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헷갈리지 마세요
“율……!”
발코니에서 새어 나오는 달빛으로 율리어스의 얼굴을 확인한 일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와의 거리가 몹시도 가까웠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그녀의 부름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싸 발코니로 끌어들였다. 그의 팔 안에 쏙 안긴 일리안이 발코니로 들어감과 동시에 커튼은 다시금 쳐졌다.
“율리어스, 잠깐, 지금은 나가야……!”
그를 발코니에서 데리고 나오기는커녕 도리어 끌려 들어간 일리안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에 발코니 난간을 밟고서 율리어스의 뒤로 다가오는 검은 옷의 사내가 보였다.
일리안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느꼈다. 상대가 누가 보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율리어스의 어깨를 짚어 그를 밀어낸 일리안이 챙겨두었던 나이프로 그 단검을 막아냈다. 율리어스가 눈동자만 돌려 제 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사내의 단검을 나이프로 간신히 막고 있는 사이 움직인 것은 율리어스였다. 그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사내의 몸이 공중으로 들리며 난간 너머로 추락했다.
털썩.
난간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일리안이 나이프를 쥔 채 취하고 있던 자세에서 그제야 힘을 풀었다. 고작 식사용 나이프였지만, 그것을 다루는 모습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율리어스가 위험하다고 판단이 든 순간, 손이 움직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마법 실력을 알기에 그가 다칠 위험은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미처 생각을 하기도 전에 해낸 일이었다.
나이프를 쥐고 있던 일리안이 테라스의 창살로 다가갔다. 허리를 조금 숙여 아래를 바라보았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도망간 모양이었다.
그 광경에 눈을 찌푸리고 있자 등 뒤에서 율리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일리안이 보낸 이인가?”
“……아닙니다.”
그녀가 방금 사내를 처리한 것은 율리어스의 호위를 하는 동안 드물게 일어났던 일이기도 했다. 자신이 아는 일리안 하인리히와 검을 다루는 모습이 똑같으니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네가 만약 일리안이 보낸 사람이라면, 받아들이겠다.”
일리안은 천천히 뒤로 돌아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달빛을 받은 흰 얼굴이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전 일리안 하인리히가 보낸 사람이 아닙니다. 하물며, 일리안 하인리히도 아닙니다.”
“…….”
“그러니, 절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일리안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헤이븐 윈터로 살고자 한다면 더 이상 율리어스와 연관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또한, 감히 자신이 율리어스의 걱정을 하는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제는 그와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율리어스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그를 보러 와서는 안 되었다.
일리안은 그 사실을 씁쓸히 곱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율리어스를 지나쳐 발코니를 나가려는 참이었다.
율리어스가 문득 일리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지 마라.”
“무슨…….”
“바깥은 위험하니, 이곳에 있으라는 말이었다.”
직접 보는 편이 더 안심되니까.
율리어스는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일리안 하인리히와 연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말을 듣고서야 일리안은 어째서 율리어스가 발코니로 자신을 끌어당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애초부터 자신을 찾고 있던 것이었다.
* * *
“…….”
“…….”
넓은 발코니에서 일리안과 율리어스는 둘 다 말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리안은 발코니 한쪽 구석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눈앞에 펼쳐진 정원을 바라봤다. 달빛이 제법 환한 게 지금이 위험한 상황인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5년 전 즈음에도 율리어스와 함께 달빛을 바라보았는데.
힐끗 그를 쳐다봤지만 율리어스는 가만히 서서 밖을 볼 뿐이었다. 그때의 소년 같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채 이제는 스무 살 청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이렇게 불편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율리어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모른 척했었고, 자신 또한 그에게 섣불리 다가가는 게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아 피해 다녔다. 근 1년을 그렇게 지내다 이제와 둘만 있으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일리안은 무거운 분위기에 잠시 꺼낼 말을 고민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율리어스 님.”
“…….”
“이만 나가봐도 됩니까?”
자리가 불편하니 피할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일리안의 말에 대답이 없던 율리어스가 스윽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바깥은 위험하다고 했을 텐데.”
“……보셨겠지만 제 무위가 그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습니다.”
“그 검으로 내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다면, 허락해 주지.”
율리어스가 간단한 실드 마법만 걸어도 일리안은 그것을 깰 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차마 칼을 들고 율리어스에게 휘두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율리어스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구는 것인지는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일리안 하인리히와 연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서.
“절 걱정하시는 겁니까.”
“헛소릴 하는군.”
“그럼 대체 왜 못 나가게 합니까?”
율리어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신경 쓰이니까.”
그는 툭 내뱉고서 이내 다시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일리안은 그의 대답을 듣고도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찌푸렸다.
“……저는 일리안 하인리히가 보낸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다고 하던가?”
“그러니 제게서 일리안 하인리히를 투영하지 마세요.”
더 이상 일리안 하인리히를 기다리지 마.
일리안은 어쩌면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가 기다리는 이 세상의 일리안 하인리히는 죽어도 그를 돌아보지 않을 텐데, 그가 이렇게까지 구는지는 조금도 알지 못할 텐데.
그 순간, 일리안은 이전 생에서의 율리어스를 떠올렸다. 자신이 죽고 난 뒤 그 세상의 율리어스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투영? 웃기는군.”
일리안은 멍하니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내가 네게 그녀를 투영했다면.”
“…….”
“너는 내 성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했다.”
그 세상의 율리어스는… 잘 지냈을까.
정원을 바라보는 율리어스의 옆모습은 몹시도 아름다웠지만, 또 그만큼이나 차가웠다. 그런 그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조금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커튼의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회장의 조명이 고쳐진 모양이었다. 동시에 사람들의 분주한 목소리도 들려왔으니, 이제는 슬슬 발코니를 나갈 시간이었다.
“……상황이 정리된 모양이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리안은 굳이 그의 동의를 듣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또한 더 이상 자신을 잡아둘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터운 커튼을 걷던 일리안은 뒤에서 낯익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았을 때에는 율리어스가 큰 키로 그녀의 뒤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을 셈인가.”
율리어스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일리안이 먼저 발코니를 빠져나갔다. 바깥은 다행히 큰 소동이 벌어지진 않은 듯, 몇 개의 테이블이 쓰러진 게 전부였다.
그런 일리안의 눈에 저 멀리서 의자에 앉아 있는 비앙카가 보였다. 한껏 공들인 머리가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한 모습이었다.
“비앙카! 괜찮아요?”
“윈터 영애! 대체 어딜 갔던 건가요? 당신을 찾으려고,”
비앙카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율리어스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비앙카가 헛숨을 들이켜며 순간 딸꾹질을 했다. 그리고 그런 비앙카의 곁에는 에릭이 서 있었다. 비앙카는 율리어스의 눈치를 보느라 머뭇거리면서도 일리안에게 물었다.
“윈터 영애, 당신을 찾으려고 이 기사분이 어찌나 물어보고 다니셨는지……. 어디 있다 온 거예요?”
회장 내에는 아무래도 귀족들의 호위 기사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온 모양인지 검을 찬 사내들이 곳곳에 보였다.
일리안이 비앙카의 말을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인 것은 에릭이었다. 그녀에게 성큼 다가온 에릭이 그녀의 양팔을 제 큰 손으로 감싸고 눈을 마주쳐 왔다.
“괜찮아?”
“……어, 괜찮은데.”
에릭은 그 대답을 듣고도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인지 일리안의 몸 곳곳을 살폈다. 한낱 기사가 하는 행동이라기엔 몹시도 가까워 보였다.
“윈터 가문의 기사는 제 주군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모양이군.”
그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율리어스가 일갈했다. 그의 얼굴은 무미건조했지만 어딘지 불쾌해하는 기색이 있었다.
에릭은 일리안의 양팔을 놓고서 허리를 곧게 세웠다. 율리어스와 눈높이가 비슷한 그가 제대로 서자 그 사이에 낀 일리안은 고개를 들어 자신보다 한참 큰 둘을 바라봐야만 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에릭이 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율리어스를 노려봤다.
“……발코니에 함께 있다 나오시는 걸 봤습니다. 뭘 하다 오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남녀가 들어가면 온갖 소문에 휩싸이는 곳이 바로 발코니였다. 안 그래도 열애설이 나도는 상황에서, 율리어스와 일리안이 발코니에서 함께 나오는 모습을 발견한 귀족이 몇몇 있었다.
마지막에 함께 있던 비앙카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었던 에릭 또한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뜨겁게 타오르는 눈으로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대답할 이유가 없군.”
말을 마친 율리어스는 일리안을 힐끗 바라보고선 이내 걸음을 옮겼다. 가이우스가 저 멀리서 율리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 겨우 두 사내들 사이에서 편히 숨을 쉴 수 있게 된 일리안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에겐 남은 사람이 있었다.
“……뭘 했어?”
“뭐?”
“발코니 안에서 뭘 했느냐고.”
에릭은 일리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제 주인을 바라보는 기사라기엔 위험해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에릭. 넌 내 호위 기사지, 날 감시하는 이가 아닐 텐데.”
“……그래서 말할 수 없다고?”
에릭이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을 때였다. 회장 내부에 마법으로 음량을 높인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회장 내에선 아무 일도 없었던 터라 다시 무도회를 재개할 예정이니 호위 기사들은 모두 나가 달라는 내용이었다.
젠장, 하고 중얼거린 에릭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떠나는 걸음걸음마다 힘이 실린 것이 화가 난 이 같기도 했다.
두 남자가 모두 떠나자 곁에서 눈치를 보던 비앙카가 다가왔다.
“윈터 영애, 괜찮아요?”
“저야 별일 없었습니다만, 비앙카는요?”
“아니, 그거 말고요. 공작 전하와 기사분의 사이가 영 좋지 않은 것 같던걸요.”
에릭과 율리어스는 접점이 없는 사이였다. 더군다나 고작 기사에 불과한 에릭은 공작인 율리어스에게 감히 대들 수 없는 위치였다.
“기사분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어요. 주제넘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저 녀석이 절 좋아한다고요?”
“어머. 알고 계셨어요?”
일리안은 사람들 사이로 멀어져 가는 에릭의 등을 바라봤다.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온갖 인간을 만나본 일리안은 에릭이 가진 감정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일리안은 알고 있었다. 에릭이 지금 가진 감정이 언젠가는 모두 지나갈 일이라는 것을. 지금에야 뜨거운 사랑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식을 터다.
“그건 녀석이 해결해야 할 일이지, 제가 해결해 줄 건 아닙니다.”
“……생각보다 냉정하시네요. 그럼 공작 전하는요?”
“예?”
비앙카가 눈을 깜빡거리며 일리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몹시도 당연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공작 전하께서도 헤이븐을 좋아하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