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윈터 영애? 아니, 윈터 남작
에릭이 일리안의 기사가 되며 가장 먼저 바뀐 것은 그의 주거지였다. 일리안은 게릭의 집이 그다지 멀지 않은 것을 알기에 설마, 하는 심정으로 ‘에릭, 디노는 집이 지방이라 여기 있는 거고 넌 들어와서 살지 않아도 좋아.’라고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에릭은 기다렸다는 듯 제 짐을 챙겨 윈터 가문으로 들어왔다. 넓은 윈터 저택에서 그에게 줄 방이야 많았지만 일리안에겐 조금은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왜?”
“야간 호위.”
저택은 전적으로 타피아의 소관이기에 일리안은 에릭의 방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에 에릭은 일리안의 바로 옆방으로 배정이 되어 있었다.
일리안이 뒤늦게 에릭의 숙소에 대한 자초지종을 묻자 타피아는 그가 부탁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 난 호위가 필요 없어. 적도 없고 무엇보다,”
웬만한 놈들한테는 안 당하는데.
그 말은 덧붙이지 못한 채 그저 볼을 긁적였다. 가문의 유일한 기사였던 디노조차 방만큼은 일리안과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에릭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헤이븐, 사교 활동을 본격적으로 한다고 들었어.”
“그렇… 지.”
“지금이야 겨우 시작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호위를 붙이게 될 날이 올 거야. 단지 그 날이 조금 일찍 왔다고 생각해.”
에릭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일리안으로서도 제법 오랜만의 일이었다. 꿋꿋한 그의 말에 왜인지 설득된 일리안은 결국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 옆방이든 앞방이든 상관은 없으니까. 대신 네가 힘들다면 언제든 방을 옮겨도 좋아.”
에릭은 그제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의 머릿속에서 방을 뺄 생각은 추호도 있지 않았다.
“그럼 점심도 먹었으니 슬슬 움직여 볼까. 오늘 오후에는…….”
“마르틴 백작의 사교 파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대답이 나오자 일리안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는 에릭이 멀뚱히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분재농원에 가봐야 해.”
“……네가 어떻게 아냐.”
“타피아한테 물어봤다. 오늘만 아니라 내일부터는 내가 네 일정을 담당할 테니 그렇게 알아.”
디노는 분재농원 사업에 힘쓰느라 중요한 자리가 아니면 일리안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꼼짝없이 에릭과 붙어 다니게 된 일리안은 잠시 고민했다.
별일이야 있겠어.
결국엔 그리 생각을 마친 일리안이 윈터 저택의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의 뒤에선 에릭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일리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에릭에게 말했다.
“사교 파티에 가기 전에 분재농원에 먼저 들렀다 가자.”
* * *
“처음 뵙는 분이시네요, 윈터 영애.”
“아, 예. 이쪽은 오늘부터 제 호위를 맡게 된 기사, 에릭 밀튼 경입니다.”
일리안이 제 뒤를 슬쩍 바라보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여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검을 찬 채 말없이 뒤를 지키는 그 모습이 사뭇 달라 보여 일리안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리안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가 관심을 가지자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사내 또한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호오, 이게 누구입니까. 에릭 밀튼 경이요?”
“……며칠 전에 윈터 가문에 들어왔습니다, 마르틴 백작.”
“허허, 제 권유를 거절하기에 꼼짝없이 리하르트 기사단이나 황궁 기사단으로 들어갈 줄 알았습니다만……. 의외로군요.”
마르틴 백작은 수도 내에서 제법 유명한 거부였다. 또한 그의 가문에 있는 기사단 역시 명성이 자자했는데, 마르틴 백작도 에릭에게 러브레터를 보낸 이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하긴, 밀튼 경은 아직 젊은 나이지요. 그때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 법이오.”
마르틴 백작이 길게 자란 제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인자한 인상과는 별개로, 그의 성미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허허. 이거, 원. 주목받는 신예 기사가 선택한 주인이 윈터 영애라니. 이건 아주 재미있는 정보로군요.”
“별말씀을요. 물론, 윈터 가문의 분재농원은 신뢰할 만한 곳이긴 하죠.”
바쁜 일리안이 마르틴 백작의 사교 파티에 참석한 이유는 단 1가지뿐이었다. 몇 년 전부터 열심히 키우고 있는 분재들을 유통해 줄 도매상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와 거래를 트기 위해 일리안은 몇 주 전부터 착실히 마르틴 백작의 눈에 띄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는 없는 편이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볼까요. 윈터 영애께서 이야기하시던 게 그러니까…….”
“이제는 윈터 분재원으로 이름이 바뀐 디버튼 분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그렇지요.”
“이름이 아직 디버튼 분재원일 때에도 이들이 수도 내에서 제법 유명한 곳이었던 것은 귀가 밝은 마르틴 백작께서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귀족가에선 그 유명세가 그다지 높지 못했죠.”
둥근 테이블을 두고 백작 부부와 마주 앉은 일리안은 차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매끄럽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에릭은 그런 그녀의 뒤에 시립해 차분히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흥분해 말을 빨리하지도, 그렇다고 답답할 정도로 느리지 않은 그녀의 이야기는 신묘한 힘이 있었다. 어조의 강약을 조절해 이야기를 꾸며내는 일리안은 사업 이야기라기보다는 재미있는 소설을 읽어주는 것 같았다.
마르틴 백작 또한 처음으로 제대로 듣는 그녀의 분재농원 이야기가 제법 흥미가 가는지 귀를 기울였다.
“윈터 분재원장의 경력은 자그마치 50년입니다. 그의 나이가 육십을 조금 넘었으니, 열 살부터 정원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경력과 실력 있는 정원사들이 귀족가에서 이름을 알리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숙맥이기 때문이죠.”
엄숙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딱딱한 얼굴이었던 일리안이 순간 씩 웃었다. 마르틴 백작은 눈을 끔뻑거리며 그런 일리안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열 살부터 정원 일에 인생을 던지셨으니 분재가 아니라 분재원을 키우는 법은 모르셨던 겁니다.”
“하하! 그렇지. 정원 일을 열 살부터 했으면 다른 건 못할 수도 있겠소.”
“이들의 실력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마르틴 백작님. 공께선 내년 화훼 유통 사업의 큰손이 되실 분이 아니십니까. 아직 가공되지 않은 원석을 알아봐 주시길 바랍니다.”
일리안이 웃으며 말을 마치자 마르틴 백작은 그녀의 이야기가 재밌었는지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옆에 앉은 부인은 사업 이야기가 따분하다는 기색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일리안은 느리게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준비된 냅킨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그녀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냅킨으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르틴 백작이 또 무엇인가, 싶어 그녀의 손에 시선을 뒀다. 백작 부인 또한 매한가지였다.
“윈터 영애는 참 재능이 많소. 이번엔 무얼 하려는 거요?”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걸.”
일리안의 손에서 피어난 것은 하얀색의 냅킨으로 만들어진 장미였다. 그녀가 그 장미를 백작 부인에게 건네었다.
“가장 아름다운 꽃에게 바치겠습니다.”
“어머……. 방금 만들었다곤 믿기지 않는걸요?”
여성인 것은 맞지만 겉모습이 미소년에 가까운 일리안이 꽃을 선물하자 백작 부인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중년인 그녀도 아직은 여자였다.
백작 부인이 냅킨 장미를 받아 들려고 할 때였다. 일리안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제 손을 뒤로 빼내었다.
“……윈터 영애?”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꽃에게 바치기에 이 꽃은 많이 부족하죠.”
그 순간, 일리안의 손에서 눈 깜짝할 새에 흰색 냅킨 장미가 붉은색의 탐스러운 진짜 장미로 바뀌어 있었다.
뒤에 시립해 있던 에릭의 눈에는 흰 냅킨 장미가 테이블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그러나 백작 부부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눈은 둥그렇게 뜨며 놀란 얼굴로 그것을 바라봤다.
“어머!”
일리안이 양손으로 장미 1송이를 바치자 백작 부인이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잠시 놀란 눈치였던 마르틴 백작도 제 부인이 좋아하는 얼굴에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장미가 작은 데도 정말 탐스럽네요. 언제 이런 걸 준비하셨는지…….”
“냅킨으로 만든 장미는 제가 준비한 것이 맞지만, 그 장미는 제가 준비한 게 아닙니다.”
“설마…….”
마르틴 백작이 못 믿겠다는 얼굴로 일리안을 바라보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 분재원에서 올 한 해 길러낸 특수 장미입니다. 다른 종에 비해 크기가 작지만 색깔이 아름답죠.”
백작 부인은 몹시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마르틴 백작 또한 부인의 손에 쥐어진 장미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관심을 가졌다.
일리안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 * *
“너…….”
“어, 왜?”
파티장을 빠져나온 일리안은 제 뒤를 따라오던 에릭이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그녀보다 훨씬 키가 큰 에릭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냅킨을 장미로 만드는 마술은 어디서 배운 거야?”
“뭐……. 조금만 연습하면 너도 할 수 있어.”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용병 일을 하며 갖은 임무를 맡아봤던 일리안은 상당히 손이 빠른 편에 속했다. 위험한 곳에 제 신분을 속이고 들어가거나, 혹은 물건을 몰래 들여보낼 때에도 이런 간단한 바꿔치기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많은 용병들 중에서도 일리안은 이런 일에 제법 능력 있는 편이었다. 일리안은 만약 자신이 소매치기를 했다면 대단한 도둑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장미도 그래서 처음부터 준비했던 거고?”
파티장에 다녀온 뒤 분재농원에 가야 한다고 했던 에릭의 말과는 달리 일리안은 분재농원을 먼저 다녀오고서 마르틴 백작의 파티장에 온 참이었다.
그곳에 간 일리안이 게릭에게 특별히 잘 만들어진 장미를 준비해 달라고 하기에 에릭은 대강의 사정을 듣고 마르틴 백작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백작 부인을 위해서라니. 물론 준 것은 백작 부인에게였지만 남편인 마르틴 백작 또한 장미를 눈여겨볼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사업을 하려면 이 정도 준비는 해야지.”
일리안은 제 어깨를 주무르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사실, 사람을 대하는 법 정도야 40년이라는 인생을 살며 깨우친 바가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리안이 이 정도로 수완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에릭이기에 그는 놀란 눈치였다. 제 아버지인 게릭이 누누이 그녀가 크게 될 사람이라고 말했는지 슬슬 이해가 되고 있었다.
“헤이븐 윈터 님?”
마르틴 백작과의 대면 이후 곧바로 파티장을 나갈 생각이었던 일리안을 불러 세운 것은 백작가의 집사였다. 노집사는 정중한 얼굴로 그녀에게 종이 몇 장을 건네었다.
“마르틴 백작께서 이것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좋은 답변이 있기를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집사의 이야기에 일리안이 크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씩 웃으며 제 뒤에 있는 에릭에게 집사가 건넨 종이를 보여주었다.
‘계약서’라는 3글자로 시작하는 종이의 가장 아래에는 마르틴 백작 가문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에릭은 허, 하며 그것을 바라봤다.
“잘해봐야 내년에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성사됐어.”
“……못 할 거라고 생각은 안 하는 거냐?”
“뭐, 마르틴 백작이 아니어도 유통을 해줄 만한 사람은 꽤 많거든. 이곳이 가장 조건이 나아서 왔을 뿐이지.”
이야기를 마친 노집사가 자리를 떠나자 일리안은 복도를 걸어가며 천천히 계약서를 읽어 내려갔다. 남작 영애라기보다는 1명의 사업가 같은 일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릭이 조용히 뒤따랐다.
그녀의 호위를 자청하고 들어온 에릭이 상상한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사교 파티를 즐기고 정원에서 티파티를 하는 영애들이 에릭이 지켜봐 온 귀족 영애들의 전부였다.
그러나 정원의 티파티는커녕 비료 냄새가 나는 분재농원을 수시로 방문하고, 척 보기에도 깐깐해 보이는 나이 든 귀족을 상대하는 게 일리안의 일상이었다. 아무리 봐도 학업을 병행하고 있는 열여섯 살 여자아이답지는 않았다.
“아, 잠깐. 그러고 보니까 내일 중요한 일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있어. 황궁 무도회.”
“그게 열일곱 살부터 참여가 가능했었지. 그래, 타피아가 몇 주 전부터 의상으로 고민하던 게 그거였구나.”
이야기를 듣던 에릭은 의문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의상이 중요해?”
“뭐, 높으신 분들이 오는 중요한 자리니까. 황제 폐하, 황자 전하는 물론이고…….”
“리하르트 공작 전하께서도 오시겠군.”
그래, 그렇지. 율리어스도 오겠네. 라고 대답하려던 일리안은 순간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사교 행사에는 두문불출하는 율리어스와 파티장에서 만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