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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43화 (43/123)

43. 네 옆에 있고 싶어

“헤이븐 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찻잔을 앞에 두고 팔을 괸 채 밖을 바라보던 일리안은 타피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곧 겨울이 지나가면 성인이 되실 텐데, 표정이 안 좋으신걸요.”

시간은 흘러 열다섯 살이었던 일리안은 열일곱 살이 되었다.

그동안 헤이븐 윈터의 얼굴은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열두 살, 그녀가 처음 헤이븐이 되었을 때의 오동통한 젖살이 올라와 귀엽던 얼굴이 젖살이 빠지며 귀엽기보다는 어딘지 가냘픈 소년처럼 보였다.

물론 일리안은 그동안 체력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헤이븐 윈터의 육체에는 어딘지 한계가 있었다. 타피아의 관리 탓인지 근육은 붙지 않고 그저 건강한 몸이 된 게 전부였다.

때문에 올해로 열일곱 살이 되었던 일리안은 겉으로 보기엔 하얗고 마른 소년처럼 보였다. 이전 생의 일리안 하인리히가 상당한 장신에다 온몸 곳곳에 근육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자면 몹시도 다른 모습이었다.

“그랬나. 하하, 겨울이 되니 나도 모르게 감성에 젖어서 그런가 봐.”

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충 둘러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겨울이 되었다고 해서 감성에 젖을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는, 곧 헤라프력 223년의 겨울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지금이 가을이니 몇 달만 지나면 흰 눈이 내리게 될 터였다.

그 겨울, 함박눈이 가득 내리던 날에 라울이 죽었다.

일리안은 나이가 들며 운신이 자유로워지자 가장 먼저 지금의 라울이 잘 지내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현재 용병인 일리안 하인리히의 소식은 접하기 어려웠지만 이전에 알던 정보 길드를 이용해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다.

몇 개월이나 일찍 죽었던 타파와는 달리 라울의 운명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라울이 죽었던 그 겨울, 일리안 하인리히가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어머. 손님이 오셨네요.”

“야, 헤이븐!”

리트릭이 어딘지 성난 걸음으로 성큼성큼 윈터 가문의 저택에 입성하고 있었다. 정원에 앉아 있던 일리안과 그 뒤에 시립해 있던 타피아는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너, 들었어?”

다짜고짜 들었냐고 묻던 리트릭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일리안이 앉아 있던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쾅 내려쳤다. 그에 화들짝 놀란 것은 타피아였다.

본인은 잘 모르는 듯했지만, 예전의 금발 머리를 가진 미소년 리트릭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작은 키에 좁은 어깨, 마른 체격으로 일리안과 비슷하던 리트릭은 훌쩍 성장해 누가 보아도 기사처럼 보였다.

아직 호리호리한 체격인 것은 분명하지만 너른 어깨와 평균을 웃도는 키는 그가 잘 성장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게다가 전문적인 기사 양성 훈련을 받은 그가 테이블이 부서져라 내려치니 타피아가 놀랄 만도 했다.

일리안은 슬쩍 눈을 찌푸리며 리트릭에게 경고했다.

“리트릭, 테이블 부쉈다간 10배로 물어내라.”

“10배? 헹, 내고 말지!”

“타피아가 놀라니까 관둬.”

타피아를 힐끗 보던 일리안은 그녀가 진정한 것 같자 리트릭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에릭이 정식 기사가 됐대!”

리트릭의 말은 잠자코 듣던 일리안은 잠시 멈칫했다. 그가 리하르트 공작성의 기사 수련생이 된 지 고작해야 1년하고도 반년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벌써 기사가 되었다니.

리트릭은 그런 일리안의 의문을 듣기라도 했는지 제가 더 뿌듯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 자식, 내가 몸만 봐도 무예에 재능이 있을 것 같더라니. 들어가자마자 수련생들 사이에서 난리였잖아. 재능도 재능인데 어디에 미친 것처럼 노력한다고 말야.”

에릭이 그다지도 무예에 재능이 있던가? 일리안은 곰곰이 에릭을 떠올려 봤지만, 생각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두드러졌던 그의 건장한 체격뿐이었다.

“에릭이 그랬다고?”

“그래! 너야 관심도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 기사들 사이에선 소문이란 게 제법 돌거든. 아마 에릭이 제국에서 두 번째로 기사 수련생 과정을 짧게 치렀을걸?”

첫 번째는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리트릭이 기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가이우스밖에 없었으니 아마도 그일 것이었다.

“하여튼 이상해. 기사 수련생으로 들어갔을 때만 해도 분명히 평범했거든. 근데 들어간 지 며칠 안 되어서 갑자기 혼자 훈련을 죽어라 하지 뭐야. 어디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 마냥.”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인 리트릭은 흐음, 하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사이 싸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일리안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추위에 잠시 어깨를 떨었다.

아무래도 곧 겨울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슬슬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것도 할 수 없는 계절이 오고 있었다.

“그래서, 에릭을 입단시키려고 여기저기서 난리인 모양이야. 다른 곳도 아니고 일단 리하르트 공작성의 수련생인데 심지어는 거기서 수석이잖아.”

리하르트의 기사 수련생이라고 해서 모두 리하르트 기사단에 입단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 수련생과 가문의 기사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수련생을 졸업한 이들은 대개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가문을 선택했다.

하지만 리하르트 가문의 기사 수련생이었다는 것은 제법 큰 메리트였다. 아무래도 에릭은 자주 만나지 못한 사이 많이 성장한 모양이었다.

성인이 된 에릭과 연락이 끊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훈련을 받느라 소식은 자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제법 의외였다.

“에릭도 요즘 입단할 기사단을 찾고 있고 말이야.”

“그래서, 에릭은 어딜 간다고?”

“글쎄. 그것까진 잘 모르겠네. 아마 내가 있는 리하르트 기사단이나 황궁으로 가지 않을까? 거기도 대우가 장난 아니거든.”

일리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민인 그가 리하르트나 황궁 기사단에 입단한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게릭 아저씨가 좋아하시겠는 걸,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헤이븐, 너는?”

“나?”

“넌 뭘 하고 싶은데.”

리트릭의 질문에 일리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헤이븐 윈터가 되고 난 뒤부터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제 아들인 라울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만을 했을 뿐.

“글쎄……. 게릭 아저씨랑 하는 분재농원 사업도 잘되어가고 있고, 요즘은 사교 파티에 참가하느라 바쁜걸.”

사업과 학업을 병행하는 일리안은 거기다 인맥을 위해 사교계까지 신경 쓰느라 쉴 틈 없이 바빴다. 지금만 해도 며칠 만에 겨우 시간을 내어 쉬고 있는 것이었다.

제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리안과는 달리, 사업은 상당히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일리안의 사업 수완이 좋기 때문이었다.

“사업이 잘됐으면 저택이나 좀 꾸미지 그러냐. 난 이렇게 넓은 저택에 아직도 너랑 타피아, 그리고 디노 경이 전부인 게 거짓말 같아.”

일리안은 최근 들어 고민하고 있던 생각을 리트릭이 찔러대자 음, 하며 입을 닫았다.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타피아가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어머, 리트릭 님. 저로도 충분히 할 만한걸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저택은 넓었지만 일리안과 타피아는 몇 년 전, 이미 저택에서 사용할 곳과 사용하지 않을 곳을 구분해 청소 구역을 나누었다. 때문에 타피아 혼자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디노는 아니었다. 윈터 남작 부부가 있을 때만 해도 작지만 내실 있는 기사단이 있었는데, 윈터 부부가 죽으며 월급이 나오지 않자 알아서 흩어진 것이었다.

물론 디노의 월급은 다른 기사단에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넉넉히 챙겨주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동떨어진 그의 존재였다.

기사단도 없는 곳에서 기사라니. 분재농원 사업이다, 뭐다 하며 활발히 움직이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디노가 할 일이 아니었다.

기사단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디노를 보내긴 아쉬웠던 일리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 에릭 아니야?”

어느샌가 일리안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리트릭이 저택 입구를 손가락질했다. 그곳엔 정말 에릭이 디노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에릭은 정원에 앉아 있는 일리안과 리트릭을 발견하곤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기사가 아닐 때만 해도 조금 체격이 크고 남자다운 모습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정식 기사가 된 에릭은 기세가 남달랐다. 고작 2, 3년 검을 잡은 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기사다웠다.

“에릭!”

“……리트릭. 네가 왜 여기 있어?”

“왜 있긴, 친구니까 있지. 하하, 이렇게 보니까 결국 우리 셋 다 기사가 됐네?”

리트릭은 웃으며 일리안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롱소드를 가리켰다. 정식 기사가 되진 않았지만 그녀가 꾸준히 기사 수업을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리트릭, 헤이븐은 기사가 아니다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가이우스 경의 유일한 제자 아니겠냐?”

장난스럽게 말하는 리트릭을 한번 바라본 에릭은 조용히 테이블을 빙 둘러 일리안에게 다가왔다. 당연히 리트릭의 옆자리에 앉으리라고 생각했던 일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오랜만이다, 헤이븐.”

“……어, 그래. 몇 달만이더라, 6달?”

휴가차 나온 에릭을 리트릭과 함께 본 게 아마도 6달쯤 전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 일리안은 에릭이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자리에 앉지 그러냐. 정식 기사가 되었다며? 축하한다.”

“그래, 기사가 되었어. 그래서 말인데, 헤이븐.”

에릭이 그 순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일리안은 일순 당황한 얼굴로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에릭의 머리를 내려다봤다.

“에릭?”

“기사 에릭 밀튼이 윈터 가문에 종속되기를 요청합니다, 헤이븐 윈터 남작 각하.”

“……뭐?”

에릭은 더 이상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일리안은 미간을 좁히고 그를 바라보다 잠시 리트릭에게 힐끗 시선을 줬다. 그는 이미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지 오래였다.

“아니……. 일단, 윈터 가문에는 기사단이 없어. 거기다 난 아직 남작 작위를 물려받지 않았는데.”

“알고 있어.”

에릭이 고개를 들어 일리안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에 곤란해하는 일리안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어차피 후계자는 너밖에 없고, 곧 남작이 되겠지. 변명은 그만하자.”

에릭의 눈동자는 일리안을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에릭의 몹시도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윈터 가문의 기사가 되기를 요청한 거야, 헤이븐. 월급이나 받는 계약 기사에는 관심이 없어.”

뭐……?

일리안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에릭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이미 수십 년 전에나 사라진 제도였다. 가문에 종속되어 죽기 전까지 그곳에 종신한다는 ‘기사의 맹세’였다.

“야, 에릭, 미쳤어? 지금 너한테 온 러브레터가 몇 갠데……!”

“리트릭.”

“왜?”

“난 단 한 번도 계약 기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리트릭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제 머리를 짚었다. 아무리 사라진 제도고, 그들이 말로만 하는 것이라 한들 에릭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파급력이 컸다.

기사들의 재계약 기간이 다가오며 에릭의 유명세는 기사단이 있는 귀족 가문에서 높은 편이었다. 그의 발걸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들이 에릭이 ‘기사의 맹세’를 했다는 것을 알면, 그때는 에릭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에릭의 뒤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으로 들어오던 디노가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지 들고 있던 양동이를 떨어트린 채였다. 일리안은 그 모양새를 보자 골치가 아파 잠시 제 이마를 짚었다.

“에, 에릭 경이 헤이븐 님의 기사가 된다고 하셨습니까?!”

“……디노. 나 아직 결정 안 했는데.”

“드디어 윈터 가문에 저 말고 다른 기사가……!”

디노가 제 양손을 마주 잡으며 감동한 얼굴로 에릭을 바라봤다.

할 일에 치여 가문의 일은 잠시 미뤄두고 있던 일리안은 디노가 그다지도 외로웠나 싶어 하려던 말을 그만뒀다. 하지만, 사업으로 바쁜 지금 필요도 없는 기사단을 만들어 허튼 골드를 쓸 수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디노, 그리고 에릭. 우린 아직 기사단을 만들 여력이 안 돼.”

디노가 그 순간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일리안도 그 기색을 읽었지만, 그래도 할 수 없는 것을 하겠노라 거짓말 칠 수는 없었다.

일리안은 이쯤 말했으면 에릭이 했던 말을 돌릴 줄 알았다. 어차피 들은 이들이라곤 윈터 가문의 이들과 리트릭이 전부였으니 농담으로 치부하면 나중엔 웃고 넘어갈 추억이 될 터였다.

그러나 에릭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일리안을 올려다봤다. 일리안은 그의 짙은 눈썹과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음을 깨달았다.

“헤이븐, 나는 네 기사가 되고 싶다.”

“…….”

“5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내 생각은 달라진 적이 없어.”

네 옆에 있고 싶어.

5년 전에는 그저 범선이나 좋아하던 꼬마였던 에릭은 어느새 성장해 있었다. 그가 대체 어째서 2년 전부터 기사에 목을 매게 되었는지, 일리안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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