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57화 (57/123)

57. 단 하나뿐인 당신에게

일리안은 가이우스의 참담한 이야기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도대체 왜, 고작 자신 때문에 그리도 힘들어한단 말인가. 일리안 하인리히는 단지 아이가 있는 늙은 용병일 뿐일 텐데.

미묘한 침묵이 맴돌 때였다. 주방으로 차를 가지러 떠났던 타피아가 돌아와선 무릎 꿇은 가이우스를 보고서 잠시 멈칫했다.

일리안도 그 기색을 눈치채곤 먼저 가이우스의 팔을 잡아 그를 일으켰다. 파리한 안색의 가이우스가 그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에 차를 준비해 두었어요, 헤이븐 님.”

타피아의 안내로 가이우스와 일리안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간소한 테이블 하나를 두고 자리에 마주 앉은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일리안이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가이우스 씨, 제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공작 전하로부터 출입을 금지받았습니다. 그가 제 이야길 듣는 것조차 싫어하지 않습니까.”

이번 생의 일리안 하인리히의 운명을 비튼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제 과거라 하더라도 결국엔 자신이 죽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물론, 이전 생에서 라울을 허무하게 보낸 뒤 내내 아이를 그렇게 보낸 것을 후회했다. 죽을 기회가 생겼을 때에는 이렇게 아이를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반항 한번 하지 않고 강 속으로 몸을 던졌을 정도로.

“무엇보다도 가이우스 씨도 마탑에서 보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율리어스 님의 소식을 듣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다는 것을요.”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율리어스가 안타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가이우스가 간절히 부탁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자신은 그에게 있어 일리안 하인리히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자신은 죽어도 이루어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일리안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를 구해낼 수 있을 거란 자신이 들지 않았다.

“아닙니다, 헤이븐 님. 그건 틀린 이야깁니다.”

여태까지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가이우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부쩍 피로한 얼굴의 그가 일리안의 눈을 응시했다.

“제가 아는 율리어스 님께선, 마음에 들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직접 처리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 언젠가 헤이븐 님의 데뷔탕트에서 헤이븐 님을 모욕하던 자작 부인을 대했을 때처럼.”

차가운 겨울바람과 눈을 맞으며 저택에 왔지만, 그는 타피아가 준비한 따뜻한 차는 입조차 대지 않았다. 가이우스에게 있어 지금 나누고 있는 얘기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정말로 헤이븐 님이 싫어지셨다면 마차 앞에서 그분은 당신께 직접 이야기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요.”

가이우스가 느릿하게 목울대를 움직여 침을 삼켰다. 잠시 이야길 멈췄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헤이븐 님께서 다가가면 살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작게 움찔거린 일리안은 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어째서,”

“불편한 말씀일지도 모르나, 헤이븐 님께선 일리안 님과 몹시도 닮으셨습니다. 율리어스 님께선 헷갈리실 테지요. 하지만 전 오히려 헤이븐 님이 있어 다행스럽습니다.”

“…….”

“일리안 하인리히 님이셨다면 율리어스 님께서 죽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미 수도를 떠나계셨을 테니까요.”

말을 마친 가이우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일리안 하인리히를 싫어하던 이유는 단지 그 한 가지뿐이었다. 아마도 일리안 하인리히의 안중에 율리어스는 조금도 있지 않을 테니까.

그분께선… 그녀를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이우스가 처음 율리어스의 밑에 들어와 일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은 일리안 하인리히라는 여자에 대해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리는 것이었다.

매일 죽은 것 같던 그는 일리안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터다. 기뻐하는 율리어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일리안 하인리히의 직업은 용병이었고, 제법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그녀가 늘 고수익에 위험이 많은 의뢰를 선택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율리어스는 일리안 하인리히가 속해 있던 푸른 새벽 용병단을 사들였다. 푸른 새벽 용병단이 그 근방에서 가장 큰 용병단이 되는 데에는 아마도 율리어스가 큰 몫을 차지했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용병단장인 팔레스타인은 주기적으로 가이우스에게 연락을 전했다. 그는 단지 그것을 하는 것만으로도 매번 상당한 돈을 벌어갔다.

그녀가 위험한 임무에 들어갈 때마다 율리어스가 용병단으로 사람을 보냈다는 것을, 일리안 하인리히는 죽기 전까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저 동정이라도 좋습니다. 제발, 율리어스 님을 살려주십시오.”

가이우스는 고개를 숙이며 필사적으로 부탁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일리안은 잠시 테이블 바닥을 보며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공작성으로.”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헤이븐 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도 가이우스 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일리안은 가이우스가 저택에 찾아온 뒤부터 많은 고민을 했다. 그에게 과연 이런 부탁을 해도 될지,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 부탁을 드리기 위해 율리어스 님을 돕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또한 율리어스가 신경이 쓰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실 부탁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일리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잠시만……. 며칠이라도 좋으니 공작성에서 라울을 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라울이라면…….”

“라울 하인리히. 일리안 하인리히의 아들입니다.”

가이우스가 작게 입을 벌렸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온 탓이었다.

“그분의 아들이 왜 이곳에…….”

“제가 맡았습니다. 그녀를 대신해서요.”

“그럼, 왜 공작성에 맡기시려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헤이븐 님께서도 아시듯 저와 율리어스 님은… 일리안 하인리히 님의 아들을 그다지 반기지 않습니다.”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마는, 좋은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율리어스에게 있어선 일리안 하인리히를 죽게 한 원인이었고, 가이우스에겐 내내 싫어하던 이의 자식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라울을 공작성에 맡기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리안은 그런 가이우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라울이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요.”

“그렇다면……?”

“하지만 라울이 쫓기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저택에선 아이를 지켜내지 못할 겁니다.”

라히텐슈 가문이 어떤 목적으로든 라울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저택에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철옹성이라 불리는 리하르트 공작성은 달랐다.

비록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아이의 안전만은 지켜낼 수 있으리라. 때문에 일리안은 결단을 내렸다.

“아이가 지낼 수 있는 작은 방이면 됩니다. 율리어스의 눈에 띄지 않아도 좋습니다. 단지… 그 아이가 안전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습니다.”

* * *

일리안은 무거운 얼굴로 제 앞에 있는 커다란 철문을 바라봤다. 바로 리하르트 공작성으로 들어가는 철문이었다.

몇 번이고 들락거렸던 곳이지만 이런 기분으로 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직도 가이우스가 말한 것처럼 율리어스에게 있어서 헤이븐 윈터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믿기지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자신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가이우스에게 이미 이야길 들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일리안은 굳게 닫혀 있는 철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구십니까?”

“……헤이븐 윈터입니다.”

“가이우스 님께서 말해두셨던 분이로군요. 곧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의 경비병들은 철저히 신분을 확인하는 듯 연신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나마 가이우스가 언질을 해둔 모양인지 공작성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성의 내부는 곧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였다. 고용인도 제법 나간 모양인지 다니는 사람이 몇 없는 공작성은 깨끗하긴 했지만 어딘지 을씨년스러웠다.

일리안은 율리어스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집무실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계단이 오늘은 어쩐지 유난히 길어 보였다.

가이우스는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은 그 자신조차도 허락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때문에, 집무실에 들어가려거든 노크를 하지 말라는 첨언을 붙였다.

집무실 앞에 도착한 일리안은 그의 말대로 문을 두드리지 않고 느리게 문 하나를 밀어 열었다.

“그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율리어스는 의자 뒤에 나 있는 커다란 창 앞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에 꼭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꺼져라, 가이우스.”

그 순간 테이블 위에 있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잉크통이 허공으로 떠올라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머리를 맞는다면 치명상일 물건이 아무렇지 않게 던져졌다.

일리안은 몸을 움직여 아슬하게 그것을 피해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잉크통이 벽을 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런 걸 사람한테 던지면 씁니까.”

나직이 중얼거리자 그 순간 율리어스가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은 고작 1달이었다. 마탑에서도 스쳐 지나가듯 보았지만 거리가 제법 되어 가까이서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몹시도 메말라 있었다.

여윈 볼과 푹 꺼진 눈두덩이는 죽은 자의 것 같았다. 신이 내린 외모라고 일컬어지던 율리어스는 지금도 그 미색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조금도 생기가 없었다.

“네가, 왜.”

일리안은 그가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다가갔다. 순식간에 율리어스의 앞에 도달한 일리안이 긴 소매 속에 가려져 있는 팔을 잡아 꺼냈다.

그곳엔 돋아 있는 핏줄과 함께 후벼 파진 자국이 가득했다. 단순히 손목을 그은 게 아니라, 정말로 죽기 위해 완전히 찔러 넣었던 것이다.

그녀가 말없이 그것을 내려다보던 순간이었다.

“두 번 다시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율리어스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턱을 들어 올렸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일리안을 내려다봤다.

“우습게 들리던가? 죽여 버려야 했었다는 내 말이.”

그의 눈은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어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로 삶을 포기한 자처럼.

머리채를 잡힌 채 텅 빈 율리어스의 눈을 응시하던 일리안이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한 손을 주먹 쥔 그녀가 빠르게 그의 배를 찔렀다.

퍽, 사람의 배에 손이 부딪쳤다고는 믿기지 않을 소리가 나자 일리안은 눈을 찡그리며 손을 털었다.

“망할, 더럽게 딱딱하네.”

“……뭐?”

“더럽게 딱딱하다고요. 정신 차리라고 때렸더니 내 손만 아프잖아.”

아직도 그의 손에 머리채를 잡혀 있던 일리안은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제 손만 탈탈 털었다. 그녀의 뻔뻔한 태도에 율리어스가 멈칫하자 은근슬쩍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제가 그랬잖습니까. 마음에 안 들면 달에게 욕이라도 하라고. 망할, 하면서.”

율리어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그녀를 구하러 갈 수 없도록 방해한 헤이븐 윈터를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런다고 돌아올 줄 아십니까. 스무 살이나 되었으면서 왜 이렇게 어리게 굽니까?”

“그럼, 묻지. 내가 더는 죽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살아 돌아오나.”

머리채를 잡히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은 일리안이 그의 질문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율리어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글쎄요. ……아마도 그건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째서 살아야 하는 건가.”

“바라지 않을 겁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율리어스는 그녀를 죽게 만든 헤이븐 윈터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순간 주먹을 꽉 쥘 정도로.

그러나 제 앞에 있는 헤이븐 윈터의 말을 듣고 싶은 건 어째서인가.

일리안 하인리히가 살아 돌아와 제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입을 여는 모양새도, 머리칼을 다듬는 손길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가끔은 미쳐 버렸으면 할 때조차도 멀쩡한 제 정신이, 자꾸만 이 여자를 일리안 하인리히라 생각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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