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천박한 용병의 귀환
“응? 몹시도 궁금하단 말이지. 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을까.”
일리안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댔던 남자가 이내는 그녀의 팔을 뒤로 돌려 포박했다. 몸을 속박당한 일리안의 앞에 다가온 것은 라히텐슈 후작이었다. 후작이 주름진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미하엘과 똑같은 색의 금발 머리와 제법 비슷한 구석이 남아 있는 이목구비는 그를 떠올리게 했지만,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이상하구나. 남작 영애 계집이라고 하였는데 왜 이렇게…….”
“…….”
“천한 냄새가 나는 게냐?”
후작은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턱에서 제 손가락을 털어냈다. 그리곤 손수건을 꺼내 아무것도 묻지 않은 손가락을 문질렀다.
“그래. 그래서 네가 말한 나의 손자는 어디 있나. 저 동굴인가?”
“고작 그런 시시한 대화가 하고 싶어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후작?”
눈을 내려 목에 닿아 있는 단도를 확인했다. 목소리를 내어 목을 움직일 때마다 바짝 달라붙은 단도가 얇게 저미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하고서 고조 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에 반해 후작은 눈을 끔뻑이며 제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주시했다. 표정 없이 가라앉은 열일곱 살 여자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날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당신이 필요한 건 라울이 누구의 핏줄인지가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천박한 핏줄을 타고난 주제에 라히텐슈의 후손이 될 수는 없으니까.”
“……당신의 핏줄일 수도 있을 텐데, 왜 죽이려 드는 겁니까.”
라울이 미하엘의 아이라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라울이 핏줄이 아님을 알았다면 신경을 끄고 살았으면 될 터인데, 어째서 그는 이렇게도 자신들을 쫓아다녔던 걸까.
“그야, 거슬리니까.”
“…….”
“리에나 세이버? 평민 계집년을 죽였을 때였지. 같잖게도 숲속으로 도망친 탓에 쫓아가 죽였더니, 웃고 있더란 말이야. 그리고 후에 뒤져보니 곳곳에 아이 용품이 널브러져 있더군.”
하지만 그사이 이미 아이는 사라진 뒤였다. 후작은 리에나가 죽고서도 몇 년이 지나도록 그 점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그는 이미 죽은 미하엘의 주변을 샅샅이 캐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알아낸 것이 미하엘이 죽고 나서 갑작스레 아이가 생겼다는 일리안 하인리히라는 용병이었다.
“웃으면서 죽은 게 거슬렸어. 싹을 남겨두는 것 같았거든…….”
비쩍 마른 후작은 그 사실이 진심으로 불쾌했던 듯 미간을 좁혔다. 포박당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안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라울이 당신의 후손임을 확신하면… 아이는 살려주는 겁니까.”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끝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듣던 후작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물론이지. 반쯤 천한 핏줄이 섞였더라도 나의 귀한 자손이니까.”
“…….”
“하지만 그 전에.”
일리안이 입을 다물고 잠시 그를 바라보던 때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아 깨끗한 손수건을 바닥으로 떨어트린 후작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이를 먼저 확인해야겠군. 그래서, 그 아인 어디 있나?”
“……동굴 속에.”
그녀와 라울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벌써 퍼져 나간 것인지 후작의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이고 있었다. 후작은 그녀가 동굴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곧장 몸을 돌려 검은 아가리를 벌린 동굴 속으로 발을 움직였다.
일리안 또한 자신을 포박하고 있는 남자의 떠밀림에 의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제 목에 단검을 대고 있는 그는 끊임없이 위협을 가하려는 모양인지 이미 피가 흐르고 있는 목덜미에 틈틈이 그것을 바짝 붙여왔다.
후작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법 랜턴으로 동굴 속을 걸어가는 길은 제법 환했다. 얼마 걷지 않아 텅 빈 공간에 홀로 검을 껴안고 주저앉아 있는 라울이 보였다.
“……힉.”
라울의 앞에 후작이 다가섰다. 일리안은 그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후작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대신 라울만이 후작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일리안을 울먹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울지 말아야 할 텐데.
자신이 부족한 부모라 자꾸만 아이를 울리는 것 같았다. 일리안은 당장이라도 울먹거리는 아이를 껴안아주고 싶어 팔을 움찔거렸지만, 그 기색을 느낀 것인지 뒤에 있던 남자가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네가 라울이더냐?”
“……누, 누구…….”
앉아 있던 라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선 후작을 바라봤다. 울먹이는 눈동자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오려던 때였다.
후작이 라울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들어 올렸다. 아이의 컥컥거리는 소리가 동굴 속에 울려 퍼졌다.
“라울!”
아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일리안이 저를 잡고 있는 손길을 뿌리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이미 단단히 잡고 있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무릎 뒤를 퍽 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제로 무릎을 꿇은 일리안은 위에서 짓누르는 힘에 의해 동굴 바닥에 뺨을 댈 수밖에 없었다. 팔이 뒤로 돌려진 채 강제로 엎드린 그녀의 머리 위로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딴 냄새 나는 애새끼가 나의 핏줄이라고?”
컥컥거리던 신음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았다. 곧이어 아이의 가빠지는 숨소리가 희미하게 끊기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머리를 숙인 일리안으로부터 고조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하엘은.”
“…….”
“미하엘은 줄곧 당신이 두려워 위험한 임무만 수락했지. 라히텐슈 가문이 손을 뻗지 못하는 곳은 그런 곳밖에 없었거든. 그게 10년이었어.”
그녀의 말이 끝나자 라울의 목을 붙잡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몸을 들어 올리고 있던 손이 사라지자 라울이 바닥으로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아이의 조그만 몸이 딱딱한 동굴 바닥에 부딪혔지만, 다행히 머리부터 닿지는 않은 것 같았다. 거센 기침을 해대는 아이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일리안은 머리를 바닥에 붙인 채 간신히 눈만 들어 바닥에 버려진 아이를 확인했다. 이를 악물고 그런 아이에게 무릎으로라도 기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루는 그러더군. 꿈속에서 두고 온 동생이 자길 원망한다고 말이야. 온몸에서 피를 흘리면서.”
“넌, 누구냐.”
“왜냐면, 그 녀석의 아비는.”
제 아이를 가학하며 느끼는 변태였으니까.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일리안의 머리가 구둣발에 걷어차였다. 고개가 돌아간 그녀는 입속에 고인 핏물을 퉷, 뱉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천박한 계집!”
“아직도 모르는 척할 셈인가?”
늘 여유로운 티를 내던 후작이 갑작스레 노성을 지르자 그녀를 포박하고 있던 사내 또한 놀란 것 같았다. 몸을 짓누르고 있던 힘이 조금 풀리자 일리안이 고개를 들어 후작을 올려다봤다.
붉은 기가 섞인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모든 것을 직시하듯 후작을 관통했다.
“당신이 죽였던 천박한 용병이 돌아왔다고, 후작.”
* * *
한편, 약초꾼을 따라가던 에릭과 율리어스는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라히텐슈 가문의 짐마차를 보았다는 약초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듯 산속 곳곳에 무장한 사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자 문양이 그려진 짐마차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이상한 것은, 사내들 또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숲속 곳곳을 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년은 도대체 어디로 도망간 거야, 씹.”
“아아, 빨리 찾고 쉬고 싶네. 제일 먼저 찾으면 후작 전하가 특별 보수라도 주시려나?”
바로 앞을 지나가는 사내들의 목소릴 들으며 에릭은 헤이븐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의 뒤에 있는 율리어스와 가이우스 또한 이 사실을 깨달았을 터다.
에릭은 섣불리 사내들을 제압하지 않고 제 뒤에 있는 이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반나절간 헤이븐을 찾기 위해 이들을 따라다녔지만 역시 무언가 이상했다.
처음 공작성 앞에서 율리어스를 만났을 때에는 그도 헤이븐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지 않는 그녀를 걱정하고, 직접 찾아 움직일 정도로.
하지만 그는 어딘지 초조함이 없었다.
놀랍도록 이성적인 태도로 헤이븐 윈터를 추적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곁에 있는 가이우스가 더 그녀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율리어스는 헤이븐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아니,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때 보았던 눈빛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주변을 탐색하던 약초꾼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화색 띤 목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이건… 동굴이 아닙니까?”
가이우스가 약초꾼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앞에는 사람 1명이 지나갈 만한 동굴 입구가 놓여 있었다.
“예, 맞습죠. 이 동굴은 레시모 산을 관통하는 커다란 동굴인데 입구가 총 3개 있소. 하나는 아이가, 또 하나는 어른 1명이,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마차가 지날 만한 크기지요. 동굴을 이용하면 산속을 움직이기가 한결 빠를 겝니다.”
거기까지 말한 약초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주었다는 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사람을 찾는 일이니 그의 필요성은 다한 셈이었다.
가장 먼저 발을 움직인 것은 율리어스였다. 싸늘한 태도로 그가 먼저 움직이자 에릭이 뒤를 따랐다. 가이우스는 약초꾼에게 고개를 한번 숙이고서 후미를 차지했다.
동굴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거의 산의 초입에 있던 입구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행군이 계속되자 율리어스의 뒤에 있던 에릭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의 이성적인 태도가 자꾸만 에릭의 마음 어딘가를 찔러대고 있었다.
“……당신은, 헤이븐에게 마음이 있는 게 맞습니까?”
“…….”
“대답을 하십시오! 아니라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건지 알려주기라도…….”
율리어스는 걸음조차 멈추지 않았다. 대신 나직이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헤이븐 윈터에겐 조금도 관심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나?”
“……그렇습니다.”
“알았다면 이딴 병신 짓을 그만두었겠지.”
에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율리어스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조금쯤 안도의 감정이 들기도 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래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
인사를 하려던 에릭은 갑작스레 멈춰 선 율리어스에 의해 덩달아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의문스러운 얼굴로 앞선 율리어스의 어깨 너머를 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깜깜한 동굴의 좁은 길뿐이었다.
들려오는 것이라곤 어디서 나는 것인지 모를 똑, 또옥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그것은 비단 에릭뿐만이 아니라 그의 뒤에 있는 가이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묘한 정적이 맴돌았다. 율리어스는 죽은 것처럼 가만히 서서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너무나도 숨죽인 채 듣고 있어 에릭과 가이우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가만히 서 있던 율리어스가 다급히 달리기 시작한 것은.
“이보십시오, 어딜 갑……!”
놀란 에릭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강제로 멈춰 서게 된 율리어스가 고개를 돌려 에릭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에릭은 잡았던 손목을 멍하니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곳에 오기까지 한없이 건조한 얼굴이었던 율리어스가 아니었다. 초조함, 다급함, 간절함……. 아니, 이런 단어들로 그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본 율리어스의 입매가 떨리고 있었다. 죽다 살아난 것처럼…….
에릭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율리어스의 신형이 사라진 뒤였다. 이미 마법을 써서 움직인 것 같았다.
“헤이븐 윈터에겐… 조금도 관심 없다면서.”
그런데 왜 그런 얼굴로, 이렇게 다급하게 사라졌을까.
알았다면 이딴 병신 짓을 그만두었을 거라던 사람이, 대체 어째서.
어떤 단어들로도 방금 전 보았던 그의 얼굴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에릭은 그 생각을 정정해야만 했다.
그의 얼굴 위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환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