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51화 (51/123)

51. 가지 마요

일리안은 라울을 대신해 미끼가 되어 산 위로 향했을 때의 자신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다지 따뜻한 어머니는 아니었다. 홀로 자라 용병이 되었던 일리안은 서툴렀고, 또 거칠었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라울이 이상스레 조용한 것은 어쩌면 일리안의 탓일지도 몰랐다.

“라울?! 이런, 바지에 실례를 했으면 말을… 아니, 울었어야지!”

그때도 어렸지만 그보다 더 어렸을 적의 라울은 조용했다. 배가 고프면 겨우 일리안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게 전부였고, 그조차도 그녀가 응답하지 않으면 혼자서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눈치가 빠른 편인 일리안조차도 라울의 심중을 알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라울. 먹고 싶은 거 없어? 그래, 저기 저 애가 들고 가는 구름 모양 과자도 맛있겠는데.”

차라리 아이가 엉엉 울기나 하고 떼만 썼다면 일리안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라울은 엄마인 일리안에게조차도 무언가 부탁하기를 주저했다.

거리를 걸어 다니다 보면 종종 가게 앞에서 뭔가를 사달라고 주저앉아 우는 아이들이 보였다. 일리안의 손을 꼭 붙잡고 걸어가던 라울은 그런 제 또래의 아이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뿐, 가게의 물건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 라울, 방금 내 옷 잡아당겼지? 왜. 먹고 싶은 게 있어?!”

라울과 함께 길을 걸어 다니던 일리안은 제 옷을 잡아당기는 작은 손에 당장 무릎을 굽혀 앉았다. 라울과 눈높이가 똑같아지자 아이의 푸른빛 눈동자가 웬일로 반짝이고 있는 게 보였다.

라울은 천천히 검지를 들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일리안도 그런 라울의 시선을 따라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곳엔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하나씩 붙잡고 뛰어오르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보던 일리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라울의 머리를 꾹 눌렀다. 라울이 제 머리를 만지는 감각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것보다 더 멋있는 게 있는데. 이건 어떠냐, 라울?”

말을 마친 일리안이 라울의 몸을 번쩍 들어 제 목에 태웠다. 라울은 높아진 시선에 잠시간 히끅거리다 이내 일리안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아야, 아야야. 라울, 라울. 살살 잡아봐. 엄마는 너 안 떨어트리니까.”

“으, 응……!”

그제야 라울은 활짝 웃었다. 목마를 태워주느라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아이는 몹시 즐거워했다.

그래서 일리안은 주저 없이 율리어스에게 말할 수 있었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아래로 내려갔어.”

그녀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산 위로 향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자는 다름 아닌 수십 년 전의 자신이었으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나.”

“여기서 모두 지켜봤으니까.”

일리안이 씩 웃으며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한 10분 전쯤에 저 나무 아래로 내려가던데. 여기, 지대가 높아서 잘 보이거든.”

그 말을 들은 율리어스는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뒤에 있던 사내들 또한 율리어스를 따라갔다.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떠났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안은 뒤늦게 율리어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율리어스는 일리안 하인리히가 어느 후작가로부터 쫓기고 있다는 소식에 사람을 보냈다. 명령을 받은 이들은 수월하게 임무를 수행했지만, 빼앗긴 것이 많은 후작가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수도로 올라온다면 자신이 보호해 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일리안 하인리히는 후작가의 사람들은 물론 그가 보낸 이들까지 따돌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일리안 하인리히가 며칠 전 수도로 올라왔다.

그녀가 금고를 맡겨두었던 수도 내 은행에서 계약 해제 고지서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율리어스가 헤이븐 윈터와 처음 만났던 은행이기도 했다.

고급 용병인 그녀의 입장에서 그리 큰돈은 아니었지만 유일하게 가족사진이 있는 금고였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금고 내 보관된 물건이 없어 자동 계약 해제를 한다는 말에 수도로 올라와야만 했다.

일리안 하인리히의 행적을 보고받던 율리어스는 그 소식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금고를 맡긴 게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헤이븐 윈터는 어떻게 열쇠를 얻었나.

그 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새도 없이 율리어스는 일리안 하인리히가 후작가에서 고용된 사람들에게 쫓겨 발로란 산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그는 제 부하들에게 그녀가 몸담았던 남작가의 제복을 입히고 발로란으로 향했다. 율리어스의 능력인 마법조차 이동할 때가 아니고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바람과도 같은 사람이었고, 그가 잡으려 한다면 그녀는 또다시 떠날 테니까.

그러니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한 10분 전쯤에 저 나무 아래로 내려가던데. 여기, 지대가 높아서 잘 보이거든.”

“한 10분 전쯤에 저기 길 아래로 내려가던데. 이 집, 창이 커서 바깥이 잘 보이거든.”

나누어진 길에서 고민하던 율리어스의 앞에 나타난 이는 헤이븐 윈터였다. 헤이븐 윈터. 그 이름만 들어도 속이 답답해졌다.

대답을 들은 율리어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또였다. 자신과 일리안 하인리히만이 아는 대화를, 그리고 행동을 이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똑같이 행한다.

그래서였을까. 율리어스는 아무 말 없이 말머리를 돌려 산 아래로 향했다.

“율리어스 님.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은 어느 순간 율리어스를 지나쳐 그보다도 먼저 달려갔다. 율리어스는 일리안 하인리히에게 있어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직접 구해줄 수는 없었다.

그는 일리안 하인리히가 무사함을 확인하면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공작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고작 그걸 하고자 이 발로란 산까지 온 것이었다.

단지 제 눈으로 그녀가 무사한 것만 확인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네 어미를 원망해라!”

눈이 내리는 설원에는 후작가의 사내들 여럿이 몰려 있어 중심부에 있는 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곧장 말머리를 돌리려던 율리어스는 ‘네 어미’라는 단어에 멈칫했다.

율리어스를 따라온 사내들 중 1명이 누군가 쏘아낸 화살을 쳐내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후작가의 이들과 검은 제복의 사내들이 뒤섞여 싸우기 시작했다.

적들과 싸우는 사내들을 내버려 둔 채, 율리어스가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천천히 걸어갔다. 저 멀리, 흰 눈 위로 웅크린 어린 짐승이 있었다.

두른 것은 일리안 하인리히의 겉옷이었다.

그는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아이에게 다가간 율리어스가 등에 둘러진 겉옷을 들어 올렸다. 겉옷을 쥔 그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율리어스가 눈을 내려 발밑을 바라봤다. 검은 뱀이 아가리를 벌린 채 그의 발끝을 타오르고 있었다.

눈 깜빡임 한 번에 율리어스의 신형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산 아래가 아닌 위였다.

“네, 네 놈은 누구……!”

율리어스의 발밑에는 수없이 화살을 맞은 고깃덩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겉옷 하나 입지 않은 여자의 신발은 저 멀리 굴러간 채였다.

그는 아무런 말도,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것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한쪽 무릎을 꿇어 여자의 팔 위로 제 손을 얹었다. 그 손길이 몹시도 조심스럽고 부드러워서, 꼭 잠든 이를 깨우는 것만 같았다.

“일어나요.”

차갑게 식은 피부는 이미 죽은 자의 것이었다.

“죽었어요?”

그의 말끝이 얕게 떨리었다. 여자의 팔을 잡고 흔드는 손에 힘이 실렸다. 사체라고 부르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화살이 많이 꽂힌 여자의 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죽었냐고 묻잖습니까. 대답해요.”

율리어스의 아득해진 시선은 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서 그녀의 몸을 몇 번이고 흔들다, 마침내 고개를 떨궜다. 붙잡은 천 조각이 구겨질 정도로 힘이 들어간 율리어스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미친 것처럼 흔들리는 손으로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파랗게 질린 기다란 손가락이 굳은 피와 녹은 눈이 엉켜 버린 땅바닥을 긁고서 겨우 그녀를 품에 넣었다.

그 순간 율리어스의 등으로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그는 팔 하나를 들어 그것을 쳐내었다. 인간의 연약한 피부라곤 보기 힘들 정도로 단단한 팔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직 그곳에 서 있는 사내들을 바라봤다. 율리어스의 눈이 실핏줄이 터지며 붉게 물들었다.

퍼억.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곳에 서 있던 사내들의 살점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엔 핏자국 몇 개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가지 마요.”

그가 속삭였다.

차갑게 식은 몸을 다시금 끌어안은 율리어스가 그녀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단 한 번도, 그는 단 한 번도 일리안을 안아본 적이 없었다.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짓이었다. 제게는 몹시도 소중하고 또 소중해서 손길 한 번, 눈길 한 번도 제멋대로 하지 못했다.

사랑한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그녀만큼 자신을 살고 싶게 만드는 것은 없는데, 그따위 말로 감히 표현할 수는 없었다.

“모두 죽여 버릴 겁니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 모두. 누가 그랬습니까? 말해봐요. 일리안, 제발…….

희게 질린 율리어스의 입술이 달싹이며 자꾸만 그녀를 재촉했다. 그녀는 이미 대답해 줄 수 없는 망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어요?

율리어스의 붉어진 눈이 제 품에 안긴 일리안을 바라봤다. 죽기를 각오하기 전에, 그녀가 제 이름을 한 번이라도 불렀더라면. 그랬다면 산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 아래. 그래, 헤이븐 윈터가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일리안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들이라는 녀석이 살아남는 대신 일리안이 살아남았겠지.

율리어스는 품에 그녀를 끌어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눈이 내리느라 먹구름이 꼈던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둠이 구름을 좀먹었다. 곧 율리어스를 중심으로 폭풍이 시작됨과 동시에 번개가 내려쳤다.

하지만 율리어스는 일리안 하인리히를 껴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등에 꽂혀 있던 화살이 어느 순간 가루가 되어 스르르 사라졌다.

붉어진 눈을 한 그의 얼굴에 검은색의 반투명한 비늘이 돋아났다. 그의 커다란 키가 순간 한 움큼 자라났다.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시체를 껴안은 율리어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산 아래에 다시 나타났다. 그곳에 모여 있던 사내들은 율리어스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치떴다.

“유, 율리어스 전하……!”

가까이 있던 사내 1명이 율리어스의 주변에서 불어대는 폭풍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갔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후작의 잔당들은 하나둘씩 검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그들을 내려다보던 율리어스의 눈동자가 옆으로 굴러갔다. 잔당들과 자신의 기사들 사이에선 일리안의 겉옷을 덮은 채 떨고 있는 라울이 있었다.

울고 있던 라울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의 주변에 있던 사내들은 율리어스가 라울을 찾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는지 그 주변에서 파스스 흩어졌다. 홀로 남은 라울만이 입을 꾹 다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네놈 때문에.

차마 말 한마디조차 함부로 걸 수 없을 정도로 소중했던 이였다. 그런 그녀가 고작 저놈을 살리겠다고 죽었다.

율리어스가 제 품에 있는 여자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반동인지 안겨 있던 여자의 고개가 스륵 돌려졌다.

라울은 그것이 제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한 손으로 여자를 안은 율리어스가 나머지 손을 들었다. 손마저도 검은 비늘이 돋아난 그가 라울을 향해 무언가를 하려 했을 때였다.

“그만둬.”

핏자국이 점점이 떨어져 있는 설원에 앉아 있는 라울을 누군가 껴안았다. 일리안은 아이를 제 품 안으로 숨기며 이미 인간을 벗어난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그만두라고 했다, 유리.”

일리안은 이를 악물고 일갈했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고서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늘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던 그가 붉어진 눈을 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품에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사체를 껴안은 채였다.

율리어스가, 울부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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