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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48화 (48/123)

48. 나의 아들

일리안은 초조한 얼굴로 공작성에 가기 위해 윈터 저택을 빠져나갔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는데도 불구하고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차림이었다.

서른다섯 살의 일리안 하인리히가 벌써 수도로 돌아오다니.

제 기억을 따르자면, 자신은 이맘때쯤 겨우 임무를 마치고 혹시 모를 위험에 라울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숨죽이고 있을 때였다. 그러다 한 달쯤 뒤에는 타파의 기일이라는 이유로 수도에 돌아오게 되고…….

타파의 기일?

이전 생에선 날씨가 추워지는 즈음이 타파의 기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몇 개월이나 앞질러 죽었지 않은가.

몹시도 씁쓸한 말이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그리고 타파의 기일이 봄으로 바뀐 지금, 이 세상의 일리안 하인리히가 어째서 수도에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자신이라는 존재가 결국 라울의 죽음마저 당긴 것일까?

타파의 죽음을 당기고, 그 톱니바퀴에 맞물려 라울의 죽음마저 자신이 바꿔 버린 걸지도 모른다. 일리안 그 사실을 깨닫고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세상의 반대편에선 태풍을 일으킨다. 일리안은 이제껏 자신이 조금씩 바꾸어 버린 미래가 어떠한 의미로 돌아오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라울의 나이는 아직 다섯 살에 불과했다. 어미의 품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그 아이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라울, 잠깐만.”

이런, 울면 안 되지. 우리 라울.

일리안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간 제 몸을 벽 뒤로 숨겼다. 공작성에 다다르던 찰나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를 먹은 이답지 않게 일리안 하인리히는 단단한 몸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 일리안 하인리히의 품에는 갓난아기였을 때에 보았던 것보다 조금 큰 라울이 여자의 어깨를 짚고 안겨 있었다.

“배고픈가? 흠, 밥은 먹었는데…….”

일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제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 같아 입술을 짓씹었다. 육아에 서툴렀던 자신은 라울을 키우느라 이런저런 고민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어쩌면, 40년이라는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5년이기도 했다. 적어도 라울이 살아 있던 동안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그녀에게 라울을 발로란 산으로 데려가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닳고 닳은 용병인 그녀가 처음 본 아이의 말을 들어줄 리 없었고, 무엇보다도 제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야만 했다.

라울은, 적어도 라울만은.

일리안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댔다.

* * *

“비앙카, 갑작스럽게 해서 미안합니다.”

“별말씀을요. 이미 부탁해 두셨던 거고,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기도 했어요.”

넓은 마차 안에서 비앙카와 마주 보고 앉은 일리안은 흔들리는 바깥세상에 잠깐 시선을 주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슬슬 눈이 내리고 있는 걸 봐서는 아무래도 발로란 산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마차는 후작 가문의 것이었다. 그 언젠가 세르앙 가문에 가기 위해 빌렸던 마차보다도 넓은 내부에 구경할 만도 했지만, 일리안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똑똑.

마차에 달린 조그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리안이 흠칫 놀랐다. 여행을 시작한 뒤부터 내내 정신이 없는 것 같았던 그녀가 창문을 열었다.

“곧 산에 들어서는 모양이야. 길이 다듬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멀미가 날 수 있으니까.”

말에 타고 있던 에릭이 마차에 붙어 창 너머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종이로 포장된 멀미약 2정이 있었다.

“……고맙다.”

“바람 들어가겠다. 창문 닫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던 창문이 닫혔다. 그런 일리안과 에릭의 모습을 보고 남몰래 웃던 비앙카가 따뜻한 물 한 잔을 찻잔에 담아 건네었다.

“기사라기엔 너무 다정하신걸요.”

“오랜 친구라 그렇습니다. 예전부터 세심한 편이었죠.”

그래요? 비앙카가 관심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일리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는 제 손에 쥐어진 멀미약의 포장용지를 찢었다. 비앙카가 건넨 물과 함께 꿀꺽, 약을 삼켜냈다.

멀미약에 진정 효과가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라울과 서른다섯의 일리안 하인리히를 확인하고서 공작성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린 뒤부터, 묘한 불길함에 초조하기 짝이 없던 터다.

하다못해 위험한 임무를 들어갈 때조차 긴장해 본 적이 없던 일리안이었다. 추워서인지 희미하게 떨리는 제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었다.

“뭔가,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건가요?”

“예?”

“윈터 영애의 얼굴에 그렇게 감정이 드러나는 건 처음 봐서요.”

일리안은 손을 들어 제 얼굴 곳곳을 매만졌다. 얼굴에 물씬 드러난 당황이 그녀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헤이븐 윈터가 된 뒤부터, 자그마치 5년을 기다려 온 일이었다. 자다가도 문득문득 깨어나 라울이 살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보 길드로 매를 날려댔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아들이었다, 라울은.

적어도 이번 생에서만큼은, 예전처럼 그리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위험한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영애를 기다리는 분들이 많잖아요.”

저도 그렇고. 덧붙이듯 중얼거린 비앙카는 제 앞에도 따뜻한 물이 담긴 찻잔을 들어 한 입 짧게 마셨다. 다시 내려둔 찻잔의 수면이 흔들리는 마차 탓에 미약하게 파동을 일으켰다.

“절… 기다리는 사람 말입니까?”

“설마 모르신다고 하는 건 아니겠죠? 바깥에 기사분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공작 전하가 계시잖아요.”

율리어스의 얼굴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라울이 죽었던 223년의 겨울에 일어났던 일과 아무 연관도 없는 남자였다. 발로란 산에 올 일조차 없는 이인데, 갑작스레 생각난 것은 왜였을까.

만약 일이 잘못되어 자신이 죽는다면 이번 생에는 제 죽음을 슬퍼해 줄 이들이 제법 많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잘된 일인지, 혹은 안 된 일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죽음이란 무릇 떠난 이보다 남은 이에게 더 짐을 지우는 일이었다.

“어머, 도착한 모양이네요.”

“……벌써 말입니까?”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숙소를 고민하는 일리안에게 비앙카가 제안한 것은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다면 자신의 별장에 가자는 것이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을수록 좋았던 일리안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올랐다.

그러나, 발로란 산에 들어선 지 겨우 30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산을 넘어 눈의 도시라고 불리는 발로란에 이르려면 아직 서너 시간은 더 달려야만 했다.

“제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가문의 별장은 산속에 있답니다. 발로란 산 일부가 제 가문의 영지라…….”

비앙카의 말을 뒤로한 일리안은 먼저 멈춰 선 마차에서 내렸다. 땅에 발을 디딘 일리안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하얗게 물들어 버린 정경이었다.

“혹시 발로란에 가야만 했던 거면 숙소를 다시 잡아도 좋아요. 지금은 한참 눈의 축제가 열릴 시기니…….”

“아닙니다, 비앙카.”

일리안은 새하얗게 물든 너른 눈밭을 바라봤다. 사람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그곳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게 아름다웠다.

“위치가… 마음에 듭니다.”

* * *

일리안과 비앙카는 거의 윈터 가문의 저택과 비슷한 크기인 저택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건물 두 개가 이어진 별장은 겨울 별장이라는 이름답게 나무 지붕 위에 눈이 쌓여 있었다.

그들이 들어가자 관리인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비앙카는 그에게 손짓하고는 일리안에게 돌아섰다.

“헤이븐의 방은 저쪽이에요. 그리고 기사분은…….”

“실례가 아니라면, 헤이븐 님과 가까운 방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창고도 상관없습니다. 에릭이 무뚝뚝한 얼굴로 덧붙였다.

“이곳에서까지 야간 호위를 할 필요는 없는데, 에릭.”

“미안하지만 타피아에게 부탁받은 일이야.”

에릭이 몸을 돌려 제 뒤에 선 일리안을 내려다봤다. 그와 눈빛이 부딪친 일리안은 타피아의 부탁이라는 말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한발 물러섰다.

“그럼 기사분께선 맞은편 방을 쓰세요. 그리고 전 여기 별관이 아니라 본관을 쓴답니다. 참고로, 교양학 논문을 완성하러 왔으니 며칠간 급한 일이 아니면 방해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네요.”

비앙카는 빙긋 미소 지으며 일리안을 향해 말했다. 또한, 에릭이 보이지 않는 범위에서 그녀를 향해 짧게 찡긋거리기도 했다.

일리안의 따로 행동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부러 바쁜 척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곧 그녀도 수업을 졸업할 나이니 교양학 논문을 쓴다는 게 모두 거짓말은 아닐 터다.

외에도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남긴 비앙카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관리인도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는 말과 함께 비앙카를 따라갔다.

일리안과 에릭, 둘만 남게 되자 어색해진 분위기에 그녀가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뭐……. 짐도 별로 안 가져왔지만 일단 풀어볼까.”

어색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마차에서부터 제 손으로 들고 온 짐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에릭이 능숙하게 그 짐 가방의 아래를 받쳐 자신이 대신 들고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제 짐을 뺏긴 일리안은 잠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에릭을 따라갔다.

“내가 해도 상관없는데.”

“이런 일 하려고 따라온 거야.”

비앙카가 안내해 준 방의 문을 연 에릭은 그 안에 짐 가방을 내려뒀다. 방 안은 깔끔하고 무난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헤이븐.”

“왜.”

방 안을 둘러보던 일리안은 에릭이 아직 방에서 나가지 않았음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직 우두커니 서 있던 에릭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움직이지 마.”

“뭐?”

“혼자 움직일 생각은 말라고.”

단지 그 말을 남긴 에릭은 쿵 방문을 닫고 떠나 버렸다. 통보와도 같은 말에 얼굴을 찡그린 일리안이 홀로 중얼거렸다.

“귀신같은 놈.”

오전부터 출발했지만 겨울의 해가 짧아 바깥은 벌써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방의 크기만큼이나 넓은 창문을 손가락으로 훑던 일리안이 바닥에 내려뒀던 짐 가방으로 향했다.

커다란 가방 속을 뒤져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장갑이었다. 검은색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갑은 한겨울 속이어도 따뜻할 것 같았다.

그 장갑을 손에 쓴 일리안이 커다란 유리창을 바라보다 이내 그것을 벌컥 열었다. 그와 동시에 눈이 섞인 찬바람이 방 안으로 휘몰아쳤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긴 했지만 그래도 일 층이었다. 비앙카와 약속한 대로 1층에 있는 창이 큰 방을 얻은 일리안이 훌쩍 뛰어내려 눈밭을 밟았다.

“……젠장, 겨울도 덜 왔는데 뭐가 이렇게 추워?”

일리안은 벌써부터 얼어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입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었다. 태양열이 작열하는 한여름에 모래밭을 구르거나 폭설이 내리는 산을 넘는 것쯤은 이전 생에서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일도 있었는데.

하루는 눈이 내리는 산속에서 동료와 함께 조난을 당한 적이 있었다. 눈 속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는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던 것은 모두 일리안이 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이었다.

일리안은 그때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미 정보 길드에 언질을 해둔 뒤였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움직이는 이유는 미리 발로란 산의 지형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사람이 다니는 길인 별장의 주변에는 새파란 마법 조명들이 죽 이어져 있었다.

일리안은 새까만 어둠 사이로 일직선으로 이어진 조명들을 바라봤다. 여느 겁 많은 이라면 무섭다고 도망갈 정도로 캄캄한 밤이기는 했다.

귀신은 조금도 무섭지 않으니 웬 몬스터만 안 나타나면 좋겠다. 일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 등에 메고 있는 활과 화살을 매만졌다.

아니, 아니다. 귀신도 괜찮고 몬스터도 괜찮으니까.

제 아들인 라울만 이곳에 나타나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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