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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56화 (56/123)

56. 죽음조차도

미하엘 라히텐슈. 그것은 그의 원래 이름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 도망친 그는 반항 한 번 못 해본 자신이 한심스러워 용병 일을 선택하게 되었노라고,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름은 리에나 세이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일리안.”

아마도 싯투르 공국의 전쟁에 참여하기 한참 전이었을 터다. 어느 날 그가 푸른 눈의 예쁜 여성을 데려온 것은.

그가 제 머리를 긁적이며 여자를 소개시켜 주는 모습을 다른 용병들이 봤더라면 ‘일리안이나 졸졸 따라다니던 놈이 대체 언제 여자를 만났느냐’며 놀려댔겠지만, 애석하게도 그곳엔 일리안밖에 없었다.

“하하. 이야긴 가끔 했지만 보는 건 처음이지? 리에나, 인사해. 이쪽은 내 소중한 친구.”

“반가워요! 리에나 세이버랍니다.”

“반갑습니다. 종종 이야기로 듣기는 했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실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요.”

일리안이 말쑥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손을 바라보던 리에나가 살풋 웃으며 맞잡았다.

“듣던 대로 평범한 분은 아니시네요.”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지, 리에나? 내가 가끔 그랬잖아. 일리안은 뭐랄까……. 성별을 떠나서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어.”

미하엘과 리에나는 유난히 일리안을 따랐다. 어쩌면 둘의 성격이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럼, 일리안. 이번 의뢰는 수도로 가는 거야?”

“어. 수도에 있는 공작 가문에서 들어온 호위 의뢰라.”

“기간은 얼마나?”

일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기간은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을 전했다. 미하엘도 그때 즈음에는 다른 의뢰가 있었기 때문에, 일리안과는 그 후로 1년간 만날 일이 없었다.

둘이 다시 만난 것은 싯투르 공국의 전쟁터에서였다.

“……미하엘? 네가 왜 전쟁터에……. 분명 몇 달 전쯤에 리에나와 아이가 생겼다고 편지를 보냈었지 않냐. 곧 아버지가 될 놈이 이런 위험한 곳에는 뭐 하러 온 거야.”

“일리안…….”

전쟁터에서 만난 미하엘은 어딘지 몹시도 지쳐 있었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곧 아이를 얻을 행복한 아버지라고 보기엔 힘들었다.

“내 아버지가, 나를 쫓고 있어.”

“뭐?”

입술을 덜덜 떠는 미하엘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는 떨리는 제 손을 맞잡으며 일리안에게 털어놓았다.

“동생이… 죽었다는 모양이야. 그래서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돌아가면 난 죽게 될 거야! 아버지는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니까.”

“미하엘, 그게 무슨…….”

“배 속에 아이가 있는 리에나를 계속 쫓겨 다니게 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나 홀로 아버지가 찾지 못하실 만한 곳으로 온 거야. 바로, 이 전쟁터에.”

미하엘은 그간 힘들었던 모양인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적어도 리에나가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르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말없이 그의 등을 두드린 일리안은 그날부터 미하엘과 함께 위험한 작전에 나가야만 했다. 본디 전쟁터에 고용된 용병이란 최전방에 배치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미하엘도, 그리고 일리안도 노련한 용병이기는 했지만 전쟁터에서만큼은 달랐다. 그들보다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기사들도 수두룩하게 죽어가는 곳이 바로 전쟁터였으니까.

그래서였다. 복잡한 전쟁 속에서 일리안과 미하엘이 함께 적진에서 보낸 폭발 마법을 맞은 것은.

“미하엘. 미하엘, 정신 차려! 네 아이를 보러 가야 할 것 아니야!”

“일리안……. 어쩌지? 아직 리에나와 아이의 이름도 정하지 못했는데…….”

일리안은 다행히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해진 정도였지만, 미하엘은 심장 부근을 맞아 목숨이 위험했다. 일리안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 탓에 팔로 제 몸을 질질 이끌고 그에게 다가갔다.

“일리안, 만약 내 아이를 만나게 된다면… 라울이라고 불러줘. 그리고 네가 여유롭다면, 리에나를 부탁해. 절대, 절대 그 아이의 성이 라히텐슈가 되어서는 안 돼…….”

미하엘이 죽고 난 뒤 일리안은 홀로 리에나를 찾아갔다. 그녀에게 미하엘이 남긴 유품과 유언을 전해주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미하엘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제 물건 속에 몰래 리에나가 숨어 있는 곳이 적힌 쪽지를 적어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적힌 산골짜기를 찾아간 일리안은 초라한 통나무집을 찾을 수 있었다.

“리에나? 리에나, 여기 있습니까?”

그곳엔 누군가 머물렀던 모양인지 여러 아이 용품들과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일리안이 하나밖에 없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망할…….”

방안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핏자국이 가득했다. 아마도 옷이었을 찢어진 천을 주워 든 일리안은 직감적으로 리에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다급히 산장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흐으……. 흐어엉…….”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그녀는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 일리안은 방 한구석에 잠겨 있는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커다란 나무 상자는 오래된 것인지 여러 부분이 조금씩 부서져 미세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네가 라울이구나.”

제 검으로 자물쇠를 내려쳐 부순 일리안이 상자를 열자 두툼한 이불로 감싸진 채 삑삑 울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미하엘의 금발 머리와 리에나의 푸른 눈을 쏙 빼닮은 아이였다.

“울지 않고 잘 버텼네.”

아이가 용케 산 것은, 아마도 필사적으로 아이를 숨긴 리에나가 쫓아온 이들로부터 대신 죽어간 덕분일 터다. 일리안은 부모의 희생으로 살아난 라울이 가엾고도 대견스러워 조심스레 아이를 품에 안았다.

“라울 하인리히. 그래, 네 성은 하인리히로 하자.”

세이버라는 성은 이미 라히텐슈 후작가의 귀에 들어갔을 테니까. 일리안은 그 순간 아이를 제 아들로 키울 것을 결심했다.

* * *

그 뒤로 라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면 다행이었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 다니던 일리안은 종종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남작 가문으로부터 우연한 기회에 받게 된 임무가 바로 라히텐슈 가문에 잠입하는 일이었다. 라울을 안전한 곳에 맡겨둔 일리안은 후작이 설마 미하엘의 아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제 발로 그곳에 들어갔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후작 가문에선 라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렇게 안심했다. 후작가에 쫓겨 다닐 때에도 그저 정보를 훔친 대가이니 조금만 참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안일했지.”

느리게 한숨을 내쉰 일리안이 아기용 침대에 누워 잠이든 라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 배로 낳은 자식은 아니었으나 키운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라울은 더 이상 죽은 친구의 자식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일리안은 안쓰러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윈터 가문은 작은 남작 가문이기 때문에 평민들 사이에선 널리 알려진 이름이 아니었지만, 귀족 가문에선 최근 들어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니 아마 라히텐슈의 사람들이 윈터 저택의 위치를 아는 것도 그리 먼일은 아닐 터다.

라울을 다른 곳에 맡기는 게 좋을까.

윈터 가문은 곧 노출될 것이었고 제대로 된 기사단도 없는 이곳에선 아이를 지켜낼 수 없었다. 그것이 지방에서 막강한 권세를 지니고 있는 라히텐슈 가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어디에 맡긴단 말인가? 일리안은 자신이 믿고 맡길 만한 이들을 떠올렸다. 주변에 사람을 두지 않는 그녀가 도움을 청할 이라곤 1명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라히텐슈 가문은 수도 귀족이 아닐 뿐 지방에선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가문과 척을 지고도 무사할 귀족은 수도에서도 몇 되지 않았다.

아니, 생각나는 곳이 하나 있지만 그곳은…….

일리안이 무거운 얼굴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라울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타피아가 그녀를 불렀다.

“헤이븐 님, 아직 여기 계시나요?”

“어, 타피아. 무슨 일이야?”

“저……. 밖에서 어떤 분이 헤이븐 님을 찾으세요.”

“날? 이렇게 늦은 밤에?”

조용히 라울의 방문을 닫고 나온 일리안이 미간을 좁혔다. 타피아 또한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신데……. 디노 경과 에릭 경은 연무장에 가셔서요.”

일리안은 처음 보는 이라는 말에 순간 얼굴을 구겼다. 설마, 라히텐슈의 사람들이 벌써부터 왔다면.

방금 전 라울과 밖에 나가서 보고 온 기사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수십이 넘어 보였다. 윈터 저택에 있는 에릭과 디노,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기지 못할 수였다.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일리안은 차분히 제 단도를 허리춤에 매달았다. 타피아는 그런 제 주인의 모습에 순간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조용히 일리안을 따라갔다.

아직 손님은 저택 안으로 들어오진 않은 모양인지 타피아는 입구로 그녀를 안내했다. 짙은 갈색의 양문 사이에선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일리안이 느릿하게 저택의 양문 중 하나를 조금 밀어 바깥을 바라봤다.

“가이우스 씨?”

“헤이븐 님.”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가이우스의 커다란 체구가 꽉 들어찼다. 일리안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조금 열었던 문을 활짝 열어 그를 반겼다.

밖에선 눈발이 조금 날리고 있었는지 가이우스가 제 어깨를 탁탁 털며 안으로 들어왔다. 타피아는 그런 가이우스를 바라보다 차를 내오겠다며 먼저 주방으로 사라졌다.

“이런 밤중에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더군다나 가이우스 씨가 홀로 공작성을 비우시다니…….”

가이우스가 율리어스의 명령이 있거나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면 홀로 움직이는 일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가이우스와 자신이 말을 섞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던 율리어스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그의 독단적인 행동일 게 분명했다. 일리안이 알고 있던 전생에서의 가이우스라면 죽어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헤이븐 님.”

쿵.

그 순간, 가이우스가 일리안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무릎을 꿇자 바닥이 부서질 듯 큰 소리를 냈다.

“가이우스 씨, 왜…….”

일리안이 놀란 얼굴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어서 일으키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봤다.

가이우스는 퍼석하게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율리어스 님을……. 살려주십시오.”

그는 초조한 얼굴로 제 큰 손을 깍지 껴 마주 잡았다. 자세히 보지 않았을 때는 몰랐지만, 그의 얼굴이 율리어스만큼이나 상해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어서세요. 그러고 나서 들어도 늦지 않습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헤이븐 님. 지금 당장이라도, 이미 늦었을지 모른단 말입니다……!”

가이우스는 일리안의 말에 제 속에 있던 무언가가 터져 버린 모양인지 양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더없이 단단해 보이던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이자 일리안은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리안 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

어쩌면 자신이 비튼 운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리안은 씁쓸한 얼굴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안 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율리어스 님께선 수십 번이 넘도록 목숨을 놓았습니다.”

“목숨을, 놓았다면.”

“칼을 들어 손목을 찌르고, 가장 위험한 독을 가져와 죽으려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분께서 직접 밧줄을 매달아 목을 걸려고 하셨습니다.”

가이우스의 뺨 위로 느릿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분께선 완전한 인간의 몸이 아니지요. 손목에서 피가 터져 나오도록 칼을 찌르고, 인간이라면 몇 초 만에 즉사할 독을 먹고도 살아남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율리어스 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율리어스는 너덜거리는 제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움푹 팬 뺨과 말라붙은 입술로 중얼거렸다.

“나는, 죽음조차도 일리안의 곁에 가지 못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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