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55화 (55/123)

55. 푸른 눈의 아이

마탑의 경매가 끝났을 때에는 먹구름 사이로 눈송이가 날리고 있었다. 마탑 밖으로 나온 리트릭이 눈송이를 맞고는 호들갑을 떨며 제 어깨를 털어냈다.

“으으, 우산도 안 가져왔는데! 옷 젖겠다. 헤이븐! 어서 마차로 가자.”

이미 많은 귀족들이 마차를 타고 왔는지 수십 개의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리트릭은 그중에서도 제 가문에서 가져온 마차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리트릭이 여상한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공작 전하께서는 시간 재생기를 왜 구매하셨을까? 내가 볼 땐 그건 아무리 봐도 사기 같던데.”

“……글쎄.”

“뭔가 후회스러운 일이라도 있으셨나. 공작 전하가 제국 내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부모님도 알지만 돈을 마구잡이로 쓰시지는 않거든.”

리트릭은 자못 궁금하다는 어조로 중얼거리며 마차에 올라탔다. 일리안도 그를 따라 마차의 간이 계단을 밟고 타려는 참이었다.

“헤이븐 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일리안은 마차를 타려다 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엔 다급하게 뛰어온 거구의 남자가 있었다.

“헤이븐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가이우스. 오랜만이군요.”

“저, 혹시. 바쁘십니까?”

뜬금없이 물어오는 질문에 일리안은 눈을 끔뻑거리다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순간 안색이 밝아진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가이우스.”

그의 뒤에서 나직한 부름이 들려왔다. 가이우스의 주군인 율리어스였다.

가이우스는 순간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일리안과 율리어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율리어스는 가이우스의 앞에 선 일리안을 꼭 없는 사람인 것처럼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에게 일갈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일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관두어라.”

“……죄송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율리어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먼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가이우스는 눈썹을 내리며 율리어스의 등을 바라보다 일리안에게 낮게 말했다.

“헤이븐 님. 나중에……. 나중에 따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얼마든지요. 그러니 지금은 어서 가보셔야겠습니다.”

“꼭…….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상스레 자꾸만 강조하던 가이우스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먼저 떠난 율리어스를 따라갔다. 그의 등을 바라보던 일리안 이상스러운 불길함에 뛰어대는 제 심장이 낯설어 가슴팍을 문질렀다.

* * *

윈터 가문에서 저녁 식사는 일리안 홀로 먹는 게 보통의 일상이었다. 처음 헤이븐 윈터가 되었을 때 일리안은 타피아와 디노에게 함께 식사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그것을 단칼에 거절한 것은 타피아였다.

아무리 그래도 제 주인과 식사를 함께 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일리안은 타피아가 말한 귀족의 예절은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순순히 그것을 따랐다. 그들의 마음이 편하다면 일리안 그 자신은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식사는 늘 혼자가 되기 일쑤였다. 타피아와 디노가 곁을 지켜주긴 했지만 일리안은 자신이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내내 곁에서 지켜만 보는 것이 불편해 그것만큼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것이 바뀐 것은 라울이 온 이후였다.

“라울, 입에 있는 건 다 먹고 물을 마셔야지.”

“어머. 헤이븐 님, 마저 식사하세요. 이러다 한 입도 못 드시겠어요. 디노! 라울 님이 스푼을 떨어트리셨어. 새로 하나 부탁해.”

“어, 알겠어. 하나면 돼?”

너른 테이블 위에서 일리안의 맞은편에 앉은 것은 라울이었다.

그러나 일리안이 라울의 식사를 보느라 제 음식은 신경 쓰지 못하자, 보다 못한 타피아가 손수 라울의 옆에 앉아 아이의 식사를 담당했다.

디노는 얼떨결에 타피아를 따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재빨리 그것을 가져오는 일을 맡게 되었다.

넓은 저택에 있는 사람이라곤 3명밖에 없었다. 때문에 조용하기 짝이 없던 윈터 가문의 저녁 시간은 최근 들어 제법 떠들썩해졌다. 물론 그 중심에 선 라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러 음식을 맛보기 바빴다.

일리안은 그런 라울을 보며 내심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후작가에 쫓겨 다니기 바빠 아이에게 새로운 음식을 먹이긴 힘들었는데, 라울이 제 입맛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런 라울을 지켜보던 일리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타피아와 디노에게 말했다.

“라울을 윈터 가문으로 입양할 생각이야.”

“네?!”

“예? 설마, 헤이븐 님의 아들로 말입니까?!”

뜬금없이 튀어나온 아들이라는 이야기에 일리안은 들었던 포크를 내려뒀다. 음식은 아직 반도 채 먹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설명을 하는 것이 먼저였다.

“무슨 소리야. 라울과 나는 고작 열두 살 차이라니까. 내 동생으로 입양할 예정이라는 뜻이지.”

“아…….”

그제야 이해되었다는 듯 디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타피아도 그 결정에 반대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무언가 걸렸는지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헤이븐 님께선 아직 성인이 되지 않으셨는걸요? 윈터 남작위도 제대로 계승받지 못하셨고…….”

“어. 그래서 정식 입적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난 뒤에. 어차피 1년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

“어머. 헤이븐 님이 벌써 곧 성인이 되시다니요.”

“아무튼, 라울은 내 동생이 될 예정이야. 그러니까 모두 잘 부탁해. 라울?”

일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볼이 빵빵하도록 무언가 먹기 바쁜 라울을 부르자 아이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입가에 묻은 소스 자국에 일리안이 작게 웃었다.

“인사해야지. 앞으로 함께 지내게 될 사람들이야.”

“…….”

라울은 입을 꾹 다문 채 제 주변을 둘러봤다. 양옆에는 디노와 타피아가 붙어 라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주간 윈터 저택에 지내며 디노와 타피아, 그리고 라울은 서로에 대해 점차 알아갔다. 라울이 아이치고는 말이 없는 편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기에 그들은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안녕, 디노오. 타퍄.”

“어?”

“제, 제 이름을 부르신 거예요? 라울 님?!”

라울은 일리안이 갑작스레 데려온 아이였다. 때문에 디노와 타피아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라울이라는 존재에 아이를 낯설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라울은 낯가림이 심하고 조용할 뿐,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울며불며 떼를 쓰는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소심하게 옷자락을 당기며 부탁하는 라울은 순식간에 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외려 우물쭈물하는 그 모습이 가엾어 보여 최근 들어서는 디노와 타피아가 먼저 라울이 좋아할 만한 것을 사 오기 바쁠 정도였다.

그런 라울이 처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준 것이었다. 일리안도 라울의 귀여운 목소리에 놀라 눈을 끔뻑이며 아이를 바라봤다.

“응……. 디노 좋아. 타퍄 좋아.”

“어머, 어머머!”

타피아가 제 입을 가리고 놀라는 사이 디노는 이미 라울을 꼭 껴안고 제 뺨을 비비고 있었다. 아이의 푹신한 빵처럼 말랑한 볼이 디노에 의해 한껏 구겨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리던 라울의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서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일리안은 그것을 눈치채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디노, 잠…….”

“라울 님!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십시오! 제가 월급을 털어서라도 사다드릴 테니……!”

“흐으……. 흐어엉…….”

가만히 있던 라울이 병아리가 눈물을 흘리듯 턱을 위로 올리고 울기 시작했다. 그제야 디노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라울에게서 떨어졌다.

라울은 또래에 비해 잘 울지 않는 편이지만 한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그치기가 어려웠다. 일리안이 순식간에 라울에게 다가가 아이를 안아 올렸다.

“디노. 수염 자국이 있는데 아이의 뺨에 문지르면 안 되지.”

“예? 아, 그래서……. 죄송합니다…….”

디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일리안은 한 손으로 라울을 안은 채 나머지 손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능숙하게 둘을 달랬다.

“라울. 라울?”

연신 아이를 불러봤지만 한쪽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라울은 일리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숨이 넘어가도록 울기 바빴다. 일리안은 이름을 불러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이 통하지 않자 다른 방도를 세웠다.

“라울. 우리, 밖에 나갔다 올까?”

“네? 헤이븐 님, 지금은 해가 졌는걸요?”

“알아. 이 앞에 잠깐 산책만 다녀올 테니까, 걱정은 넣어둬.”

라울은 밖에 나갔다 오자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던 라울이었으니 내내 저택에만 있는 것보다는 밖이 더 익숙할 터였다.

일리안은 순식간에 눈물을 그치고 제게 집중하는 라울의 모습에 픽 웃었다. 그리곤 타피아에게 라울과 자신의 겉옷을 부탁했다.

“에릭 경이라도 데리고 가시는 건…….”

“아아, 됐어. 저택 앞에만 잠깐 다녀올 거야.”

타피아가 입혀주는 겉옷을 입은 일리안이 아이의 어깨에도 두툼한 어린이용 케이프를 둘러줬다. 간단히 나갈 채비를 마치자 라울이 눈에 띄게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택의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길가에 깔린 눈에 라울이 넘어질까 싶던 일리안은 아이를 안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윈터 가문의 저택은 황궁과 가깝지는 않았지만 수도에서 제법 이름 있는 거리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해가 지자 거리에는 근방의 저택들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날이 춥기 때문에 일리안도 라울을 안고 멀리까지 갈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도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하는 라울이 만족할 만큼만 거리를 걷다 다시 저택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라울을 품에 안은 일리안이 천천히 해가 진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윈터 가문은 어디 있지?”

“예, 예? 그런 가문은 잘…….”

문득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일리안은 순간적으로 골목의 벽 뒤로 숨었다. 갑작스레 움직이자 품에 안긴 라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일리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 벽 너머를 살펴봤다. 윈터 가문이 어디 있냐고 묻는 사내들의 기색이 그다지 호의적이진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슬쩍 고개만 조금 내밀어 질문을 던진 자들을 확인했다.

“똑바로 대답하라. 윈터 가문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 아이고 기사님들. 정말로 모릅니다, 그런 가문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

리히텐슈 후작가의 사자 문양.

기사라 불린 이들의 제복의 견장에는 엎드린 사자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일리안은 그 문양을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라울과 서른다섯의 일리안 하인리히를 집요하게 쫓아다녔던 이들이었다. 이 시대의 일리안 하인리히를 죽이고서 끝일 줄 알았는데, 그들이 도대체 왜.

일리안은 순간 라울을 안은 제 팔에 힘을 주었다. 안겨 있던 라울이 불편했는지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렇다면, 라울 하인리히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느냐?”

남자의 말이 귓가에 꽂혔다. 일리안은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멈추고 제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봤다.

그들이 이제는 일리안 하인리히가 아닌 라울을 찾고 있었다. 둘을 쫓아다니던 후작가의 사람들이 모두 죽어 그것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것일까?

아니, 아니었다.

서른다섯의 일리안 하인리히는 후작가의 정보를 빼내어 팔았지만 사실 그것은 대단한 정보가 아니었다. 리히텐슈 후작이 하던 여러 사업 중 하나가 다른 귀족에게 이익이 되는 정보였을 뿐이었다.

후작은……. 처음부터 일리안과 라울을 다른 이유로 쫓고 있던 것이다.

“저, 저는 정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기사님. 하물며 귀족도 아닌 제가…….”

“금발과 푸른 눈의 아이를 봤냔 말이다!”

아이를 내려다보던 일리안은 결국 제 품 안으로 뒷머리를 눌러 넣었다. 일리안 하인리히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오목조목한 아이의 예쁜 얼굴이 더는 보이지 않도록 꽉 끌어안았다.

미하엘 세이버. 그는 전쟁 중에 죽은 라울의 아버지였다. 일리안의 얼마 없는 용병 친구이기도 했다.

일리안이 하늘을 바라보며 하아, 하고 느린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색이 짙은 금발 머리와 갈색 눈동자를 가졌던 미하엘의 외모를 쏙 빼닮은 라울은, 그가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간 아이였다.

미하엘, 네 아이는 내가 지킬게.

가엾은 네 부인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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