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유일한 증인
“허억, 헉…….”
산속을 오르던 일리안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왔다 하더라도 헤이븐 윈터의 몸으로는 아이를 안고서 길이 험한 산속을 오래 달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사내들의 발걸음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올 것만 같았다. 아직은 해가 떠 있으니 이렇게 달려야 했지만 곧 해가 지기 시작하면 그나마 숨는 게 용이할 터다.
조금만 더 버티면…….
그렇게 자신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일리안의 눈에 문득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르게 풀이 우거져 있는 부분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성인 1명이 엎드려서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틈이 숨겨져 있었다. 라울을 잠시 내려두고 머리를 들이밀어 안쪽을 살폈다.
동굴 특유의 음습한 냄새.
어느 동굴로 들어가는 조그만 틈새인 듯했다. 일리안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라울? 왜, 목이 말라?”
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고개를 내밀자 라울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울은 목이 마르냐는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대신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틈새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라울은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만약 이곳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들킨다면, 그리고 빠져나올 구멍이 이곳 하나뿐이라면. 입술을 꾹 누르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흔적을 모조리 찾아라! 산속을 벗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위로 몰아세워!”
“예, 알겠습니다!”
멀리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일리안은 라울을 제 뒤로 돌리고 자신이 먼저 무릎을 바닥에 짚고서 동굴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손바닥에는 축축한 이끼 특유의 촉감이 느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몇 미터 정도를 먼저 들어간 일리안은 종종 라울이 제 뒤를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며 엎드려 걸어갔다.
일리안에겐 엎드려야 할 정도로 작았지만 라울은 머리만 조금 숙이면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그녀가 뒤돌아볼 때마다 라울은 커다란 눈동자를 끔뻑이며 일리안의 뒤에 바싹 달라붙었다.
얼마나 좁은 굴을 기어갔을까, 그 너머엔 그녀가 일어서고도 남을 정도로 넓은 빈 공간이 존재했다. 뚜욱, 뚝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구석진 곳엔 바깥에서 흘러들어오는 맑은 물이 있었다.
자신이 먼저 물의 맛을 확인한 일리안은 곧장 라울을 무릎 위에 앉히고 손바닥으로 물을 떠먹였다. 라울은 칭얼거리지 않고 단물이라도 되는 양 꼴깍 삼키기 바빴다.
“라울. 시원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이 마르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던 라울은 볼을 붉히고 끄덕였다. 일리안은 그런 라울이 대견하면서도 아이가 상황 탓에 너무 조숙하게 자라는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스러웠다.
“나가면 맛있는 걸 먹자. 라울, 먹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게 있어? 뭐든 좋아.”
“음…….”
아이의 성격상 원하는 걸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일리안은 구태여 물었다. 비록 상황은 이랬지만 아이가 불안하지 않도록 무슨 대화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본래라면 곧장 고개를 저었을 라울이 웬일로 검지로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일리안은 그런 라울이 사랑스러워 픽 웃었다.
“엄마.”
“……어?”
“엄마 보고 싶어요.”
라울은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간 디노와 타피아와 함께 잘 지내는 것 같던 라울도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던 듯했다.
엄마를 보고 싶다는 말에 잠시 멈칫했던 일리안은 라울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다정히 쓰다듬었다. 그리곤 주저앉아 라울과 눈을 마주했다.
“내가 뭐라고 그랬지?”
“……나중에 볼 수 있다고…….”
“맞아. 라울이 언젠가 간절히 원하는 날이 오면, 볼 수 있을 거야. 살아 있으니까.”
라울은 일리안의 말을 모두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두 번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품으로 쪼르르 달려가 안길 뿐이었다.
“배고프겠는데. 마차에서 음식을 조금 챙겨왔으니 이걸 먹자.”
에릭이 만약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라울과 둘이서 산속을 탈출할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라울에게 제가 먹을 몫마저 모두 양보하며 안쓰러운 눈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 * *
에릭은 제 앞에서 말을 타고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질린 얼굴로 바라봤다. 나오려는 구토를 겨우 목 안으로 집어넣었다.
공작성에서부터 그녀를 찾아 출발한 뒤, 율리어스는 조금도 쉬지 않고 있었다. 라히텐슈 후작에게 끌려간 것은 알았지만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 수가 없어 수도 내를 샅샅이 뒤져야만 했다.
사람을 풀어 행방을 찾는 것은 물론 직접 움직이며 골목 구석까지 돌아보고 있었는데, 거기에 쏟은 시간만 반나절이었다.
율리어스는 하루의 반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헤이븐을 얼마나 걱정하는 지와는 별개로 인간의 체력이라면 구토가 나올 정도로 고된 여정임은 틀림없었다.
“사자 문양이라고 하셨소……?”
율리어스의 옆에 있던 가이우스가 보여준 문양에 웬일로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가이우스는 그 묘한 반응에 한 번 더 가문의 문양을 보여주며 물었다.
“이 문양이 새겨진 뭔가가 지나가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일주일쯤 전이었소. 그 사자 문양이 그려진 갑주를 입은 사내들이 밤중에 이 근방을 돌아다니며 윈터 저택을 찾지 무어요.”
“윈터 저택 말입니까?”
“예,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엔 둔해서……. 거기다, 이름이 뭐랬더라.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아이를 찾는다고 했소.”
윈터 저택과 금발 머리의 푸른 눈을 한 아이라면 라울 하인리히밖에는 없었다. 가이우스는 기나긴 수색 끝에 겨우 찾아낸 실마리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가이우스가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율리어스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게, 일주일 전쯤이었는데……. 보다시피 나는 산에서 약초를 캐는 약초꾼이오. 그런데 오늘 아침 산에서 내려오는 와중에 저 문양이 그려진 짐마차가 내려가고 있덥니다.”
“짐마차라.”
“그렇소. 그런데 짐마차를 다루는 일꾼들이라기엔 이상했지. 어딘지 다들 매서운 분위기가 흘러나와서…….”
거기까지 들은 가이우스는 결국 사내의 말을 도중에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산이 어딥니까?”
“여기 뒤랑 이어지는 조그만 산인데……. 레시모 산이라고.”
남자가 산의 이름을 중얼거리자마자 뒤에서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어스가 이미 말머리를 돌려 레시모 산이 있는 방향으로 향한 탓이었다.
가이우스 또한 길을 알려준 사내에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다시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아니, 올라타려던 참이었다.
“이, 이보게! 그런데 레시모 산의 지리는 아는 거요? 그 산이 고도는 낮지만 길이 복잡하기로 유명한 산이오.”
그러자 귀신같이 율리어스의 말이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힐끔 돌려 남자를 보고선 나직이 불렀다.
“가이우스.”
“예, 율리어스 님.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릭은 둘만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눈을 깜빡인 순간이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그곳은 더 이상 헤라프 제국의 수도가 아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레시모 산의 입구에 있었다.
에릭이 놀란 얼굴로 제 앞에 있는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그가 자신을 비롯해 에릭과 가이우스, 이름 모를 남자마저 마법으로 텔레포트를 시킨 것이었다.
그것도, 조금의 스펠을 외우는 것조차도 없이.
에릭은 작게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경이로움과 동시에 느껴지는 께름칙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마법을 부리는 자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놀란 것은 에릭뿐만이 아닌 듯했다. 레시모 산을 알려준 이름 모를 사내도 제 발밑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놀라 순간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로지 율리어스만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건조한 얼굴이었다.
“그,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이곳 길은 제가 훤합니다.”
* * *
동굴에 들어온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깥의 해조차 보이지 않기에 짐작은 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한두 시간은 아니었다.
슬슬 움직여도 되는 걸까. 언제까지 이곳에서 라울과 함께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할 수는 없을 텐데.
일리안이 라울의 말랑한 양 볼을 감싸곤 걱정스럽게 내려다봤다. 라울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라울, 춥지?”
라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매만진 아이의 양 볼은 차게 식은 제 손보다도 꽁꽁 얼어 있었다. 일리안은 제가 불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가 아닌 게 안타까웠다.
만약 자신 혼자였더라면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버틸 만큼 버티다 나갔겠지만, 라울이 있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아이가 이곳에서 열이라도 올랐다간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매한가지일 터다.
결국 잠시 고민하던 일리안은 아이에게 말했다. 감싸 쥐었던 양 볼은 내려둔 채였다.
“이곳에서 조금만 기다릴 수 있겠어, 라울? 동굴 입구에 있는 나무 장작을 가져올 테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눈을 끔뻑이던 라울은 결국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에 라울을 혼자 두고 가는 것은 걱정스러웠지만, 위험한 바깥에 같이 나갈 수도 없었다.
일리안은 자신의 롱소드를 꺼내 들었다. 캄캄한 동굴 속에서 그녀와 라울은 롱소드의 손잡이에 부착된 수정이 내는 빛으로 겨우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라울에게 건네었다. 길이 어두워져도 곧 눈에 익으면 어떻게든 앞을 찾아갈 수 있을 테니까, 자신보다도 아이에게 더 필요한 것이었다. 나무를 가져오기엔 조금이라도 짐이 없는 편이 낫기도 하였고.
대신 제 허리춤에 차인 단도는 한 번 더 확인했다. 일리안은 라울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전한 후 천천히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올 때의 좁은 입구와는 반대에 놓여 있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그 길을 얼마 걷지 않았을 때 일리안의 눈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그 빛은 크기를 키우더니 곧 바깥과 이어지는 커다란 길이 되었다.
마른 나뭇가지 몇 개만 주워서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으로 하나둘씩 나뭇가지를 주웠을 때였다. 그녀의 곁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여기 동굴이 있는데?”
“이런 조그만 산에도 동굴이 있다고? 그래도 그렇지. 설마 그 쥐새끼 같은 년이 여기로 숨어들었겠냐.”
“그래도 확인해 봐야지 않겠냐? 너 아까 봤지? 후작님이 이야길 듣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오신 거.”
“그래……. 나도 봤다. 제 핏줄 죽이는데 그런 미소 짓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
그 뒤로도 두런두런 말이 이어졌다. 일리안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눈꺼풀만 움직였다.
이야기를 나누며 사내들은 다소 설렁한 태도로 일리안이 숨어 있던 동굴 벽 뒤로 다가왔다. 입매를 굳힌 그녀가 군더더기 없이 몸을 움직였다.
“컥, 커억…….”
“여, 여기 있다! 여기 그년이 숨어……! 헉!”
2명의 사내들은 순식간에 뒤로 넘어갔다. 숨조차 참으며 급하게 움직인 일리안이 쓰러진 그들의 몸을 동굴 근처에서 치워야겠다고 결심했을 때였다.
“그렇게도 살아남고 싶나 보군.”
쓰러진 그들을 향해 뻗었던 일리안의 손이 순간 움찔했다. 깊은 바닷속에서 말하듯, 웅얼거리는 것 같은 음성은 그녀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라히텐슈. 그녀와 라울을 찾아 쫓아온 사신이 바로 그녀의 뒤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리안이 그곳을 도망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녀의 뒤로 기척 없이 다가온 1명이 목 바로 아래에 단검을 들이댔다. 얕게 베인 목덜미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래……. 네가 흥미로운 이야길 하더군. 라울 하인리히가 어떻게 라울 라히텐슈인지 증명해 보이겠다고.”
흐음, 하며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목에 칼이 닿은 일리안을 내려다보던 그는 문득 눈을 아래로 깔았다.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지.”
“…….”
“넌, 어떻게 일리안 하인리히만이 유일한 증인이던 사실을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