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질투
갑작스레 나온 라히텐슈 후작의 이름에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일리안을 바라봤다. 그런 일리안의 주변으로 사내들이 둥글게 포위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기사단을 모두 데려와라. 협상을 해야겠으니.”
“하! 협상? 아직 네 주제를 모르나 본데.”
마차가 얼마 가지 않아 멈춘 덕에 멀지 않은 곳에 에릭이 있었다. 홀로 고군분투하던 그는 이미 수적으로 월등히 차이 나는 그들에게 붙잡힌 모양인지 양팔이 뒤로 묶인 채 이쪽으로 끌려오는 중이었다.
에릭의 어깨를 비롯해 몸 곳곳에서는 그의 것인지 모를 피가 흘러나왔다. 에릭을 끌고 오던 기사 중 1명이 뒤에서 무릎 뒤를 걷어찼다. 그가 힘없이 일리안과 라울의 앞으로 굴러왔다.
자리에 주저앉은 일리안이 침착하게 에릭의 상태를 살폈다. 당장 위험하진 않아 보였지만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다.
라울은 그런 에릭의 모습에 숨을 들이켰다. 제 품속의 떨림을 느낀 일리안은 당장이라도 울 듯 숨을 헐떡이는 라울이 더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돌려 안았다.
“에릭……. 그는 돌려보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니까.”
“네년이 그딴 부탁을 할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하나?”
성큼 다가온 사내가 일리안의 뒷머리를 우악스레 잡아당겨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일리안의 무미건조한 눈빛이 사내와 맞닿았다.
고작 열일곱 살짜리 여자아이의 눈빛이라기에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사내는 아주 잠시 움찔거렸다.
일리안은 제 품 안에서 부들부들 떠는 라울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아이에게 홀로 두고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라울 하인리히. 아니, 네놈들이 바라는 말을 해야겠지. 라울 라히텐슈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얼어버린 손으로 라울의 양쪽 귀를 감쌌다. 그런다고 해서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라울이 모든 이야기를 듣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을 테지만, 조금이라도 듣지 않기를 바랐다.
라울의 성이 라히텐슈만은 아니기를 누구보다도 바랐던 것은 자신이었는데, 이제는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아들의 이름을 팔았다. 일리안은 자신의 질 낮음에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제 목숨이 아니라 라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였노라고, 그렇게 변명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조금만 더 눈치가 빨랐더라면…….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았을 터다.
“라울 라히텐슈? 웃기지도 않는군. 그분의 자식들은 모두 죽은 지 오래다!”
“멍청한 소리나 지껄이는군. 그러니 후작 휘하의 들개 이상은 될 수 있을 리가.”
“뭐, 뭐?”
“그 라히텐슈 후작이 어째서 제 사업의 정보 따위나 훔친 쥐새끼를 왜 이렇게까지 쫓는다고 생각하지? 아, 생각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건가?”
순간 당황으로 물든 사내의 눈동자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일리안은 라울의 귀를 꽉 막은 채 조금 더 그를 흔들 만한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의 아래에 있었으니 미하엘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았겠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후작이 그를 찾아다녔다는 것도.”
“…….”
“여기서 우릴 죽이겠어? 아니면, 그의 앞에 가져다줄 텐가.”
남자는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그가 후작의 눈에 띌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였다. 남자가 마음을 되돌리기 전에 일리안이 덧붙였다.
“라히텐슈 후작에게 전해라. 라울 하인리히가 라히텐슈의 핏줄임을 증명하겠다고.”
“네, 네가 뭐라고…….”
헤이븐 윈터. 혼자가 되어버린 라울 하인리히의 보호를 자처해서 맡았다는, 이유 모를 귀족 남작 영애. 그는 도대체 라울 하인리히와 헤이븐 윈터가 무슨 사이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주춤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일리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글쎄. 그저… 늙은 용병이었던 사람.”
* * *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마라!”
일리안과 라울은 라히텐슈 가문의 문장이 박혀 있는 짐마차로 내동댕이쳐졌다. 팔다리는 묶이지 않은 걸 보니 아이를 데리고선 도망칠 수 없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에릭은 사내들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상처가 심해 데려갈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니, 아마도 어딘가에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일리안은 차라리 함께 끌려가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에릭에 대해 걱정하던 일리안은 문득 제 품 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라울을 눈치챘다. 차가운 나무 바닥에 앉은 일리안이 라울과 마주 앉았다. 아이에게 몹쓸 일만 일어나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졌다.
“라울. 잘 듣도록 해.”
“…….”
“너는 라히텐슈 가문의 자식이 아니야. 네 어머니는……. 어머니는 말이다.”
“일니안 하인니히.”
“……뭐?”
“엄마…….”
고개를 숙인 채 손을 꼼지락거리는 라울은 주저했지만 확신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일리안은 작게 입을 벌렸다.
아이가 제 배로 낳은 자식이 아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상황에 휩쓸려 아이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일리안의 마음은 여전히 어딘가 불편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라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이야기할 때에 주저하지 않았던가. 그런 일리안을 다잡은 것은 다름 아닌 라울이었다.
아이는 일리안 하인리히가 제 어머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 라울, 넌 하인리히의 자식이지.”
“으응. 응!”
“그러니까 이깟 상황에 움츠러들면 안 된다. 알겠지.”
그렇게 말한 일리안은 라울을 제 품 안에 넣어 등을 토닥였다. 아이의 떨리던 몸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잠잠히 있던 일리안과 라울이 마차의 빈틈으로 사내들을 부른 것은 시간이 제법 지난 뒤였다.
“뭐야?!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쉬, 쉬야 하고 싶어요.”
“보시다시피 아이가 급하답니다. 잠시 멈춰줄 수 있습니까.”
이야기를 들어주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아이의 울상인 얼굴에 거짓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가 이곳에서 대장 격이었던 듯 얼마 안 가 짐마차와 함께 뒤를 따라오던 남자들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벌컥.
거칠게 열린 짐마차의 문밖에서 사내가 일리안과 라울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와.”
남자의 말에 라울을 안은 일리안이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였다.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밀치며 라울의 팔뚝만 우악스레 잡아당겼다.
“네년은 들어가 있어!”
“으, 흐윽…….”
“제가 없으면 아이가 많이 두려워합니다. 지금도 우는걸요.”
남자에게 붙잡힌 라울은 자유로운 한쪽 팔로 연신 제 뺨을 문질렀다. 남자가 밖으로 가기 위해 잡아당기자 라울이 가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미약한 힘으로 버텼다.
그런 라울의 멱살을 잡으려 할 때였다. 일리안이 나직이 그에게 경고했다.
“라울이 라히텐슈 후작의 자손일지도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위험한 짓은 그쯤 해두는 게 좋을 텐데요.”
그러자 남자는 멈칫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일리안의 말을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이, 무슨 일이야?!”
“저, 아이가 혼자 갈 수 없다고 우는 통에…….”
“등신 같은 새끼! 시간도 없는데 뭘 망설여?! 계집애랑 보내. 네 놈이 따라가고!”
자신보다 직급이 위였는지 혼이 난 남자는 씩씩거리며 짐마차를 거칠게 박차고 나갔다. 뒤에 남은 일리안은 라울을 안아 올린 뒤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얼굴이 무섭도록 가라앉은 채였다.
바깥에는 숲에서 봤던 인원보다 더 많은 이들이 줄지어 있었다. 햇빛에 품 안으로 숨는 라울과는 달리 일리안은 태연하게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자신을 데리러 왔던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마차는 산길을 달리고 있었는지 요의를 해결할 곳이 여의치 않아 보였다. 남자가 제 뒤에 있는 수풀을 가리키자 일리안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곳으로 향했다.
남자는 뒤돌아 있었지만 라울이 남자아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리를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리안은 라울의 바지춤을 붙잡고 옷매무새를 만지는 척을 하며 연신 곁눈질로 그를 훑어봤다.
“라울, 많이 급했어? 바지가 조금 젖었는데…….”
‘헤이븐 윈터’가 남작 영애라는 것을 아는 사내들은 손발도 묶지 않고 수풀에 데려올 정도로 그녀가 약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던 일리안이 라울의 어깨에 둘러져 있던 케이프를 끈처럼 잡아 목을 조를 줄은.
픽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정신을 잃자 일리안은 손의 힘을 뺐다. 맥박은 미약하지만 사내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일리안은 라울을 어깨에 들쳐 메듯 안고서 산속으로 달려갔다.
* * *
눈을 뜨던 에릭은 제 얼굴로 작열하는 태양빛에 눈이 부셔 순간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헤이븐과 라울을 데리고 공작성으로 출발할 때에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녘이었으니 눈이 부실 법도 했다.
공작성?
멍하니 생각하던 에릭은 그제야 모든 일이 떠올랐다. 마차를 습격한 이들이 있었고, 자신은 뒤로 빠져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라울과 헤이븐은…….
어깨를 베이던 에릭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점차 속도를 내리기 시작한 마차였다. 에릭은 이를 아득 물었다.
“라히텐슈…, 라고 했지.”
정신을 잃기 직전 에릭이 들은 것은 고작 그 이름자에 불과했다.
겨우 몸을 일으킨 에릭이 주변을 둘러보자 근방의 큰 쓰레기장인 것 같았다. 제 옷을 찢어 상처를 대강 동여맨 에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상태는 좋지 못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곧장 윈터 가문으로 달려가려던 그는 순간 멈칫했다. 윈터 가문에 간다고 해서, 라히텐슈 후작에게 잡혀갔을 헤이븐과 라울을 되찾아올 수 있을까.
그러자 놀랍게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헤이븐의 모든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라히텐슈 가문이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때문에 급하게 리하르트 공작성에 라울을 맡기려 했던 것이다.
디노와 타피아, 그리고 자신은 지켜낼 수 없을 테니.
에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누구보다도 명확히 알게 되었지만 차마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율리어스 공작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야 하는 사실이, 비참했다. 누구보다도 그녀를 지키고 싶어서 기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으, 으응? 사람이 있어? 여, 여기 사람이 있다네!”
쓰레기장에서 일을 하던 사람인지 노파가 에릭을 발견하곤 주변 이들을 시끄럽게 불러댔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있던 에릭이 노파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왔다.
“이곳에서……. 리하르트 공작성으로 가는 길이 어딥니까.”
노파에게서 대강 설명을 들은 에릭은 가까운 마구간으로 가 말을 빌렸다. 말을 타고 출발하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헤이븐이 자신에게 모든 일을 설명하고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걱정을 털어놓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으리란 것을.
그러니 그녀는 리하르트 공작성에 라울을 맡기려 했겠지. 그 사실이 고삐를 쥔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들어갈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말을 멈춰 세우지는 않았다. 자신의 그딴 자존심 때문에 그녀의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을 달리던 에릭의 눈에 익숙한 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철옹성처럼 입을 꾹 닫은 공작성의 철문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철문의 앞에는 그가 지금 누구보다도 바라는, 혹은 바라지 않을 사내가 말을 탄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율리어스 님, 더 지체하셨다간 약속 시간에 늦으실 겁니다. 헤이븐 님과 라울 님이 어떻게 되셨는지는 제가 곧장 윈터 가문으로 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왔군.”
“예?”
율리어스가 어딘가를 주시하자 그 곁에 있던 가이우스 또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점차 말의 속도를 낮추며 다가오는 에릭이 있었다.
“……도와주십시오. 헤이븐 님과 라울 님이……. 라히텐슈 가문으로 잡혀갔습니다.”
“그렇겠지.”
불길한 기운은 한 번도 나를 빗겨가지 않았으니.
나직이 중얼거린 율리어스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일이 이렇게 되리란 것을 짐작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런 율리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에릭은 몇 년 전 공작성에서 느꼈던 기이한 패배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것은 질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