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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54화 (54/123)

54. 시간의 흐름

리하르트 공작성의 소식이 끊긴 지 벌써 2주가 흘렀다. 일리안은 그동안 수업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디노도 번번이 답신 없는 계약서만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귀족가에선 리하르트 가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이전에도 철옹성 같았던 리하르트 가문이 이제는 완전히 폐쇄하려는 듯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울? 뭐 하고 있어?”

수업 시간이 사라지자 시간이 남던 일리안은 홀로 바닥에 주저앉아 놀고 있는 라울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타피아가 주었는지 헤이븐 윈터의 어렸을 적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는 했다.

라울의 손에는 여러 번 재사용하느라 모가 조금 벗겨진 어린이용 붓이 쥐어져 있었다. 일리안은 다리를 굽히고 라울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

“이런, 얼굴에 다 묻었잖아.”

동그란 콧방울 위로 회색 물감이 묻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일리안이 픽 웃으며 제 엄지로 아이의 코를 슥슥 문질러 닦았다.

비교적 깨끗해지자 고개를 돌려 아이가 바닥에서 그리고 있던 그림을 바라봤다. 흰 종이 위에는 회색의 선이 이리저리 난도질 되어 있었다.

일리안의 눈에는 그것이 영 그림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라울은 입을 꾹 다물고 열심히 붓질을 했다. 결국 도대체 아이가 뭘 그리는 건지 모르겠던 일리안이 질문을 던졌다.

“뭘 그린 거야?”

라울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제 옆에 앉아 있는 일리안을 올려다봤다. 커다란 푸른 눈이 깜빡, 깜빡거리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몇 분이 흘러도 아이가 입을 열지 않자 대답을 포기한 일리안은 그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마.”

“어? 라울, 뭐라고?”

“엄마아.”

목소리는 작았지만 발음은 제법 또렷했다. 일리안은 그 한 마디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는 율리어스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제 어미의 시체를 보았지만 기억이 뚜렷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단지 무섭고 추웠던 기억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리안은 말없이 라울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거부하지 않고 손길을 받던 라울은 곧이어 그림을 완성했는지 붓을 내려뒀다. 라울이 만족한 눈으로 제 그림을 내려다보자 일리안도 웃으며 그림을 바라봤다.

“와, 잘 그렸는데.”

“…….”

“엄마한테 가져다줄까?”

그러자 라울이 고개를 휙 돌려 일리안을 바라봤다. 아이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울. 내 이름을 알아?”

라울이 고개를 저었다.

“헤이븐. 내 이름은 헤이븐 윈터.”

“…….”

“라울, 네 어머니는 그러니까……. 멀리 갔어. 아마도 오랫동안 널 보러 오지 못해.”

라울이 그 말에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더니 얼마 안 가 눈물이 매달렸다. 당장이라도 뚜욱 눈물을 흘릴 것 같던 라울에 일리안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약속할게. 엄마는 살아 있단다.”

일리안은 시간 마법이나 세계의 이치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계의 일리안 하인리히 또한 어쩌면 죽어서 또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그것이 반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직 다섯 살에 불과한 라울은 아마도 커가며 어렸을 때 잃어버린 어머니는 잊어버릴 터였다. 그러니 조금쯤은 희망적인 이야기를 늘어두어도 괜찮겠지.

비록 지금은 헤이븐 윈터지만, 그 안에 든 사람은 일리안 하인리히니까.

“라울이 간절히 바란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야.”

일리안은 라울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단지 아이가 무사히 자라기만을 간절히 소원할 뿐이었다.

그런 일리안의 마음을 알았는지, 라울도 그녀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일리안은 손바닥으로 아이의 좁은 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 * *

“그러니까, 왜?”

“왜긴 왜야. 우리 집이 마탑 쪽에도 워낙 투자를 많이 했지 않냐. 모르긴 몰라도 화원 서넛 만들 만큼은 넣었을걸?”

리트릭이 윈터 가문에 방문한 것은 오전이었다. 제집처럼 저택에 들어온 리트릭은 곧장 일리안에게 오더니 웬 초대장 하나를 들이밀었다.

마탑에서 열리는 아티팩트 경매 초대장.

한 해가 끝나는 이맘 때쯤에는 늘 마탑에서 아티팩트 경매 사업이 열렸는데, 보통 그 한 해 동안 마법사들이 만든 특별한 아티팩트들이 나왔다.

희귀한 데다 성능까지 특별해서인지 대부분의 물건들은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때문에, 그것을 구매할 만한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만 초대장이 발송되었다.

초대장마저도 암표로 판다면 제법 값이 나갈 것을 리트릭이 가져온 것이었다. 일리안은 리트릭의 한껏 기대한 얼굴을 심드렁하게 바라봤다.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뭐?”

“부자긴 하구나 싶어서.”

리트릭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일리안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설렁설렁 고개를 저었다.

리트릭이 오전 내내 졸라댄 결과 일리안은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서 마탑으로 향하고 있었다. 창문 밖에선 비라도 내리려는지 먹구름이 잔뜩 낀 채였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냐.”

“응? 아니! 특별히 아티팩트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거기 오는 여성분들이 보고 싶어서 가는 건데? 뭐, 좋은 검이라도 하나 있으면 살 수도 있지.”

마탑에서 소규모로 주최하는 경매 사업이라 하나 경매에 나오는 아티팩트 하나당 가격은 수도 내의 건물 몇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일리안은 그런 검을 아무렇지 않게 하나 사들일 수도 있지, 라고 말하는 리트릭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에릭은?”

“디노랑 할 일이 있어서 오늘은 같이 못 가. 도착했다, 내리자.”

땅에 발을 디디자 순간 차가운 바람이 확 몰아쳤다. 리트릭은 제 양팔을 부여잡고 춥다며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오들오들 떨었다.

그에 반해 일리안은 느릿한 걸음으로 마탑으로 향했다. 초대장을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리트릭과 일리안은 무사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넓다?”

“어, 몰랐어? 밖에서 보기엔 엄청 작아 보였지?”

마탑의 외관은 기다란 등대 정도의 첨탑이었다. 그래서 들어갈 때만 해도 사람이 몇이나 들어갈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황궁에 버금갈 정도로 넓은 내부가 드러났다.

일리안이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리하르트 공작 전하께서도 오신 모양이네요.”

“공작성에서 두문불출하신다던데……. 필요한 물건이라도 있으셨던 걸까요?”

“글쎄요. 저분께 필요한 물건이 있기는 하실지.”

리하르트라는 이야기에 일리안도 순간 그들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가이우스와 함께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는 율리어스가 보였다.

“야, 헤이븐. 여긴 너무 복잡하니까 안으로 들어가자.”

“…….”

“헤이븐?”

일리안은 멍한 얼굴로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딴 곳을 바라보던 리트릭은 그녀가 대답이 없자 의아한 얼굴로 일리안을 바라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 주 만에 보는 율리어스의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이제는 단순히 잠을 자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핼쑥해진 그의 얼굴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꼭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 같았다.

그때였다. 굳은 얼굴로 계단을 내려가던 율리어스가 순간 이곳을 바라봤다. 일리안은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율리어스의 눈동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다시는 율리어스와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라울을 살리겠다고……. 그것을 알고 선택한 것은 그녀였다. 그러니, 이다지도 마음 아플 이유는 없었다.

“야, 헤이븐! 가자니까?”

“……그래.”

팔을 이끄는 리트릭을 따라 경매장 내부로 들어섰다. 저 멀리 놓인 중앙에 놓인 무대를 두고 계단식으로 배치된 좌석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리트릭과 일리안은 그곳 중 무대와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앉았다. 좌석별로 신분이 나누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가장 앞자리는 이 중에서도 귀한 이들이 앉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경매장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앞 좌석을 둘러봐도 율리어스의 검은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일리안은 고개를 들어 무대의 위쪽을 바라봤다. 벽면에서 툭 튀어나온 세 개의 테라스 중 율리어스가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곧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마법으로 증폭된 남자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무대에는 곧 로브를 입은 하급 마법사들 몇 명이 출시된 작품을 들고 나왔다.

“첫 번째 작품은…….”

꽤 많은 작품들이 스쳐 지나갔다. 재정이 넉넉해 아티팩트라면 제법 만져봤을 리트릭도 몇 개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신기하다는 얼굴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일리안은 마음 놓고 아티팩트들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율리어스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꾸만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율리어스는 수십 개의 아티팩트들이 지나가는 동안 단 한 번도 물건을 구입하지 않았다.

“그럼, 오늘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물건을 소개하겠습니다. 초대장과 함께 발송했던 카탈로그엔 없던 물건이었죠. 이 물건을 알게 되는 순간 많은 분들이 노리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한껏 기대감을 높이려는 모양인지 커다랗게 귓속을 울렸다.

“공개하겠습니다, ‘시간의 흐름’!”

이제껏 나왔던 물건들이 모두 일반적인 크기의 아티팩트였던 것에 비하자면, 마지막 아티팩트는 크기가 거의 사람 서넛을 넘어섰다. 하급 마법사들은 직접 들지 않고 마법으로 그것을 이동시켰다.

“모두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이 ‘시간의 흐름’은 바로 그런 사람을 위한 아티팩트입니다.”

“헛소리!”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객석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행자는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들을 진정시키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물론, 엄청난 마법을 이행하는 만큼 사용 조건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들어가는 마나의 양에 따라 시간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들어보십시오. 이 얼마나 매력적인 마법이란 말입니까? 여러분이 들이는 마나에 따라 안타까웠던 선택을 되돌릴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는 침을 튀기며 아티팩트를 높은 가격에 팔기 위해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아티팩트는 사실상 실패한 발명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 아티팩트를 만든 마법사는 일찍이 사망했다. 그는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자신의 마나를 들이부었는데, 체내에 있는 거의 모든 마나를 들이붓고도 고작 5분도 채 되돌리지 못했다고 연구 일지를 남겼다.

그렇게 너무 많은 마나를 소모한 마법사는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다. 그 마법사의 서클은 무려 7서클에 다다르는 대마법사였다.

대마법사의 마나량이란, 가히 하급 마법사 수천 명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 이의 마나량으로도 되돌린 시간은 고작 5분인 것이다.

“3천만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히익, 3천만 골드래. 저걸 누가 사. 안 그러냐, 헤이븐?”

돈에 대해 무감각하던 리트릭도 3천만 골드라는 말에는 질린 얼굴로 무대를 바라봤다. 엄청난 가격에 객석이 잠시 조용해졌을 때였다.

“72번 고객님! 3천만 골드 나왔습니다!”

“미친……. 저걸 사려는 사람이 있네. 그래, 돈이 남아도는 사람이면 그럴 수도 있지.”

그 뒤로는 경매에 참여하려는 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3천만 골드로 낙찰되려는 참이었다.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버저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행자는 제 머리 위 공중에 마법으로 수놓아진 고객의 번호를 보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리곤 테라스를 바라봤다.

“그… 1번 고객님. 1억 골드…….”

율리어스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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