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58화 (58/123)
  • 58.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헤이븐 님! 어, 어떻게 되었습니까? 율리어스 님께선 괜찮으십니까.”

    집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이우스가 말을 더듬으며 한달음에 다가왔다. 일리안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뒤부터 내내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글쎄요. 나가라고 하기에 일단 나왔습니다. 더 있다간 그 무거운 잉크통을 머리에 맞을 것 같던데요.”

    “……그렇습니까.”

    가이우스는 자신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다 일리안이 아직 앞에 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리곤 몸을 바로 세웠다. 커다란 키의 그가 곧게 서자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야만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걸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도와주실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째서요?”

    “예?”

    “어째서 제가 도와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일리안은 이번 생에 와선 가이우스와 그나마 잘 지냈다고 생각했었다. 그와는 스승과 제자로 묶이기도 했었고, 예전처럼 처음부터 싫은 감정이 있지는 않았었으니까.

    그런데도 자신이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한 질문이었다.

    “그야……. 헤이븐 님께선 일리안 님과 닮았으니까요.”

    “……또 그 이야기이십니까. 전 일리안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일리안 님은 아니시지요. 그러니 여기까지 도와주러 오셨지 않습니까.”

    일리안은 그의 말에 순간 씁쓸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그에게 나직이 말했다.

    “가이우스 씨.”

    “예, 헤이븐 님.”

    “일리안도… 율리어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틀림없이 도와주러 왔을 겁니다. 틀림없이.”

    가이우스는 그 이야기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아직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짧게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저, 그럼 라울은 언제 데리고 오면 되겠습니까?”

    “아, 그 아이 말씀이십니까. 죄송한 이야기지만 공작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율리어스 님께 보고가 들어가야만 해서, 아직은 이릅니다.”

    거기까지 말한 가이우스는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제 이름을 걸고 꼭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곧 윈터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눈인사를 한 일리안은 즉시 자리를 떠났다. 집무실 앞에서 홀로 남은 가이우스만이 그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봤다.

    “당신과 대화를 할 때마다 왜 일리안 님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헤이븐 님.”

    중얼거린 가이우스는 이내 옆으로 몸을 돌렸다. 율리어스는 더 이상 보고를 할 필요가 없으니 집무실에 들어오지 말라는 명을 내렸지만, 아무리 가이우스라고 하더라도 그를 내버려 두라는 명령에 따를 순 없었다.

    침을 삼킨 가이우스가 두꺼운 양 문을 손잡이로 노크했다.

    “……율리어스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가이우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원래였더라면 들어오지 말라는 날카로운 말과 함께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갔을 텐데, 오늘은 반응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가이우스는 침착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의자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는 율리어스가 있었다.

    “다시 보고를 올리도록, 가이우스.”

    “아…….”

    익숙한 목소리에도 가이우스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며 그를 바라봤다. 율리어스가 죽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가이우스의 눈가에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가이우스에게서 대답이 없자 그를 이상하게 여긴 율리어스가 고개를 들었다.

    “밀린 일이 많을 텐데. 언제까지 멍청하게 서 있을 예정인가.”

    “죄송합니다, 율리어스 님. 곧 보고서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이우스는 당장이라도 보고서를 가지러 가기 위해 발을 떼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 율리어스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저, 율리어스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빠르게 종이를 넘기던 율리어스가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서 있는 가이우스를 바라봤다. 아직 여윈 율리어스의 얼굴은 좋지 못했지만 그가 제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이우스는 다행스러웠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우물쭈물하던 가이우스를 향해 율리어스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헤이븐 님께서 라울 하인리히의 보호를 요청하셨습니다.”

    “라울 하인리히?”

    “예, 일리… 안 님의 아이입니다. 쫓기고 있다고 하더군요.”

    가이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일리안의 이름을 꺼내려다 순간 멈칫했다. 그의 앞에서 이름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혹시 생각나게 할까 두려운 탓이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아무렇지 않게 그 이야기를 듣다 다시 제 앞에 있는 종이로 눈을 돌렸다. 여상한 목소리가 이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데려오도록.”

    * * *

    일리안은 두터운 케이프를 두른 라울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아이를 안아 올렸다. 제 몸이 높이 올라가자 라울은 신이 난 듯 눈을 접어 웃었다.

    “라울, 라울?”

    “…….”

    “자주 보러 갈게. 내가 없어도 울면 안 된다.”

    가이우스로부터 공작성에 라울을 데려와도 좋다는 말을 들은 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일리안은 그 말을 들은 즉시 타피아와 디노를 재촉해 라울을 보낼 준비를 시작했다.

    사정을 모르는 타피아와 디노는 왜 이리도 급하게 보내는 거냐며 물었지만, 대답해 줄 새가 없었다. 언제 라히텐슈 후작이 라울을 찾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유 따위를 부려선 안 되었다.

    새벽부터 움직인 탓에 아직 바깥은 깜깜했지만 가이우스가 보낸 마차에 모든 짐을 실은 일리안은 라울의 손을 잡고 저택을 나섰다.

    디노와 타피아가 배웅을 하기 위해 그 뒤를 따랐다. 옷을 챙겨 입은 에릭 또한 말없이 라울의 뒤에 선 채였다.

    “그럼 타피아, 디노. 라울을 데려다주고 올게. 추우니까 어서 들어가 봐.”

    “라울 님과 정이 든 참인데 이렇게 가시다니요……. 라울 님, 잘 지내실 수 있지요?”

    “응, 타퍄.”

    말랑한 볼이 흔들리도록 고개를 끄덕인 라울이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라울의 손을 맞잡고 있던 일리안은 아이가 조금 불안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예 가는 게 아니라니까, 타피아. 라울은 곧 돌아올 거야. 그렇지, 라울?”

    그 말에 라울이 제 옆에 있는 일리안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울로선 자주 보여주지 않는 웃음이었다.

    라울을 지켜보던 디노는 처음 보는 커다란 웃음에 제 심장을 붙잡았다. 라울의 웃는 모습은 퍽 사랑스러웠다.

    “에릭 경, 그럼 부탁드릴게요. 디노 경은 분재원에 가보셔야 해서…….”

    “괜찮습니다. 헤이븐 님과 라울 님은 제가 안전히 데려다줄 겁니다.”

    일리안과 라울이 탄 마차의 문을 닫던 에릭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녀를 호위하는 일은 최근 들어 에릭에게 전임되었기 때문에 그는 마차의 뒤에 있던 제 말에 올라탔다.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가 낮게 흔들리자 일리안은 라울을 제 무릎 위로 앉혔다. 사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아이의 체온으로나마 걱정을 덜고 싶었다.

    그때였다. 라울이 조그만 손바닥으로 일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울?”

    “헤입븐. 울지 마라요.”

    “하하. 라울, 내가 우는 줄 알았어? 미안하지만 난 울지 않는걸.”

    자신을 위로하는 라울이 기특해 일리안은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라울이 짧은 팔을 뻗어 일리안의 목을 감싸 안았다. 아이 특유의 말랑한 뺨이 와 닿았다.

    공작성으로 아이를 보내기만 하면 안전할 터다. 라히텐슈 후작도 감히 리하르트 공작성에 사람을 보낼 생각은 하지 못할 테고, 그러다 조금 잠잠해지면 다시 라울을 돌볼 수 있으리라.

    그러면……. 어쩌면 라울과 자신도 이제는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언제 라히텐슈 후작에게 라울을 뺏길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다.

    일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마차에 난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릭?”

    “……헤이븐. 바깥이 심상치 않아.”

    “뭐?”

    말을 타고 마차와 속도를 맞춰 움직이던 에릭은 앞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리안은 에릭의 말에 순간 바깥으로 눈을 돌려 상황을 살폈다.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아. 마차 밖으로 고개 내밀지 마!”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피려던 일리안은 에릭의 엄명에 흠칫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를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 자신의 무릎 위에는 라울이 아무것도 모르고 앉아 있었다. 아이를 무사히 공작성까지 보내는 게 바로 제가 할 일이었다.

    “마부에게 속도를 올리라는 신호를 보냈어. ……나는 곧 뒤따라갈 테니 먼저 가도록 해.”

    “뭐? 그럼, 너는.”

    “걱정 마. 곧 따돌리고 따라갈 테니까.”

    일리안이 무어라 말을 붙이려는 순간, 마차의 속도가 갑작스레 올라갔다. 점차 뒤로 빠지는 에릭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창밖으로 고개를 빼려던 일리안은 에릭의 단호한 말이 떠올라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다.

    “저곳이다! 저 마차 안에 라울 하인리히가 있다! 커억…….”

    “멈추지 말고 가십시오! 곧 따라가겠습니다!”

    에릭이 마부에게 전하는 목소리에 일리안은 조심스레 라울의 양쪽 귀를 손으로 감쌌다. 라울은 의아한 눈으로 일리안을 올려다봤다.

    제발, 공작성까지만 갈 수 있다면.

    공작성에 있는 경비병들 또한 가이우스에게 언질을 받아두었을 테니 자신들을 도와줄 터였다. 일리안이 초조한 얼굴로 무릎에 앉은 라울을 당겨 안았을 때였다.

    퍼억.

    바로 옆에서 난 소음에 일리안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바로 옆으로 화살 하나가 마차의 벽을 반쯤 뚫고 나와 있었다.

    일리안은 그 즉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움직이는 마차의 뒤를 바라봤다. 에릭이 홀로 제법 많은 수를 잡아두고 있었지만, 그로서는 역부족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안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에릭!”

    에릭의 어깨로 누군가 칼을 휘두르자 피가 솟구쳤다. 일리안에게선 거리가 제법 되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흩뿌려진 피만큼은 확연히 보였다.

    그를 걱정할 새도 없이 에릭이 미처 잡아두지 못한 사내들이 말을 타고 마차를 맹추격하기 시작했다. 마차는 빠른 편에 속했지만 몸이 가벼운 사내들에게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마부에게 말을 전했다. 마부는 그녀의 명령을 듣고 순간 입을 벌렸지만, 상황을 체감하고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질주하던 마차가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섰다.

    말을 타고 달려오던 사내들이 마차를 둘러싼 것은 순식간이었다. 일리안은 라울을 안고서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다.

    “네가 헤이븐 윈터냐?”

    “그렇다면?”

    “그럼, 안고 있는 그 아이가 라울 하인리히겠군. 걱정 마라. 어린아이니 고통스럽지 않도록 한 번에 보내주지.”

    남자는 커다란 은혜라도 베푼다는 듯 미소 지어 보였다. 곧이어 일리안과 라울의 머리 위로 검이 드리워졌다.

    “……라히텐슈 후작께서는, 이 아이가 일리안 하인리히의 아이라던가?”

    “뭐?”

    일리안의 나직한 말에 남자는 잠시 멈칫했다. 검을 멈춘 그가 아이를 안은 그녀를 내려다봤다.

    “아니, 후작께서도 이미 아시고 계실 테지.”

    라울의 아비인 미하엘은 후작이 자신을 찾을까 두려워 그 누구에게도 아이가 생겼노라 말하지 못했다고, 편지에 적어 보낸 적이 있었다.

    때문에 라히텐슈 후작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라울이 자신의 핏줄인지, 아닌지.

    “그러니 그 칼은 치우는 게 좋을 텐데. 네가 따르고 있는 후작의 손자를 죽이고 싶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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