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53화 (53/123)
  • 53. 라울 하인리히

    일리안은 돌아온 에릭의 도움으로 율리어스를 비앙카의 별장으로 옮겼다. 침대에 누워 있는 율리어스는 고르게 들려오는 숨소리만 아니었더라면 죽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일리안이 수시로 그의 맥박을 재어볼 정도였다.

    별장 밖에선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밖을 거닐기가 힘들 정도의 폭설이었다.

    그가 눈을 뜨지 못한 지 벌써 이틀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리안은 이틀 내내 율리어스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일리안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씨가 추워 별장의 온도를 더 높여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방을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일리안…….”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율리어스가 그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 탁한 감이 남아 있었다. 그것도 잠시, 그가 몇 번 눈을 감았다 뜨자 본래의 까만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헤이븐, 윈터?”

    그 이름을 읊조리던 율리어스의 눈 속으로 순간 절망이 깃들었다.

    그는 침대에서 벌컥 일어나 일리안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율리어스를 저지하려 했다.

    “잠깐, 율리어스 님. 아직 일어서면……!”

    “입 닥쳐라, 헤이븐 윈터.”

    순식간에 다가온 율리어스는 그녀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일리안은 발끝만 겨우 땅바닥에 닿았다. 목이 조여오고 있었다.

    “내게 뭐라고 지껄였지? 그래, 일리안 하인리히가 아래로 갔다고 했었군.”

    일리안은 숨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목 사이로 컥컥대는 다급한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눈가에는 생리적인 눈물이 매달렸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목을 강하게 당긴 그가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일리안의 눈에도 그의 눈동자가 완연히 들어왔다.

    율리어스의 눈이 죽어 있었다.

    그는 거칠게 제 목을 조이는 손과는 달리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는 희망도 없이 삶을 포기한 자들처럼.

    “네가 죽였다.”

    “…….”

    “구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차가운 곳에서 홀로 죽어가진 않았겠지.”

    율리어스는 숨을 쉬지 못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얇은 목줄기는 제가 조금만 더 힘을 줘도 단번에 부러져 죽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녀를 제대로 죽이려고만 하면 제 손에서 힘이 빠졌다. 숨 쉬는 것처럼 쉬웠던 마법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잡고 있던 일리안의 목을 놓았다. 그녀의 작은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제 것을 잃고 날뛰는 괴물을 보니 즐겁던가.”

    “아닙…, 아닙니다.”

    “널 그때 죽여야 했는데.”

    율리어스는 낮게 일갈하며 방을 벗어났다. 주저앉은 일리안만이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되리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율리어스에게 있어서 일리안 하인리히라는 사람이 제법 중요한 이라는 건 알고 있었고, 그러니 자신이 그녀의 죽음에 관여된 걸 알게 된다면 그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란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어버린 눈만큼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자신은 율리어스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다.

    일리안은 씁쓸한 눈으로 그가 나간 문을 바라봤다.

    * * *

    비앙카는 논문이 완성되지 않아 아직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전해왔다. 때문에 일리안과 에릭, 그리고 라울만이 마차를 타고 수도로 향했다.

    일리안은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라울을 빤히 바라봤다.

    아이는 그녀가 기억하던 마지막 모습 그대로였다. 말수가 없는 것도, 낯선 이를 두려워하는 것도. 모르는 이가 말을 걸면 무서워하는 라울을 알기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가 편하도록 마차의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라울? 나 불렀어?”

    일리안은 제 옷을 작게 잡아당기는 손길에 놀란 눈으로 라울을 바라봤다. 아이가 푸른색 눈망울을 아래로 내리깐 채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던 라울이 슬며시 눈을 들어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것이 라울의 습관이라는 걸 알고 있던 일리안은 씩 웃으며 아이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눈치 보지 않아도 돼, 라울.”

    “…….”

    “괜찮다니까? 왜, 안아줄까?”

    그녀도 웃으며 묻기는 했지만 라울이 안아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을 알았다. 낯가림이 심한 라울에게는 처음 본 얼굴인 자신이 손이라도 대면 화들짝 놀라 마차 구석으로 숨어버릴 터였다.

    그때였다.

    라울이 단풍잎 같은 양손을 느릿하게 뻗었다. 아이가 팔을 벌리며 일리안을 바라봤다.

    일리안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라울이 제게 안아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일 자신에게.

    결국 라울을 품에 안아 들었다. 일리안의 무릎 위에 앉은 라울은 그녀의 어깨 부근에 동그란 머리를 기댔다.

    마차에 탈 때만 해도 긴장하던 아이가 품 안에서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었다. 일리안은 떨리는 손을 들어 아이의 등을 감싸 안았다.

    라울이, 죽지 않았다.

    일리안은 어느새 잠든 아이의 머리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어린아이 특유의 따뜻한 온기가 그녀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주책이네, 망할…….”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이를 안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제 볼을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화살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던 라울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연했다.

    엄마를 찾았는지 아이는 차가운 눈밭을 손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이미 꽁꽁 얼어버린 작은 손이 간절하게 어딘가를 향한 채, 아이는 얼어 죽어 있었다.

    일리안은 라울을 품에 안은 손에 조심스레 힘을 주어 껴안았다. 두 번 다시, 그렇게 쉽사리 아이를 보내지 않겠다.

    * * *

    “그러니까……. 단지 아는 사람의 아들이라니까.”

    타피아와 디노가 라울의 손을 꼭 붙잡은 일리안의 주위를 감쌌다. 일리안은 볼을 긁적이며 난감한 얼굴로 그들에게 설명해야만 했다.

    “절대, 절대 헤이븐 님 아이는 아닌 거죠?”

    “……얘 다섯 살이야. 나랑 열두 살 차이 난다고. 내가 열두 살 때 뭘 했는지는 타피아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갑자기 여행을 간다고 하셨다가 아이를 데려오니까 그렇죠!”

    타피아는 순간적이나마 그녀의 아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라는 말에 제 속을 쓸어내렸다.

    “그러기엔 애가 너무 크잖아, 타피아. 넌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디노 경도 순간 흠칫하셨던 거, 제가 다 봤어요!”

    “……흠, 흠흠. 아니, 손잡고 들어오는 헤이븐 님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잠깐 헷갈린 거야.”

    그때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알았는지 라울이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이답지 않게 라울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울고 있었다.

    타피아와 디노는 자신들이 아이를 울렸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허둥지둥 라울에게 다가왔다. 그나마 어렸을 적의 헤이븐 윈터를 돌본 적이 있던 타피아가 등을 토닥였다.

    “어머, 어머. 라울이라고 했지? 미안하단다, 울지 마렴.”

    “어어……. 타피아도 나쁜 뜻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야. 윽, 너무 슬프게 울잖아…….”

    그러나 라울은 디노와 타피아의 다정한 모습에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연신 통통한 뺨 위로 눈물을 흘렸다.

    결국 움직인 것은 일리안이었다. 그녀는 잡고 있던 라울의 손을 놓고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라울, 라울? 날 봐.”

    눈을 내리깔고 있던 라울이 조심히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선 이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안이 짧게 웃었다.

    “울어도 좋아. 하지만, 소리 내서 울어야지.”

    “……흐으.”

    그 순간 라울이 한 발짝 내디뎌 일리안의 품으로 달려왔다. 품에 숨듯 쏙 들어간 라울은 일리안의 목을 감싸고 얼굴을 묻은 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일리안은 그런 라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타피아, 디노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를 안지 않은 손으로 쉿,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자연스럽게 천천히 라울의 등을 두드리던 일리안은 자리를 벗어났다. 둘만 남은 타피아와 디노만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라울이 눈물을 그친 것은 일리안이 제 방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 다 울었어, 라울?”

    “…….”

    라울은 일리안의 어깨 위에 턱을 올리고 그녀의 목을 꼭 껴안고 있었다. 일리안은 픽 웃으며 라울의 우느라 젖은 머리카락을 하나씩 떼어줬다.

    서투르긴 했어도 자신은 아이의 엄마였다. 라울이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울었더니 졸리지?”

    어깨에 오동통한 뺨을 기대고 있던 라울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안은 연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침대에 앉았다.

    그러자 라울은 일리안이 자신을 홀로 침대에 내려두리라 생각했는지 옷깃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일리안은 라울을 내려두지 않고 그저 침대에 앉아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숨소리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라울은 혼자 침대에 두면 잠을 자지 못하지만 가만히 껴안아 등을 토닥여 주면 금방 잠든다는 것을, 일리안은 알고 있었다.

    일리안이 천천히 제 침대에 라울을 내려두려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문득 손을 움찔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마, 엄마아…….”

    그 말에 일리안이 멈칫했다. 그것은 자신이 쥐고 가야 할 또 다른 죄였다.

    라울을 내려둔 일리안이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라울을 안을 때와는 달리 굳은 얼굴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아무리 제가 아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은 아이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아이에게서 어머니를 뺏어간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이 비록 라울을 살리기 위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헤이븐 님.”

    “아, 디노. 무슨 일이야?”

    디노는 제 주변에 타피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말했다.

    “저, 사실 오늘 낮에 리하르트 공작성에 다녀왔습니다.”

    “……그래?”

    “펜서 집사장님께 전해 드릴 물건이 있어서요. 그런데…….”

    제 머리를 긁적거린 디노가 영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디노가 공작성에 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리하르트 공작성의 정원을 책임지던 디버튼 분재원이 윈터 가문 휘하로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디노도 공작성의 이들과 친해졌다.

    올겨울이 지나면 다가올 봄을 대비해 리하르트 공작성의 정원 관리 계약서를 전해주려고 했었다. 근 몇 년간 디버튼 분재원이 고용되었으니 올해도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오가다 익숙해진 경비병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들어가려던 디노는 그럴 수 없었다. 경비병들이 갑작스레 디노를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부로 공작성에는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는 전해 드릴 서류가 있는데요…….”

    “공작 전하의 명이십니다. 금일 이후, 공작성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출입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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