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넌 이제 사생활은 없다
“……도대체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에릭이 기지개를 켜며 제 방에서 나오는 일리안을 향해서 한 말이었다. 아무리 에릭이라도 숙녀의 방에 함부로 들어올 수는 없는 모양이었는지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채였다.
일리안은 별장에 온 뒤로 근 며칠간 해가 뜨고서야 느지막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어나면 눈으로 뒤덮인 별장 주변을 슬슬 걸어 다니다, 식사를 하고 간단한 운동까지 마친 뒤 잠드는 게 하루 일과였다.
타피아가 있을 때에는 그나마 품위를 지키던 일리안은 별장에 온 뒤부터 완전히 평민 같았다. 방 밖으로 나오며 턱을 살살 긁다 에릭의 잔소리에 눈을 찡그리는 모습이 그러했다.
“뭐긴 뭐냐. 휴가지.”
“이게?”
“어, 몇 년간 바쁘게 살았잖아. 숨 좀 돌리고 싶어서 쉬러 온 건데.”
에릭은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열다섯 살일 때 만났던 그녀는 고작 열두 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분재원으로 들어가 돈을 벌었다.
그 뒤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는 에릭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하는 것 없이 게으르게 살지는 않을 것 같던 그녀가 낯설어서 한 말이었을 뿐이었다.
“오늘 저녁은 뭘까. 오랜만에 따뜻한 수프가 먹고 싶은걸. 안 그래, 에릭?”
에릭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일리안이 짧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에릭은 어딘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얼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따라갔다.
비앙카는 교양학 논문을 완성하겠다는 말과 함께 본관으로 떠난 뒤로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별관과 본관의 거리가 상당할뿐더러 2채 모두 각자 필요한 것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만날 일도 없었다.
발로란으로 간다기에 당연히 눈의 축제를 즐기러 가는 줄만 알았다. 타피아와 디노도 지금쯤 그녀가 눈의 축제를 즐기고 있으리라고 생각할 터였다.
그런데 고작 눈으로 뒤덮인 별장에서 무위도식이라니……. 그녀와 단둘이 있게 된 것은 에릭에게도 제법 설레는 이야기였지만, 무언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에릭, 심심한데 카드놀이나 할까.”
“……카드놀이?”
며칠 사이 별장에 완전히 익숙해진 모양인지 일리안은 따로 관리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척척 카드를 찾아왔다.
“자, 봐. 여기 3장의 카드를 잘 봐둬.”
“종을 든 여왕, 연주하는 시녀, 거꾸로 매달린 남자.”
“좋아. 그럼 이 3장의 카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일리안의 맞은 편에 앉은 에릭은 신중한 얼굴로 3장을 각각 바라보다 이내 한 카드를 집어 들었다.
“거꾸로 매달린 남자? 나쁘지 않은 카드지.”
일리안은 에릭의 손에 쥐어져 있던 카드를 다시금 가져와 테이블 바닥에 내려뒀다. 카드가 뒤집히고 똑같은 문양을 가진 뒷면이 일렬로 놓였다.
잠시 멈췄던 일리안은 빠르게 손을 움직여 카드를 뒤섞기 시작했다. 그 속도로 매우 빠르기는 했지만, 에릭의 동체 시력으로 못 따라잡을 수준은 아니었다.
“네가 고른 카드는 어디 있을까.”
“이거.”
에릭이 세 번째에 놓인 카드를 가리키며 그것을 뒤집으려 했다. 순간 일리안이 그의 손을 저지했다.
“그래? 확실해?”
“어. 확실해.”
“아니면.”
아니면 어떻게 할래?
일리안의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눈동자에 희미하게 즐거운 기색이 떠올랐다. 일전에 있던 검술 시합에선 자신이 말려들어 갔으니 이걸로 조금쯤은 되갚아주어도 좋을 터다.
“……뭐, 바라는 거라도 있어?”
“흐음. 만약 네가 틀리면……. 그래, 오늘 수프는 네가 끓여줘.”
“내가? 여기 주방장이 있는데 대체 왜.”
별장의 주방장은 산속에서 상주하는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실력이 출중했다. 일리안이 매일같이 오늘 메뉴는 뭘까, 라고 기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리안은 얼굴을 구기고 자신을 바라보는 에릭을 향해 씩 웃었다.
“어쨌든 둘이 여행 온 거니까. 맛있게 해줘라.”
“……나 아직 안 졌거든.”
“아, 그렇지. 네가 확인해 봐.”
에릭은 신중한 얼굴로 자신이 가리켰던 카드를 뒤집었다. 그려져 있는 그림은 ‘종을 든 여왕’이었다.
“이게 아니라고?”
“좋아, 그럼 주방장님께 오늘 저녁은 쉬어도 된다고 말씀드려야겠군.”
“잠깐만!”
오기가 났는지 에릭이 나머지 카드 2개를 뒤집었다. 자리에서 슬슬 일어나려던 일리안이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연주하는 시녀, 칼을 든 사내.
……‘거꾸로 매달린 남자’ 카드는 어디에도 없었다. 에릭이 고개를 휙 돌려 일리안을 바라봤다.
“이런. 들켜 버렸네.”
“대체 언제 바꾼 거야? 조금도 눈치 못 챘는데. 카드는 어디…….”
순간 일리안이 마르틴 백작 부부에게 종이 장미 마술을 보여줬던 것이 떠올랐다. 에릭은 허리를 굽혀 테이블 아래를 바라봤다. 물론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 있긴. 네 주머니 뒤져봐.”
이미 자리에서 일어선 일리안은 힐끔 에릭에게 눈길을 주고선 테이블을 떠났다. 마실 것을 가지러 가야겠다는 목소리가 에릭의 귀에 들려왔다.
에릭은 설마, 싶은 얼굴로 제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딱딱한 종이 특유의 감촉이 손가락에 부딪혔다.
그것을 꺼내 멍한 얼굴로 카드를 바라봤다. 검술에 재능이 있기 위해서는 뛰어난 동체 시력도 포함되었다. 기사인 자신이 눈치도 못 챌 정도라면, 대체 그녀는 뭐란 말인가.
에릭이 주방으로 걸어가는 일리안의 뒷모습을 미간을 좁히고서 집요하게 노려봤다.
* * *
“에릭, 아직도 준비하는 중이냐?”
“……그래. 수프는 한 번도 안 끓여봤다고.”
“적당히 해. 큰 기대는 안 하니까.”
앞치마를 맨 에릭은 주방장으로부터 받아온 야채수프 조리법이 적힌 종이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런 에릭의 주위를 맴돌던 일리안이 입을 벌려 하품을 쩍 했다.
“있잖아, 나 자러 가도 되냐.”
“또 자겠다고?”
“별장이 따뜻해서 그런지 자꾸 졸리다.”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일리안은 눈가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달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에릭도 자신이 내기에서 패배한 만큼 그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 되면 깨워줘. 밥은 같이 먹어야지.”
이내 일리안이 주방을 떠났다. 홀로 남은 에릭은 미리 준비해 둔 야채와 고기들을 하나씩 다듬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일리안을 위해 직접 준비하는 음식이니만큼 대충할 생각은 없었다. 식칼을 든 그는 신중한 얼굴로 채소들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갔다.
그렇게 고기까지 모두 준비를 마치자 이미 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러나 이미 요리에 집중하느라 시계를 보지 못한 에릭은 레시피를 정석대로 따라가며 하나씩 해나갔다.
“……맛있다.”
자신이 만든 수프를 조금 덜어 맛을 본 에릭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방장의 조리법을 자로 잰 듯 똑같이 따라 했으니 실패할 리가 없었다.
일리안과 식사를 하기 위해 수프를 준비하고, 비어 보이는 식탁 위에 따뜻한 빵 몇 개도 놓으니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앞치마를 겨우 벗은 에릭은 일리안의 방으로 걸어갔다.
에릭이 손등으로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헤이븐, 식사 준비 다 됐어.”
“……에릭, 미안한데 몸이 안 좋아서 못 먹을 것 같아. 나중에 먹을 테니까 너 먼저 먹도록 해. 그리고 방에는 들어오지 마.”
“뭐? 갑자기 어디가 안 좋은 거야? 괜찮아?”
분명 식사를 준비하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던 녀석이 아프다니. 에릭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지만 더 이상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가만히 문에 귀를 붙여봐도 방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문 앞에서 고민하던 에릭은 들어오지 말라는 말에 제멋대로 들어갈 수는 없어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빈 식탁에 홀로 앉은 에릭은 달그락 소리를 내며 식사를 시작했다. 이곳에 온 뒤로 늘 일리안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던 터라 빈자리가 제법 크게 느껴졌다.
“……많이 안 좋은 건가.”
결국 에릭도 몇 입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뒀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일리안의 방문을 바라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툼한 겉옷을 챙겨 들었다.
관리인에게 물어 비상약이 어디 있는 지라도 물을 요량이었다. 별관 밖으로 나간 에릭은 뽀득한 소리가 들려오는 눈을 밟으며 본관으로 향했다.
그런 에릭의 눈에 문득 들어오는 게 있었다. 누군가의 발자국이었다.
“……누가 별관에 왔었나?”
발자국은 별관에서부터 시작돼 본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관에서 별관으로 왔을 때의 발자국은 없었다.
이미 그 위로 눈이 내려 덮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조금의 흔적은 있을 법도 했다. 그러나 건물에서 나간 발자국만 있을 뿐 들어온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인인 비앙카로부터 무슨 언질이라도 들었는지 관리인은 손님인 자신들의 숙소에 함부로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에 한 번 정해진 시간마다 오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저 발자국은 몹시도 이상했다.
그러다 문득 일리안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에릭, 미안한데 몸이 안 좋아서 못 먹을 것 같아. 나중에 먹을 테니까 너 먼저 먹도록 해. 그리고 방에는 들어오지 마.’
자신이 방에 들어간다곤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제가 먼저 들어오지 말라고 통보를 내렸다. 마치 그가 방으로 들어오리란 것을 예상한 것처럼.
에릭은 갑작스레 드는 한기에 몸을 돌려 다시 별관으로 달려갔다. 멈춰 선 곳은 일리안의 방문 앞이었다.
똑똑. 숨을 멈춘 에릭이 차분한 얼굴로 방문을 두드렸다.
“……에릭, 미안한데 몸이 안 좋아서 못 먹을 것 같아. 나중에 먹을 테니까 너 먼저 먹도록 해. 그리고 방에는 들어오지 마.”
벌컥.
기계처럼 반복되는 말을 듣자마자 에릭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며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고개를 숙여 그것을 확인했다.
“……에릭, 미안한데 몸이 안 좋아서 못 먹을 것 같아. 나중에 먹을 테니까 너 먼저 먹도록 해. 그리고 방에는 들어오지 마. ……에릭, 미안한데…….”
열린 문에 부딪혀 굴러간 모양인지 마법 녹음기 하나가 방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곳에선 일리안의 목소리가 고장 난 것처럼 반복해서 들려왔다.
방의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내부는 찬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에릭은 굳은 얼굴로 방 곳곳을 살폈다.
방 한구석에는 짐조차 풀지 않은 가방이 놓여 있었다. 짐을 푼다고 했던 그녀는 짐조차 풀지 않고서 방 안에서 무언가를 준비해 왔던 것이다.
느릿하게 가방 앞으로 걸어간 에릭이 가방 속을 확인했다.
“헤이븐 님, 검은 어디에 쓰시려고요?”
“뭐, 나도 내 몸 지킬 무기 하나쯤 들고 가서 나쁠 건 없잖아.”
짐을 챙기던 일리안이 지나가듯 한 말이었다. 그러나 열린 짐 가방 속에는 그녀의 검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에릭은 빠르게 방을 빠져나가 비앙카의 별장 밖으로 향했다.
눈발이 점점 더 두터워지고 있었다. 그 탓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꽤 눈에 띄던 발자국이 슬슬 희미해졌다.
발자국은 정확히 말해서 본관을 향한 것도 아니었다. 본관으로 이어지는 것 같던 발자국은 바로 그 앞에 있는 대문 밖으로 이어졌다.
“갑자기 카드놀이를 하자더니.”
애초부터 애들 장난 같은 카드놀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에릭이 무언가에 묶여 시간을 벌어야만 했던 것이다.
에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혼자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넌 이제 사생활은 없다, 헤이븐.
에릭이 발자국을 따라 별장 밖으로 걸어갔다. 그 언젠가의 겨울처럼,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