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62화 (62/123)

62. 내 것

“……그년이 살아 돌아와? 무슨 헛소리를.”

“그때, 미하엘과 리에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지. 미하엘은 당신이 제 아이를 훔쳐갈까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후작이 입가를 부들거렸다. 일리안은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머리만 들어 후작을 직시하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미하엘의 가슴팍에는 흉한 점이 있었어. 대대로 유전되는 것이라더군. 벗겨놓고 가학하는 게 당신의 취미였으니 알고 있을 테지? 라울의 가슴을 훑어봐도 좋아.”

후작이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반쯤 정신을 잃은 라울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그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죽는 모습은 영상구를 통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시체조차 폭발 마법으로 태워 버렸다는 이야기를 겨우 살아 돌아온 부하로부터 분명히 들었다. 아니, 애초부터 화살을 수두룩이 맞고 고깃덩이가 된 그것이 어떻게 살아남는단 말인가?

그러니, 저년의 말은 모두 거짓이다. 이 자신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세 치 혀를 움직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으, 으헉……!”

라울의 가슴팍을 헤집던 후작이 순간 뒤로 주저앉았다. 라울에겐 미하엘의 자식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남아 있었다.

후작의 머릿속으로 죽어간 제 자식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피를 흘리며 자신을 원망하던 자식들이 금방이라도 제 목을 조르기 위해 지옥에서 찾아올 것 같았다.

이상했다. 라울 하인리히가 사실은 라울 라히텐슈였음을 알았으니 기뻐야 하는데, 내려다본 제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본래라면 아이를 데려가 괴롭힐 생각에 설레야 할 텐데.

그런 후작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안은 자꾸만 피가 나오는 입안을 더듬으며 말했다.

“……증명이 되었다면 라울은 살,”

온몸을 떨던 후작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후작이 순식간에 일리안에게 다가왔다.

퍽, 퍼억.

거센 발길질이 그녀의 작은 몸뚱어리로 쏟아졌다. 후작은 겁에 질린 얼굴로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고 구타했다.

“이딴, 이딴 천한 계집에게……! 죽여 버려야 해, 당장!”

반듯하게 머리를 넘긴 채였던 후작의 얼굴 위로 땀과 함께 흰 머리카락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렸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참지 못한 분노를 그녀의 몸 위로 쏟아냈다.

라울이 맞지 않아서 다행이다.

흔들리는 시야로 정신을 잃은 라울을 보며 겨우 생각했다. 자신이 맞는 것쯤은 익숙한 일이었다.

이마가 깨진 모양인지 콧대를 타고 무언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결국 더 이상 라울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만 했다.

뒤로 포박되어 있던 팔이 풀려 간신히 양팔로 머리만을 감쌌다. 그러나 퍽, 하며 미처 감싸지 못한 머리를 얻어맞자 귓속으로 기나긴 이명이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손에서 힘이 풀린 일리안이 머리를 감쌌던 양팔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다 그녀가 잠시 흰자를 드러내며 정신을 잃으려 하자, 후작이 그녀의 머리를 한쪽 발로 짓밟았다.

목에 핏대가 선 후작이 정신없이 그녀의 머리를 짓이기고 있을 때였다.

“발, 치워.”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동굴 속을 울렸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인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후작은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피가 묻은 구둣발을 들어 올린 채로 멈칫했다.

검은 머리를 한 사내가 엎드린 일리안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멍청하게 서 있는 후작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우두둑.

공중에 떠올라 있던 후작의 피 묻은 발이 괴이한 형태로 돌아갔다.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동굴 속으로 뼈가 꺾이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흐억, 으흐……!”

후작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쓰러진 그가 제 돌아간 발목을 차마 붙잡지도 못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러다 결국 제 앞에 있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가만히 후작을 응시하고 있었다.

섬짓, 소름이 돋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도록 오한이 든 후작은 그를 삿대질하며 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저놈을 죽여. 저놈을 당장 내 눈앞에서 죽여 버려라!”

그런데 이상했다. 다른 때였다면 명령에 복종하는 대답과 함께 움직이기 바빴을 부하들에게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후작이 벌벌 떨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주변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후작과 일리안, 라울 그리고 율리어스를 제외하고선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단 하나, 피가 묻은 옷가지들을 제외하고서.

율리어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작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그에게 겁먹고서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어 힘겹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일어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율리어스보다 재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후작의 눈동자에 선연한 공포가 어렸다. 부하들이 사라진 것처럼 자신 또한 당장 이 공간에서 사라져 버리란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나야 할 걸음 소리조차 그에게선 들리지 않았다. 후작의 앞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율리어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죽어라.”

퍼억.

무언가 터뜨리는 소리와 함께 후작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 탓에 볼에 피가 묻은 율리어스는 감흥 없는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일리안은 정신을 잃은 뒤였다.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간 율리어스가 무릎을 꿇고서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무감각했지만, 떨리는 손가락이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율리어스가 소중한 것을 품은 듯 그녀를 안아 들었다. 몹시도 작은 체구의 일리안이 눈을 감은 채 그의 품속에 안겼다.

내 것을, 되찾았다.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던 율리어스가 고개를 숙였다. 일리안의 이마에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그저 사랑하는 이에게 입을 맞추는 것이라기에는, 너무도 애달픈 구애였다.

* * *

에릭은 갑작스레 사라진 율리어스에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팔을 잡았던 손이 허공에 붕 뜬 채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어디 가신 겁니까?”

“아마도 율리어스 님께선 무언가 들으신 것 같습니다.”

에릭의 뒤에 서 있던 가이우스가 앞으로 나왔다. 그 또한 율리어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선 에릭의 어깨를 짚었다.

“듣다니요? 이곳에선 물이 떨어지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그분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공작성에서 호위 일을 할 때였다. 그는 집무를 보다가도 종종 창가에 서서 정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리안을 바라보곤 했었다.

가이우스는 그때마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는데, 하루는 일리안을 내려다보던 율리어스가 갑작스레 그녀에게 물을 가져다주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그는 자신처럼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라면 볼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다. 그것은 사방이 막혀있는 이 동굴에서라면 더욱 잘 들릴 게 당연했다. 그게 저 너머에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서 움직여야겠군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으니…….”

둘만 남은 에릭과 가이우스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용한 동굴 속에선 둘의 터벅터벅 걸어가는 발소리만 가득 울렸다.

말없이 걸어가던 둘 사이의 침묵을 깬 것은 가이우스였다. 그는 여상한 얼굴로 지나가듯 질문을 던졌다.

“에릭 경께선, 헤이븐 님을 마음에 담아두고 계십니까?”

“예? 그게 무슨……!”

“아니란 말입니까?”

에릭의 귓가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성인이 된 뒤로 무뚝뚝하게 굴었던 에릭이 열다섯 살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런 에릭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이우스는 이내 다시 앞을 바라봤다.

“포기하는 게 옳을 겁니다.”

“……어째섭니까.”

에릭이 순간 주먹을 꽉 쥔 채 걸음을 멈추었다. 몇 걸음 앞서가던 가이우스도 결국 멈추고서 그를 돌아봤다.

“아시지 않습니까. 율리어스 님과 헤이븐 님이 서로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는.”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공작 전하께선 방금 헤이븐 윈터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율리어스 님께 있어서 헤이븐 윈터일 때의 이야깁니다.”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순간 눈을 찌푸려야만 했다. 가이우스 또한 그가 이해하리라 생각하고 던진 것은 아니었던 듯 말을 덧붙였다.

“만약 율리어스 님께서 헤이븐 님에게서 일리안 하인리히 님을 보게 된다면 에릭 경은 당장, 그 마음을 접으셔야 할 겁니다.”

“…….”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을 마친 가이우스는 더 이상 볼일이 없었는지 다시 몸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자리를 떠나고서도 에릭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에릭과 가이우스는 그러고도 한참을 걸어가다, 나중에 이르러선 달려야만 했다. 둘의 숨이 거칠어질 즈음 그들의 눈에도 너른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굴의 중심부에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는 율리어스의 넓은 등이 보였다. 그 옆으로 누군가의 삐죽 튀어나온 다리가 있었다.

“율리어스 님. 다치신 곳은,”

“가이우스.”

“예, 부르셨습니까.”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며 묻던 가이우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에릭 또한 덩달아 멈추었다.

“네 눈엔, 내 품에 있는 이가 누구로 보이지?”

그 물음에 가이우스는 몇 걸음 더 움직여 그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그의 품 안에 소중히 안겨 있는 헤이븐 윈터가 보였다. 율리어스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헤이븐 윈터 님이십니다.”

“그래.”

가이우스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율리어스는 놀랍게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면서도 제 품에 안긴 이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내가 미친 거로군.”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이제껏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았으니 똑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녀를 놓아주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겠다.

직접 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일리안.

제 품속에서 옷이 너덜거린 채 피투성이가 된 일리안을 한 번 더 꽉 끌어안았다. 비록 희미했지만 조그맣게 들려오는 숨소리가, 제게 얼마나 안도를 느끼게 하는지 그녀는 평생이 가도록 모를 터다.

당신은 늘 떠났고, 나는 쫓아가기 바빴으니.

이번에도 내가 당신을 쫓겠습니다.

아직도 조금씩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결국 율리어스는 고개를 떨어트려 그녀의 목덜미에 머리를 박았다. 영원히 놓친 것 같았던,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제 것을 이제야 돌려받았다.

“ㅡ에릭 경!”

“주십시오. 제 주군이니 제가 챙기겠습니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자신을 진정시키던 율리어스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금 눈을 떴다. 에릭이 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뻗고 있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네가?”

고개를 든 율리어스의 얼굴에 검푸른 비늘이 돋아났다. 눈이 마주친 에릭은 온몸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굳었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전하, 그분은 헤이븐 님의 기사입니다! 진정하십…….”

“헤이븐… 윈터에게는. 헤이븐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했잖습니까. 당신이!”

에릭은 거부하는 제 성대를 강제로 열어 질문을 던졌다. 핏발 선 눈이 어떻게든 그를 제대로 마주 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헤이븐 윈터에게도, 일리안 하인리히에게도.”

“…….”

“네가 있을 곳은 조금도 없다.”

어느샌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율리어스가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에릭을 내려다봤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일리안은 눈을 감은 채 평온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모두 내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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