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나는 네가 궁금해
“……율리어스 님께서 절 말입니까?”
“그럼요.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나요?”
“비앙카, 그게 아닙니다. 그는 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말을 잇던 일리안은 문득 입을 닫았다. 그와의 복잡한 인연을 비앙카에게 이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일리안에겐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렸을 때 자신을 구해줬던 일리안 하인리히에게 심적으로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일리안은 잠시 의문이 들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단지 그를 구해주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 깊은 곳을 차지했다면, 그는 어째서 헤이븐 윈터에게도 신경을 쓰는 걸까.
“기사분일 때는 칼처럼 냉정하게 아시더니 공작 전하는 아닌가 보네요. 그분이 헤이븐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정말 모르시겠어요?”
“그게 무슨…….”
비앙카는 말없이 눈동자를 움직여 율리어스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일리안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가 말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먼 곳에 서 있던 율리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리안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눈을 피해 다시 비앙카에게 눈을 돌렸다.
“비앙카,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가 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겠죠.”
그가 자신에게 눈길을 많이 준다고 해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리안 하인리히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니 관심이 가는 것인 게 당연했다.
“기사분의 일은 제 일이 아닌 것처럼 객관적이시더니, 윈터 영애도 본인 일은 어려우신가 보네요.”
“예?”
“헤이븐도 좋은 마음이 있으니 헷갈리시는 게 아니겠어요?”
비앙카는 부채로 제 입을 가리며 낮게 웃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헤이븐 윈터와 율리어스가 은밀한 로맨스라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일리안은 이럴 때에 변명을 해봤자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러니 대신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저, 비앙카. 실례가 아니라면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부탁이요?”
비앙카가 부탁이라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며 몸을 가까이했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요량이었다.
그에 반해 일리안은 묘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비앙카는 그런 일리안의 얼굴을 보며 어려운 부탁이라도 꼭 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와… 잠시 여행을 다녀와 주실 수 있습니까.”
“여행이라니……. 영애와 제가요?”
일리안과 비앙카는 파란 화원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제법 묘한 인연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을 가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귀족 영애들이 여행을 가는 경우는 잦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자신들의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보통은 계급이 엇비슷한 이들이 가는 경우가 많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 계급이 낮은 쪽이 시녀 위치로 따라가는 게 전부였다.
남작인 일리안과 후작 영애인 비앙카 사이에는 꽤 격차가 있었다. 그녀와 여행을 간다고 해서 비앙카에게 큰 손해는 없었지만 일리안에겐 아니었다. 비앙카에게 붙었다며 꼬리표가 붙을 것이 눈에 선했다.
비앙카는 그녀가 도대체 왜 자신에게 손해만 되는 부탁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찌푸렸다.
“이유가 뭔가요?”
“정확히는 여행 간 시늉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일리안은 담담한 얼굴로 비앙카를 바라봤다.
“제 시녀도, 기사도 데려가지 않을 겁니다. 영애께서는 하인을 데려와도 좋지만 입이 무거운 자들이어야 합니다.”
“잠깐만요, 혹시…….”
“예. 저는 따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비앙카는 그제야 일리안이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겐 아무래도 홀로 움직일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뭐, 아버지께는 잠깐 놀러 다녀온다고 하면 되겠지.
헤이븐 윈터는 지금도 충분히 장래 있는 사업가였다. 거기다 공작 전하와 잘 될 수도 있는 이라면 친하게 지낼 이유야 충분했다.
다른 것은 모두 차치하더라도, 그녀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비앙카는 이해손실을 따지지 않고 일리안을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좋아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멀지 않은 곳입니다. 발로란에 갈 생각이라.”
발로란은 수도에서 발로란 산맥을 넘으면 나오는 도시였다. 높은 고지대의 발로란은 특히 겨울이 되면 많은 눈이 내리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라울이 죽은 곳이기도 했다.
* * *
“여행이라니요, 헤이븐 님?”
“말했잖아. 바르트 가문의 비앙카와 발로란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고.”
“거긴 엄청 춥잖아요!”
타피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헤이븐의 뒤를 따라갔다. 슬슬 겨울의 초입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도인 드발릭은 그나마 견딜 만한 축에 속했지만 발로란은 아마도 벌써부터 폭설에 시달리고 있을 터였다.
“옷을 따뜻하게 입으면 되지.”
“헤이븐 님은 수도 밖으로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으신데…….”
“타피아, 걱정은 좋지만 말했잖아. 아직 1달은 더 남았다고.”
일리안은 걱정하는 타피아를 능숙하게 달래며 복도를 걸어갔다. 타피아는 그런 일리안을 따라가다 한숨을 푹 쉬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너무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테니까.”
타피아의 머리를 쓰다듬은 일리안은 웃는 얼굴로 타피아를 두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향한 곳은 윈터 저택에 존재하는 실내 연무장이었다.
이전에 이곳을 이용하는 이는 일리안이나 이따금씩 디노가 전부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아니었다. 연무장에 들어선 일리안이 벽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자 연무장에 있던 이가 고개를 돌려 일리안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목검을 들고 나무토막을 겨누고 있던 이는 에릭이었다.
일리안은 에릭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요즘 열심히 한다.”
“……원래도 열심히 했어.”
“아닐걸. 무도회에 다녀온 뒤로 유난하잖아.”
에릭은 무도회에 다녀온 뒤로 입을 꾹 닫은 채 열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일정을 따라다니느라 어쩔 수 없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묵묵한 그 얼굴 속에서도 그가 아직 토라져 있다는 것은 여실히 드러났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일리안은 에릭도 아직 스무 살이라는 생각에 짧게 웃었다. 물론 그가 눈치챌 수 없도록 아주 잠깐이었다.
“타피아가 걱정해. 너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고.”
“……내가?”
“타피아는 남 기분에 예민한 편이거든. 눈치가 빨라.”
일리안은 벽에 걸려 있던 목검을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어서 화 풀어. 우리가 싸웠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싸웠다고? 우리가?”
느릿하게 목검을 고르던 일리안은 결국 자주 사용하던 것을 골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차분히 에릭의 앞까지 다가와 목검으로 에릭을 가리켰다.
“아니면, 진짜 싸울까?”
그러면 화가 풀리겠어?
그것은 일리안만의 화해 방식이었다. 누군가와 트러블이 일어날 때면 말로만 사과하고 받아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번 크게 치고받는 게 나았다.
이윽고 일리안의 목검을 주시하던 에릭이 입을 열었다.
“대결해서, 내가 이기면.”
“이기면?”
“여행에 날 데려가 줘.”
“뭐?”
무도회에서 돌아온 직후 일리안은 비앙카와 여행을 가겠다고 통보했다. 또한 그 여행은 비앙카와 단둘만의 여행이니 디노도, 타피아도 데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였다.
물론 데려가지 않는 인원에는 에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입을 꾹 다물었던 에릭이 갑작스레 제 의견을 내니 난감한 것은 일리안이었다.
“여행이라니. 그건 비앙카와,”
“그럼 발코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줘.”
그 이야길 들은 일리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릭의 얼굴로 보아 농담을 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좋아. 네가 이기면 여행에 같이 가자.”
“……응.”
“대신, 내가 이기면 화 푸는 거다.”
일리안은 제 롱소드보다 1뼘 정도 짧은 길이의 목검을 손에 쥐고 반듯하게 자세를 잡았다. 가이우스의 제자임을 증명하듯 정석적인 자세였다.
에릭 또한 그간 허투루 기사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닌 듯했다. 일리안과는 달리 반쯤 기울여 장도를 손에 쥔 그는 묵묵한 얼굴로 자세를 취했다.
먼저 다가온 것은 에릭이었다. 빠르게 다가온 검에 일리안은 겨우 그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체격 차를 무시할 수는 없는지 눌러오는 힘에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어차피 정식으로 기사가 된 에릭을 이길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대외적으로 고작해야 주에 몇 번씩 검술 수업을 받던 남작 영애였고, 그는 근 3년간 검술에만 몰두해 있던 이였다. 자신이 그를 이기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리안은 티가 나지 않도록 그와 검을 몇 번 주고받았다. 그러다 에릭의 크게 아래로 가로지르는 목검을 맞은 일리안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텅, 터엉…….
일리안은 얼굴을 찌푸린 채 제 손목을 살살 흔들었다. 그의 힘이 영 힘들다는 듯 옅은 자조감도 섞여 있었다.
“많이 배웠네.”
“응. 렉스 기사단장이 베기만 몇만 번을 시켰거든.”
그 말에 짧게 웃은 일리안이 바닥에 떨어진 제 목검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에릭은 그런 일리안의 모습을 눈에 담다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분이 그러셨어. 네가 쌍검을 할 줄 안다고.”
“……뭐?”
목검을 줍던 일리안은 순간 멈칫했다. 허리를 세워 그를 바라봤을 때에는 이미 그가 벽에 걸려 있던 짧은 단검 두 개를 가져온 뒤였다.
“다시 하자.”
“나는… 단검은 배워본 적이 없는데.”
“그럼 그냥 롱소드처럼 다루어도 좋아.”
에릭은 이미 다시 자세를 잡은 뒤였다. 이번에는 심지어 에릭 또한 목검이 아니라 진검이었다. 단검 두 개를 받아 든 일리안이 곤란한 얼굴로 에릭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은 에릭이 검을 세운 채 일리안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내가 이기면 발코니에서의 일을 말해줘.”
“인마, 이미 여행에 따라간다고 해놓고서.”
“그럼 네가 이기면 되겠네.”
곧바로 그는 거두절미하고서 순식간에 치고 들어왔다. 고작 남작 영애를 상대하는 것치고는 몹시도 거침없는 태도였다.
그 기세에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단검을 손에서 빙글 돌려 역수로 쥐었다. 그와 동시에 끼긱, 하며 일리안의 단검과 에릭의 검이 부딪쳤다.
“헤이븐.”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 에릭은 맞대었던 검을 떼었다가 곧바로 검을 눕혀 허리를 찔러 들어갔다. 검신의 폭이 좁은 단검으로는 분명히 막기 어려운 공격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의 몰아치는 공격에 자신도 모르게 단검을 아래로 내려 그것을 막아냈다. 고작해야 검술 수업이나 들은 남작 영애라기에는 몹시도 빠른 손놀림이었다.
곧이어 일리안이 막아선 단검을 튕겨 에릭의 검을 뿌리쳤다. 그가 다시 검을 움직이기도 전에 일리안의 반대편 손이 움직였다.
눈을 깜빡였을 때에는 이미 일리안의 단검 하나가 에릭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에릭은 눈을 내려 그런 단검을 바라보고선 제 바로 앞에 있는 일리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네가 궁금해.”
일리안은 그 말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목검도 아니고 진검을 진심을 다해 휘두르는 에릭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예전 기술이 나왔다. 고작해야 스무 살 애송이의 도발에 넘어갔으니, 렉스가 웃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둘만 있던 연무장에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일리안과 에릭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들어온 이를 확인했다.
디노였다.
“헤이븐 님, 공작성에 일리안 하인리히 님이 오셨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