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45화 (45/123)

45. 신경이 쓰여서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훈련을 마친 에릭의 눈에는 졸린 기색이 없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정갈한 제복을 차려입고 일리안이 있는 의상실로 향했다.

똑똑.

에릭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일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릭이지? 들어와.”

“잠, 잠시만요!”

들어오라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벌컥 문을 연 에릭은 그 뒤에 다급하게 따라온 타피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문을 열고 제 눈에 들어온 광경을 모조리 목격해야만 했다.

일리안은 흰색 속옷 차림이었다. 물론 귀족 영애들의 속옷이란 무릇 몇 겹이고 겹쳐 입기 때문에 그다지 살갗이 드러난 부분은 없었지만, 어찌 됐든 속옷 차림이라는 게 중요했다.

“헤이븐 님, 아직 옷도 안 입었는데 방에 들이시다니요!”

“어? 뭐, 이미 입을 건 다 입었잖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에릭은 황급히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이미 목까지 붉게 달아오른 뒤였다.

여름에는 그나마 간소했던 복장이 슬슬 날이 추워지자 내의는 점점 더 두터워지고 있었다. 물론 평민이었던 일리안에게는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한 속옷들이 대부분이었다.

“타피아 네가 뭘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라며. 에릭, 뒤돌아 있지 말고 이것 좀 봐. 어떤 게 낫냐.”

에릭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차마 곧바로 뒤돌지 못하고 제 얼굴 근처를 매만졌다. 아침부터 정원을 달리고 오느라 차게 식은 손과는 달리 후끈하게 달아오른 열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후, 하고 작게 숨을 내쉰 에릭은 이내 다시금 뒤로 돌았다. 그곳엔 2벌의 정장을 앞에 두고 일리안과 타피아가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일리안은 아직 흰색 속옷 바람인 채였다. 에릭은 저건 속옷이 아니라 그냥 흰 옷이다, 라고 제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이 자줏빛 정장은 좀 튀는 것 같은데. 남색이 어때?”

“아니라니까요, 헤이븐 님! 이 정도는 무도회에서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아요! 무엇보다 헤이븐 님은 피부색이 희어서 자줏빛이 더 잘 어울려요. 그렇죠, 에릭 경?”

처음엔 에릭이 들어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던 타피아도 곧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친구라는 것을 알기에 넘어가는 눈치였다. 이곳에 있는 3명 중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하는 이는 에릭밖에 없었다.

에릭은 자꾸만 일리안에게 시선이 돌아가려는 제 눈을 정장 2벌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주색이 낫네.”

“역시 그렇죠?! 제가 이걸 찾겠다고 수도 내에 있는 의상실을 모두 뒤져봤다니까요!”

“그래?”

흐음, 하던 일리안은 이내 순순히 그 정장을 손에 들었다. 곧바로 타피아의 도움을 받아 정장을 입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게 생긴 에릭은 슬쩍 일리안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너머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곧 옷을 모두 차려입은 일리안에게 다가간 타피아가 흰색 크라바트를 목에 매주었다. 타피아에게 자연스럽게 옷 시중을 받던 일리안이 고개를 돌리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에릭을 발견하곤 픽 웃었다.

“다 되었어요. 오늘도 정말 멋지셔요, 헤이븐 님!”

“그런가. 내 눈엔 영 어려 보이기만 하는데.”

거울 앞에 선 일리안이 제 모습을 훑어봤다. 짙은 자줏빛 의상에 색이 빠진 붉은 머리를 한 아이는 소년 같으면서도 이제는 슬슬 여성스러운 체격이 드러나고 있었다. 풍성한 크라바트로 가슴팍이 가려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볼륨감이 있었다.

“……그리고 저번보다 좀 더 딱 붙는 것 같다.”

“디자이너님이 말씀하시길, 이번엔 좀 더 선을 강조한 옷이라고 하셨어요.”

에릭은 멍하니 옷을 모두 차려입은 일리안을 바라봤다. 매끄럽게 내려오는 바지의 곡선이 그녀의 허리 라인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엉덩이에 걸쳐지는 겉옷이 그것을 아슬하게 가렸다. 무엇보다도 바짓단 아래에 슬며시 드러난 흰 발목은 꽉 쥐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예전엔 그저 귀족 소년들의 옷을 입는 줄로만 알았는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일리안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저런 옷을 입고 소화할 영식도, 영애도 없을 터였다.

에릭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예쁘네.”

“정말요, 에릭 님?! 보세요. 이 옷이 가장 잘 어울린다니까요!”

귀신같이 에릭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타피아가 조금 과장된 몸짓으로 일리안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일리안은 어색한 얼굴로 제 볼을 긁적이며 말을 돌렸다.

“그럼, 슬슬 출발하자. 이러다 늦겠어.”

* * *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는 수도 내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니만큼 넓었고, 그만큼 사람도 많았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부인도 있었고 과할 정도로 화려한 색을 고른 영식도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일리안은 특별했다.

일리안이 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눈길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얼굴선과 쏙 들어간 목젖은 그녀가 여성임을 알려주었는데, 짧게 자른 머리와 벨벳으로 만들어진 정장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헤이븐 윈터?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귀족 중 1명이 중얼거렸다. 일리안이 리하르트 가문의 피후견인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뒤부터, 그녀는 율리어스와 열애설에 끊임없이 휘말려야만 했다.

거기다 그녀가 제법 수완 있는 사업가라는 소문이 돌자 일리안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끝없이 늘어났다. 영애들 중 몇 명은 일리안이 오늘 입은 옷이 어떤 디자이너의 손에서 탄생한 것인지 추측하기도 했다.

영애들이 일리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리안은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향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왜인지 영애들이 얼굴을 붉혔다.

“오랜만이네요, 윈터 영애.”

“……비앙카 양. 오랜만이군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비앙카가 부채로 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짧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일리안은 그것이 비앙카로서는 최대한의 친절임을 알기에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파란 화원은 어떻습니까.”

“하, 파란 화원을 졸업할 나이는 한참 지났어요. 윈터 영애도 작년 겨울을 마지막으로 발길을 끊으셔 놓고는…….”

그 덕분에 그때 파란 화원의 인원수가 급격히 감소했죠?

비앙카가 냉정한 말투로 덧붙이자 일리안은 음, 하며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그 때문에 리트릭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투정을 들어야 했는지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요즘 분재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예, 맞습니다. 아, 비앙카 양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말씀하세요. 영애처럼 예쁜 분께 꽃 1송이를 바치는 건 영광일 것 같습니다.”

부채로 반쯤 얼굴을 가린 비앙카는 일리안 몰래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헤이븐 윈터는 싫어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직 학업을 마치지 못하셨을 텐데, 대단하시네요. 아, 가르치는 분이 누구셨죠?”

“……겔트 백작입니다.”

“네? 겔트 백작이라면…….”

겔트 백작이라는 이야기에 비앙카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 할 때였다.

“리하르트 공작 전하가 오셨어!”

“어머, 저분이 공작 전하?”

비앙카와 일리안은 동시에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검은색의 깔끔한 제복을 차려입은 율리어스가 표정 없는 얼굴로 회장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옷과는 달리 율리어스의 얼굴은 몹시도 눈에 띄었다. 신이 내렸다고 불리는 그의 외모에 눈길을 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율리어스가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의 눈에 일리안과 비앙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일리안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그런 율리어스와 일리안을 두고 몇몇 이들이 수군거리기도 했다.

“윈터 영애는… 리하르트 공작 전하와 아는 사이가 아니셨나요?”

“……뭐, 그때도 말했지만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닙니다.”

일리안과 율리어스는 그동안 그다지 만날 일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제 침실에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의 소식을 묻는 일도 사라졌다.

그녀를 완전히 멀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일리안은 그것을 마냥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멀어지는 것이 그에겐 좋을지도 모르지.

어찌 됐든 일리안 하인리히라는 존재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자꾸만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자신이 사라져 주는 게 유리가 바라는 것일 터다.

일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니요? 제가 보기엔 헤이븐 님을 바라보는 공작 전하의 눈빛이…….”

“예?”

“……아니에요. 제가 주제넘었군요.”

그러나 비앙카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듯한 얼굴로 율리어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사람들의 눈이 귀찮았는지 이미 두꺼운 커튼이 쳐진 발코니 속으로 모습을 숨긴지 오래였다.

일리안도 그런 율리어스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고작 남작 영애의 도움은 그에게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그럼 이전에 뵈었던 신사분은요?”

“신사……? 아, 리트릭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늘 검은색 프록코트를 입고 오던 분이 계셨는데. 한동안은 윈터 영애 혼자 파란 화원에 오셨지만 그전에는 늘 마중 나왔던 분 말이에요.”

그제야 일리안은 늘 자신을 마중 나왔던 에릭이 떠올랐다. 에릭은 일리안을 따라 황궁에 오긴 했지만 대부분의 호위 기사들이 그렇듯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 친구라면, 제 호위 기사가 되었습니다.”

“어머. 로맨틱하네요. 그분의 이야기가 궁금한데, 한잔하면서 이야기는 어떠세요?”

비앙카가 지나가는 시중의 트레이에서 술 2잔을 들어 그중 1잔을 일리안에게 건네었다.

일리안은 붉은색 포도주가 든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열여섯 살이 되며 음주가 가능한 나이가 되었지만, 술을 마신 적은 없었다. 일이 바쁘기도 했지만 사실 다른 이유가 컸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유명한 주당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렇게 술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일리안과 대작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때문에 용병 일을 하며 많은 술을 마셔야 했는데, 일리안은 이번 생에선 담배는 몰라도 술만큼은 멀리하고 싶었다.

“많이는 못 마실 겁니다.”

“걱정 마세요, 이런 자리에서 취하는 영애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요.”

자신만만하게 웃은 비앙카가 제 딴에는 어른스럽게 포도주를 마셨지만, 몹시도 쓴 모양인지 잠시 눈을 찌푸렸다. 일리안은 그 모습이 제법 애 같아 보여 픽 웃었다.

그리고 일리안은 단숨에 포도주를 비워냈다. 깔끔히 넘어가는 목 넘김에 일리안이 빈 유리잔을 내려다보며 이래서 귀족주인가? 라고 중얼거렸다.

“……술을 잘 마시나 보네요, 윈터 영애.”

“예? 아뇨, 처음 마셔봤습니다.”

물론 헤이븐 윈터의 몸으로서는 처음 마신 것이었다. 용병 일을 할 때에 일리안이 마신 술을 세어보자면 적어도 오크통 몇 개는 나올 수 있었다.

비앙카는 일리안과의 이야기가 재밌는지, 혹은 술이 들어가서인지 처음 인사를 나눌 때보다는 덜 까칠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일리안도 간간이 웃으며 비앙카의 이야기에 대꾸하고 있을 때였다.

깜빡, 깜빡.

회장의 불이 두어 번 깜빡였다.

“응……? 헤이븐, 지금 잠깐 불이 꺼졌던 것 같지 않아요……?”

어느새 헤이븐이라 부르기 시작한 비앙카는 설마 자신이 술에 취했나 싶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팟 하는 소리와 함께 회장을 밝히던 마법 조명이 동시에 꺼졌다.

“꺄아악!”

“침입자다! 침입자가 나타났어!”

불이 꺼짐과 동시에 곳곳에서 큰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비앙카는 두려운 마음에 제 앞에 있을 일리안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렸다.

“헤, 헤이븐? 거기 있어요?”

불이 꺼지고 나서 조용히 주변을 살피던 일리안은 비앙카의 손을 잡아줬다.

“괜찮습니다, 비앙카. 여긴 구석이라……. 잠시 자리에 앉아서 있는 것도 좋겠군요.”

“헤이븐? 어딜 가는 거예요?”

“갈 곳이 있어서. 여긴 안전할 겁니다, 걱정 마세요.”

어둠 속에서 일리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녀는 비앙카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제 옆에 있던 테이블 위의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단검을 다루듯 움켜쥔 나이프에 힘이 실렸다.

만약 침입자가 불을 끈 것이라면, 그들 자신도 혼란스러운 내부에 목표물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불을 껐다는 것은 곧 눈앞이 보이지 않아도 표적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조금 전 발코니로 들어간 율리어스의 뒷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회장에는 여러 개의 발코니가 있었지만 그가 들어간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비앙카의 손을 놓은 일리안은 어둡고 소란스러운 회장 내부를 걸어 발코니로 향했다. 불이 꺼져도 감각으로 방향을 찾는 것은 용병이었던 일리안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벽을 짚고 걸어가던 일리안의 손에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일리안이 그것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으로 차갑게 식은 누군가의 손이 부딪쳤다. 슬슬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일리안은 고개를 들어 그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율리어스가 까만 눈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