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너는 내게 있어서
일리안에게 있어서 율리어스는 어리지만 어리지 못한 아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얼굴 위로 감정 한 자락 드러내지 않던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가끔 그녀가 유리, 하고 나직이 부를 때면 아이의 검은 눈동자 위로 희미한 웃음기가 올라왔다. 그런 율리어스를 보면서 일리안은 아이가 나를 제법 따르는구나, 라고 속으로 생각하곤 했었다.
“일리안. 같이 자고 싶어요.”
“뭐야. 무섭기라도 한 거냐? 안 그렇게 생겨서는.”
율리어스를 숨겨주고서 그가 며칠간 일리안의 집에서 생활하게 됐을 때, 그는 첫인상과는 달리 응석을 부렸다. 아이답지 않던 그는 응석을 부리는 것조차도 어른스럽기는 했었다.
일리안이 손을 잡아주거나 어린 율리어스를 안아 들면 가끔은 놀란 듯 작게 입을 벌리기도 했다. 어딘지 불편한 듯 자꾸만 움츠러들기에 얼마 안 가 놓아주어야 했지만.
하지만 그것도 어렸을 때가 전부였다. 그가 성장하며 일리안이 수도를 떠나는 일이 잦아지자 율리어스가 예전과 같은 표정을 짓는 일은 드물어졌다.
가끔씩 그의 얼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목적 모를 갈망, 혹은 절망이 전부였다. 어린아이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들이 많음을 알기에 일리안은 율리어스가 안쓰러웠다.
그런 율리어스에게 확연한 감정이 떠오른 것은, 일리안으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율리어스.”
율리어스가 붉게 물든 눈으로 일리안과 라울을 내려다봤다. 그 모습이 무감각하기 짝이 없어서, 그의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이 없었다면 울부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율리어스의 손이 천천히 라울과 일리안을 향하기 시작했다. 떨고 있는 라울을 껴안고 있던 일리안은 어쩌면, 이곳에서 그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에서라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어째서인지 일리안 하인리히의 죽음에 울부짖고 있었고, 자신이 그 죽음을 5년이나 당겨 버린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일리안은 율리어스로부터 라울이 보이지 않도록 껴안은 뒤 눈을 감았다. 아이만 살아간다면 자신은 죽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때였다.
“괴, 괴물 같은 새끼!”
어디서 나온 것인지 넝마가 된 후작가의 제복을 입고 있던 사내가 율리어스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다.
남자가 쏘아낸 마법은 율리어스의 품에 적중했고, 안겨 있던 여자의 몸이 작은 폭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기가 가라앉았을 때에는 상처 하나 없는 율리어스와 함께 그녀의 옷자락 조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율리어스가 텅 비어버린 제 품을 바라봤다.
그녀의 죽음조차도 율리어스에게는 욕심이었다.
제게 주어지는 눈길도, 미소도, 머리카락 한 올도, 심지어는 옷깃 한 자락도 바라지 못했다. 바라서는 안 되었다. 고작해야 자신이 구해준 아이로만 보는 일리안의 시선조차도 잃을까 두려워 가질 수 없었다.
이렇게 빼앗길 줄도 모른 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율리어스는 고개를 들어 까맣게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뱀의 것처럼 길어져 있었다. 율리어스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걱정 마세요, 일리안. 나는 죽어도 당신을 놓지 않을 테니.”
율리어스의 한 마디와 함께 번개가 하늘에서 내려쳤다. 여자의 시체를 폭발시켰던 사내는 작렬하는 번개를 맞고서 타죽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하늘을 가린 어두운 구름이 크기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발로란 산 전체를 먹어버릴 것처럼 주변이 새까맣게 가라앉았다.
아직 그의 주변에 남아 있던 이들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각자 멀리 도망쳤지만, 개중 몇몇은 벼락을 피하지 못한 채 죽었다.
율리어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던 일리안은 손에 힘을 주어 라울을 껴안았다. 라울이 벌벌 떨고 있었다.
언제 벼락을 맞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였다. 자신 또한 당장이라도 라울을 데리고 도망쳐야 옳을 텐데, 일리안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헤이븐!”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나무 너머에서부터 에릭이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저, 저게 뭐야?”
달려온 에릭이 일리안의 어깨를 강하게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직감적으로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일리안은 제 품에 안긴 라울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직 율리어스를 바라보고 있는 에릭을 불렀다.
“에릭.”
“어, 어?”
“잘 들어. 아이를 데리고 별장으로 가.”
라울의 옷을 한 번 더 여며준 일리안은 에릭의 품으로 라울을 떠밀었다. 라울은 엉엉 울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에릭에게 안겨들었다.
“무슨… 소리야? 너는? 너는 어쩔 건데?”
“해야 할 일이 있어.”
“헛소리하지 마, 여기서 뭘 한다는 거야!”
에릭은 강제적으로 일리안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에게 쉽사리 끌려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벨로 숲에서, 기억나?”
“뭐? 갑자기 웬…….”
“나가는 길쯤은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일리안이 에릭을 바라보며 겨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가봐.”
에릭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표정을 할 때의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렸던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결국 에릭은 라울을 품에 안은 채 별장으로 달려갔다. 몸이 축 늘어진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품에 안은 라울을 안고 숲속을 달려가던 에릭은 연신 뒤를 돌아봤다. 그런 에릭의 불안감이 품에 안긴 아이에게도 전해졌는지 라울이 품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흐윽……. 흐으.”
“……꼬마야. 울지 마.”
라울이 고개를 들어 에릭을 올려다봤다.
“엄마아, 엄마…….”
아이가 엄마를 찾았다. 에릭은 그 아이의 어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에 그저 끌어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눈동자가 에릭의 어깨 너머 아직 일리안이 있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에릭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일리안의 부탁을 따라, 제 품에 안긴 아이를 안전하게 옮겨주는 것밖에는.
* * *
“……어이, 꼬마야. 너 집 잘못 찾았다.”
“미안하지만, 아이 앞에서는 안 피우거든. 그래도 말은 고맙다.”
여자는 키가 컸다. 그래봤자 자신보다는 한참 작아서 내려다볼 수 있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도리어 그녀를 올려다봐야만 했다. 그녀를 내려다볼 때 즈음에는, 자신은 이미 그녀를 가지고 싶다 생각하고 있었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볼을 긁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가 곤란해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가끔 그런 일이 생기면 나오는 그 습관은 자신만 알고 있던 것이었다.
활시위를 검지와 중지, 엄지를 이용해 당기는 모양인지 손가락 안쪽이 늘 닳아 있었다. 세 손가락이 묘한 모양으로 휘어 있는 흉한 그녀의 손이 제게는 무척이나 귀했다. 스치기라도 하면 멈칫거릴 만큼.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녀의 잿빛 머리와 짙은 회색 눈동자를 만져보고 싶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거리낌 없이 자신을 안아 들고 손을 잡아주던 이가 점차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마법으로 성장을 멈춰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직이 유리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 한 조각에도, 탐을 냈다.
율리어스는 제 귀가 먹먹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득히 멀어진 정신은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다.
“……유리!”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염원하던 이는 아닐 터다. 그녀는 두 번 다시 자신을 불러주지 않을 테니까.
“유리, 이 자식아! 정신 차려!”
그런데 이상했다. 자꾸만 일리안 하인리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어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흐려진 망막에는 그곳에 가냘픈 인영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데리러 왔어요?
왜 그랬어요, 당신이 오지 않아도 내가 갈 텐데. 우리는 늘 그랬잖습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을 부르는 이에게 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율리어스는 제 허리를 마주 안아오는 낯선 감각을 느꼈다.
“집에 가자. 날이 춥다, 유리.”
율리어스가 고개를 내렸다. 제 허리를 안고 있는 탁한 색의 붉은 머리가 보였다.
헤이븐 윈터?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허리를 안고 있던 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감기 걸려, 인마.”
분명히 목소리도, 얼굴도, 체형도 헤이븐 윈터였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율리어스는 자꾸만 일리안 하인리히가 자신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이제 왔어요.”
“……뭐?”
“다시는 두고 가지 말란 말입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제 허리를 안고 있는 일리안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율리어스의 커다란 손이 일리안의 좁은 어깨를 우악스레 움켜쥐었다.
곧 놓쳐 버릴 것 같았는지 그는 자꾸만 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일리안은 부러질 것처럼 잡아대는 탓에 어깨가 아팠지만 눈썹을 찌푸릴 뿐 나무라진 않았다.
어깨를 움켜쥔 손길은 거셌지만 또 몹시도 조심스러웠다.
“율리어스.”
“…….”
“이제 어디 안 가.”
네 옆에 있을게.
일리안이 손을 높이 치켜들어 율리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상스레 커진 체구에 손가락이 겨우 닿았다.
그러다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뒷머리를 잡아 제 어깨로 눌렀다. 산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이답지 않게 율리어스가 순순히 이끌려 왔다.
그와 동시에 마법처럼 주변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율리어스의 얼굴과 팔에 돋아났던 비늘이 사라지며 원래대로 돌아왔다.
율리어스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상대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 * *
에릭을 보내고서 일리안은 율리어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아직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는 사람 달래는 건 쥐약인데.”
일리안이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언가가 칼날처럼 일리안의 몸 곳곳을 상처 냈다.
볼 한쪽이 긁혀 피가 흘러나왔지만 일리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라울을 데리고 도망쳐야 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율리어스가… 울고 있었으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에 쫓겨 도망치던 아홉 살 아이는 목전까지 다가온 죽음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그런 그가 제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지 않은가.
“……유리!”
그녀는 느릿하게 율리어스를 껴안았다. 완전히 가까워지자 일리안을 상처 내던 마나의 반항이 더 거세졌다.
“유리, 이 자식아! 정신 차려!”
옷가지가 너덜거리며 그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일리안이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그것을 견뎌냈다.
“율리어스.”
“…….”
“이제 어디 안 가.”
이윽고 주변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정신을 잃은 듯 온전히 제게 기대는 율리어스를 일리안이 겨우 받아냈다.
“너는, 대체.”
일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일정한 숨소리를 내뱉는 율리어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는 정신을 잃었음에도 그녀의 어깨를 쥔 손아귀 힘은 풀지 않고 있었다.
죽은 시체를 껴안고서 울고 있던 율리어스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죽은 적이 있는 몸이었다.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율리어스가 어떻게 되는지 제 눈으로 직접 보자 입안이 씁쓸해졌다.
이전 생에서의 율리어스도, 지금의 너처럼 괴로워했을까.
그의 숨결이 일리안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모두가 두려워하던 이라기엔 몹시도 평온해 보였다.
“네가 자꾸 이러니까,”
차가운 눈송이 하나가 일리안의 볼에 난 상처 위로 내려앉았다. 어두워졌던 세상은 오간 데 없이 다시금 흰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자꾸 신경이 쓰이지 않냐…….”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둘만 남은 설원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