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선택
그 일은 일리안이 죽었던 마흔 살로부터 5년 전, 그녀가 서른다섯일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날은, 처음부터 재수가 없었다.
남부 지방에서 후작가로 들어가 정보를 캐오는 임무를 해냈던 일리안은 한동안 후작가의 이들에게 쫓겨 살아야만 했다. 그때 라울의 나이가 고작 네 살이었다.
라울을 데리고 후작으로부터 도망쳐 달라는 부탁은, 전쟁터에서 죽은 미하엘의 마지막 전언이었다. 마법을 심장부에 직격으로 맞아 숨이 멎어가면서도 그는 라울의 뒤만을 걱정했다.
일리안은 미하엘의 간절한 눈빛을 내내 잊지 못했다.
후작을 피해 다니는 것은 피곤했지만 그렇게 어렵지만도 않았다. 일리안은 변장에 능숙했고, 코앞에서 후작가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묻고 다녀도 ‘글쎄요. 오, 이 여자 웃기게 생겼네요.’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그렇게 남부 지방을 오가던 중 일리안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타파의 기일이 다가와 친지 1명이 필요하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그녀는 타파의 무덤을 가기 위해 라울을 데리고 수도로 올라갔다.
무덤에는 무사히 다녀왔지만 후작가의 사람들은 그녀를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리히텐슈 가문에서 나왔소.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이 여자를 찾고 있는데, 혹시 본 적이 있소?”
“이 여자요? 으음, 요 앞 실리트 아주머니도 닮은 것 같고, 아니다, 거기 딸내미인 세레타를 더 닮았나? 참, 그건 들었어요? 세레타가 약혼식을 코앞에 두고 웬 남자랑 야반도주를 했다는 거요. 아아, 패트릭만 불쌍하게 되었지. 그래도 영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실리트 아주머니 성격이 얼마나 더럽냐면…….”
일리안의 말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자 후작가의 사람들은 질린 표정을 해 보였다. 그들이 막 문을 도로 닫고 먼저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가시려고요? 날이 춥던데, 다들 고생…….”
“으아아앙!”
씩 웃으며 그들을 배웅하던 일리안의 얼굴이 잠시나마 굳었다. 후작가의 사람들은 눈을 끔뻑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이가 있소?”
“……실리안이 배가 고픈가? 이상하다, 저렇게 우는 아이가 아닌데. 잠깐만요.”
그들을 문 앞에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간 일리안은 다시는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후작가의 사람들이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창문만이 휑하니 열려 있을 뿐이었다.
“여자를 찾았다! 당장 쫓아가!”
그날 저녁, 수도의 끄트머리 거리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일었다. 웬 가문의 기사들이 중무장을 한 채 도심을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한편, 라울을 품에 안고 달리던 일리안은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아직 뒤에서는 후작가의 사람들이 자신을 쫓고 있었지만 그래도 제법 거리가 되는 터였다.
두 갈래로 나누어진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다시 도심으로 들어가 광장과 이어지는 길이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는 않은 터라 수도인 이곳은 그래도 제법 사람이 있을 터였다.
두 번째는 곧장 발로란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마차가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었지만 걸어서 산을 넘는 이들에겐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했다.
라울을 품에 안은 일리안은 아이의 뒷머리를 눌러 제 품 안으로 넣으며 걸음을 옮겼다. 발로란 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라울, 추워?”
“흐으, 흐엉…….”
붉어진 아이의 귀는 심각할 정도로 차가웠다. 눈이 내리는 발로란 산은 추위도 심각했지만 바닥에 쌓인 눈으로 산을 오르기가 더 힘들었다.
하지만 멈출 새는 없었다. 아이를 안고 있어 조금 느려진 자신과는 달리 저쪽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쫓고 있을 터였다.
“여기 발자국이 있다! 이쪽으로 가라!”
설상가상으로 눈이 쌓인 바닥에는 자신과 라울이 어디로 갔는지 선명하게 알려주는 발자국이 이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를 듣고서 일리안은 라울을 바닥에 내려뒀다.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춘 일리안이 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라울, 이제부터 혼자 가야 해. 넘어져도 좋아. 달리지 않아도 된단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진 마.”
일리안은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라울의 머리 위에 둘러줬다. 이미 두텁게 입고 있던 라울은 제게 둘러진 겉옷을 조그만 손으로 붙잡고서 올망졸망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떠나지 않으려는 라울의 등을 강제로 밀었다. 몇 발자국 가던 라울이 고개를 돌려 일리안을 바라봤다.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라울은 어릴 적부터 말이 없던 아이였다. 낯선 이가 있으면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아이는 일리안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입을 열고 겨우 제 의사를 표현했다. 그조차도 배가 고프거나 필요한 게 있거나가 전부였다.
그런 아이가 일리안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일리안의 냄새가 배어 있는 겉옷을 꼭 붙잡은 아이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벌벌 떨며 그녀를 향해 간절한 눈을 보였다.
하지만, 일리안은 기다려 줄 수 없었다. 하물며 안아줄 수도 없었다.
결국 한 발짝씩 떼어 걸어가는 아이를 두고서, 일리안은 겉옷 하나 입지 않은 차림으로 산 위로 달려갔다. 얇은 신발 밑창으로 돌과 나무 따위가 빼곡하게 느껴졌다.
“제아무리 고급 용병이더라도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보군.”
“마흔 명을 상대로 이 정도 했으면 제법 선전한 거지. 날이 춥다. 할 거면 어서 붙자고.”
허리에 차고 있던 쌍검을 손에 쥔 일리안이 그들을 향해 검을 가리켰다. 그녀의 회색 머리 위로 흰 눈이 쌓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절반밖에 없어?”
“하하! 그걸 이제 묻나?”
가장 높은 이로 보이는 남자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네 아이를 죽이러 갔으니까!”
“뭐……?”
“그렇게 빼돌리면 아이를 놓칠 줄 알았나? 그 꼬맹이의 발걸음으론 이미 잡혀서 목이 잘려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그 목을 네 앞에 던져야 했는데.”
일리안은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살 만큼 살아온 자신은 이곳에서 죽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의 아이는…….
“네 아들놈이 외롭지 않도록 길동무로 보내주마.”
누군가 일리안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을 맞은 일리안이 크게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반항 한 번 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라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네, 네놈들은 대체……! 으아악!”
“끄윽…….”
갑자기 나타난 이들에 의해 후작가의 이들이 하나둘씩 검을 맞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제복을 입은 그들은 용병이라기엔 절도가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그중 가장 앞에 있던 이가 일리안에게 다가왔다. 자신이 아끼던 검조차 떨어트린 채 무릎을 꿇고 있던 그녀는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이를……. 아이를 못 보셨습니까.”
“아이… 라니요? 미안하지만 우린 남작 가문에서 급하게 온 터라…….”
그들은 일리안이 그전까지 몸담고 있던 귀족 가문이었다. 후작 가문의 정보를 빼내오라는 임무를 내준 가문이기도 했다.
“라울…….”
일리안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눈밭을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눈밭 위로 피가 섞인 조그만 발자국이었다.
이어진 발자국의 끝에는 어린 짐승처럼 화살을 맞고 웅크려 죽은 아이가 있었다. 자신이 뒤도 돌아보지 말라고 해서, 아이는 화살을 맞고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다 죽었다.
차라리 제게 왔으면.
자신이 뒤도 돌아보지 말라고만 하지 않았으면.
죽은 아이의 몸을 껴안은 여자는 소리를 안으로 삼키며 울었다. 웅크린 아이의 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이의 차가워진 체온이 따뜻해질 리는 만무했다.
* * *
일리안은 미안한 눈으로 비앙카의 별장을 바라봤다. 물론 그곳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위해 요리를 준비하고 있을 에릭이 있을 터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갑작스럽게 카드놀이를 하자고 한 것부터가 자신의 계획이었다. 오늘 아침, 정보 길드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라히텐슈 후작 가문의 사람들이 일리안 하인리히를 쫓아 수도로 올라왔다는 소식이었다. 조금 엇나갔던 미래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이쯤… 이었지.”
산 중턱에 선 일리안이 주변을 돌아봤다. 아직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 근방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자신은 겉옷을 벗어 라울에게 입혀줬다.
일리안은 차가울 대로 차가워져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을 비볐다. 그리곤 나무 뒤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후작가의 사람들이 그녀를 쫓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래도. 일리안은 라울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가 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라울, 추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안은 나무 뒤에 숨어 여자와 아이를 훔쳐봤다. 제 눈앞에서 과거의 장면이 마치 연극 속 장면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여기 발자국이 있다! 이쪽으로 가라!”
“라울, 이제부터 혼자 가야 해. 넘어져도 좋아. 달리지 않아도 된단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진 마.”
그 언젠가의 겨울처럼, 여자는 자신의 옷을 벗어 아이에게 벗어주었다. 라울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다 결국 떠밀림에 의해 걸어갔다.
여자는 홀로 걸어가는 라울을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무언가를 결심한 눈으로 그녀는 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사라지자마자 사내들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 여기, 여자의 발자국이 있습니다.”
“호오. 위로 올라간 모양이군. 독 안에 든 쥐새끼니 모두 쫓아라!”
“여기 발자국이 1개 더 있습니다! 아이의 것으로 보입니다.”
부하의 보고에 잠시 고민하던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여자의 아이인가 보군. 너흰 아이를 쫓아라!”
“예, 알겠습니다!”
두 개로 나뉜 후작가의 사람들은 이내 각자 산 아래와 위를 향해 빠르게 사라졌다.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여자와 아이, 그리고 사내의 발자국이 뒤섞여 엉망진창으로 있었다.
일리안은 무섭도록 굳은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봤지만,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라울을 쫓아가 무서워하고 있을 아이를 안아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었다.
곧 있으면 자신을 구해주러 왔었던 검은 옷의 사내들이 도착할 터다. 의뢰가 끝난 그 귀족 가문이 왜 자신을 도와줬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순간 일리안의 귀에, 이곳에서는 들려오지 말아야 할 이름이 들려왔다.
“율리어스 님. 여기서부터 발자국이 뒤섞였습니다.”
일리안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말에 타고 있는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이전 생에선 이 일과 조금도 관련이 없던 그가, 대체 왜 이곳에 왔단 말인가.
하지만 율리어스의 뒤로 검은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중 선두에 선 자의 얼굴은 익숙했다. 분명히, 그녀에게는 남작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이라고 했던 이였다.
율리어스는 산 위와 아래로 갈린 발자국들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사내들을 향해 명령했다.
“위로 올라가라.”
“예? 하지만, 아래로 갔는지 알 수가…….”
“그녀는 아래로 가지 않았다.”
제 아들을 궁지에 몰리도록 버려둘 여자가 아니니까.
확신에 찬 어조였다. 그걸 듣고서야 일리안은 깨달았다. 율리어스가, 라울을 버리고 일리안 하인리히를 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도와줄 리 없는 귀족 가문의 기사들이 어째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발로란 산까지 왔었는지.
“알겠습니다. 그럼, 아래로 보내는 인원은…….”
“보내지 않는다.”
율리어스는 알고 있었다. 서른다섯 살의 일리안 하인리히가 라울을 살리기 위해 아래로 보냈고, 지금 인원을 보내지 않는다면 라울은 죽는다는 사실을, 그는 모두 알았다.
그런데도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명령을 들은 사내들이 모두 위로 올라가려 했을 때였다. 율리어스의 앞에 터벅터벅,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율리어스.”
일리안, 이제는 헤이븐 윈터의 몸이 된 그녀가 주먹을 꾹 쥔 채 걸어왔다. 율리어스는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일리안은 그런 율리어스의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씩 웃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아래로 내려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