우스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일리안은 그것이 그의 잘못이 아님을 알기에 나무라진 않았지만 깊은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은 가이우스는 움찔거리다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조금이라도 제 주군을 대변하기 위해 간절한 눈으로 일리안을 바라봤다.

“하지만, 공작성에 계시는 게 몸을 치료하기에도 좋을 겁니다. 뛰어난 신관과 의원들이 모두 공작성에 있는 터라…….”

“이 정돈 조금 쉬면 낫습니다.”

“조금 쉬면 낫는다니요? 헤이븐 님, 며칠이나 정신을 잃으셨던 건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어딘지 흥분한 것 같은 가이우스의 말투에 일리안은 제 볼을 긁었다. 예전과 달리 그가 제 건강에 몹시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에릭은 어디 있습니까?”

“……윈터 가문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예? 그렇다면 저도 돌아가는 게…….”

“헤이븐 님은 안 됩니다.”

가이우스도 제 말이 논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아는지 곤란한 낯빛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동안 율리어스가 보였던 모습과 그 뒤에 내려진 명령을 생각하자면 아무리 말이 안 되는 논리여도 일단 공작성에 붙잡아두어야만 했다.

“신전에서 뛰어난 신관 모두를 데려와라. 의원 또한.”

“예? 하지만 공작성에는 이미 뛰어난 신관 하나가…….”

“모두 데려오라는 말, 듣지 못했나.”

정신을 잃은 헤이븐 윈터를 품에 안은 율리어스는 마법으로 공작성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신관을 불러 모았다. 가이우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에게 말하자, 율리어스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그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헤이븐을 소중히 껴안은 율리어스는 놀랍게도 제 침실로 그녀를 데려갔다. 헤이븐이 누울 손님방을 정리하고 있던 집사장 펜서는 허둥지둥 그의 침실을 정리해야만 했다.

이상한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공작성에 도착한 신관들은 곧장 일리안이 있는 곳으로 투입되었는데, 남자 의원 하나가 몸의 상처를 보기 위해 그녀의 옷자락으로 손을 올렸을 때였다. 헤이븐의 곁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율리어스가 의원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무슨 짓이냐.”

“다, 다른 상처가 있는지 보려고……!”

그의 팔을 던지듯 내려둔 율리어스는 턱짓으로 여자 의원 하나를 가리켰다. 지목당한 이는 긴장한 태도로 그녀의 옷자락을 건드릴 수 있었다.

그러고도 헤이븐 윈터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때문에 그녀가 정신을 잃은 동안 흉포한 율리어스의 기운을 감당하는 것은 치료사들과 공작성의 사람들 몫이었다. 오죽하면 시녀들은 헤이븐 윈터가 무사히 깨기를 두 손을 모아 기도할 정도였다.

“그럼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보세요, 가이우스 씨…….”

일리안은 일리안대로 답답한 처지였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율리어스가 무언가 눈치를 챈 것 같은데,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를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서로가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가이우스가 슬쩍 눈치를 보다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도 다행히 라울 님께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까.”

“……다행인가.”

인질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킨 일리안이 커다란 이불을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슬쩍 눈만 돌려 창밖을 보니 곧 해가 질 것 같았다. 일리안은 체념한 얼굴로 넓은 침대 위를 바라봤다.

“그럼, 방이라도 바꿔주십시오. 이곳은 율리어스 님의 방이 아닙니까.”

“그게…….”

또? 모든 일이 가이우스의 잘못이 아님은 알았지만 일리안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한마디라도 하려 했다. 그것을 막은 것은 다른 목소리였다.

“내가 이곳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율리어스… 님?"

율리어스의 자연스러운 존댓말에 순간적으로 편하게 부를 뻔했던 일리안은 간신히 제 말투를 정정했다. 가이우스는 방으로 들어온 율리어스를 보며 살았다는 얼굴로 재빨리 그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던 율리어스는 일리안이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고서 집무를 보러 가야만 했다. 며칠째 집무를 미루어뒀으니 급하게 처리할 일만 해도 산더미처럼 많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율리어스가 해가 지기도 전에 침실로 돌아오다니. 본래라면 밤이 늦도록 집무만 했을 그는 무슨 일인지 빠르게 업무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왔다.

아마도 공작성의 사람들은 율리어스가 사실 누구보다도 빠르게 업무를 끝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을지도 몰랐다.

“당신을 이곳에 묶어두라고 했습니다, 내가.”

“……율리어스 님께서도 자야 하지 않습니까. 방이라도 바꿔주시면,”

“또 도망치려고?”

율리어스가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성인 남자 몇 명이 굴러도 남을 침대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던 일리안은 그와의 거리가 제법 되었는데도 침대가 출렁이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제가 드린 자유를 발로 차버린 것은 당신이 아닙니까, 일리안.”

“……저는 일리안 하인리히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입을 다문 채 일리안을 바라보던 율리어스가 움직인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그가 그녀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번에도 놓아드릴까요.”

“…….”

“얼마나 쫓아가야 잡혀주실 겁니까.”

사냥감을 쫓는 범처럼, 율리어스는 여유로운 태도로 그녀와 가까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뒤로 뻗어 물러섰던 일리안은 도망갈 새도 없이 그의 품에 갇혔다. 영락없이 붙잡힌 먹잇감이었다.

어느새 해가 져 침실에는 어둠이 드리웠다. 일리안은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불빛으로 율리어스를 볼 수 있었다.

위험하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연신 맴돌았다. 그의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이다지도 위험하다고 느꼈던 순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율리… 어스.”

움직이지 않는 입을 달싹였다. 그렇게라도 그를 불러야 율리어스를 당장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그의 고삐를 잡아야만 했다.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그녀를 제 품에 가두고 내려다보던 율리어스는, 긴장된 분위기가 무색하게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쩌면 그녀의 생각대로 그를 부른 이름이 목줄이 되어준 걸지도 몰랐다.

“건드리지 않을 테니, 이곳에서 자요.”

탁.

침실에 있는 문들 중 하나가 닫혔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 일리안은 그제야 편하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혹시 율리어스가 다시 침실로 들어올까 싶어 나간 문을 곁눈질로 살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가 들어간 곳이 침실과 이어지는 간이 욕실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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