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기이한 패배감
마차들이 붐비는 파란 화원을 겨우 빠져나온 일리안이 뒤를 돌아보다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모를 일이었다.
“야, 헤이븐! 그 꼴은 뭐야? 너, 진짜 귀족 영애 맞냐?”
일리안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리트릭이 종이 가방 하나를 품에 껴안은 채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트릭의 반응에 일리안은 옆 건물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남색 바지와 흰 튜닉은 평범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남루하진 않았다.
“내 모습이 왜. 깔끔한데?”
“……너는 그, 드레스 같은 건 안 입냐?”
“귀찮아.”
화원에서 만났던 영애들만 떠올려도 그랬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한 손으로 겨우 붙잡고 혹시나 치맛자락을 밟을까 계단 턱도 조심조심 내려와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피곤한 일이었다.
일리안은 자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리트릭에게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타피아가 입어달라고 조른다면 생각이라도 해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입을 일은 없을 터였다.
“근데 지금 파란 화원에서 나온 거냐? 왜? 지금 아직 해도 안 졌는데.”
“……뭐, 바쁜 일이 있어서.”
“그래?”
리트릭은 대강 둘러대는 일리안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봤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그녀를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런 리트릭을 불러 세운 것은 일리안이었다.
“넌 무슨 일인데.”
“나? 나야 파란 화원에 심부름 갈 일이 좀 있어서. 내 부모님이 요새 엄청 신경 쓰는 곳이잖냐.”
리트릭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일리안은 그가 파란 화원에 도착한 순간, 자신이 없어진 화원의 상황을 발견하리란 것을 예측했다. 만약 화원으로 돌아간 리트릭이 헤이븐 윈터는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일리안은 순간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그녀는 화원으로 향하려는 리트릭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왜?”
“……그, 요즘 에릭은 뭐 하냐.”
딱히 물을 질문이 없어서 최근 들어 소식이 뜸해진 에릭의 이야기를 물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을 들은 리트릭은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야, 너 못 들었어?”
“뭘?”
리트릭은 화원으로 향하려던 몸을 완전히 돌렸다. 그리곤 얼굴을 와락 찡그리며 일리안에게 말했다.
“에릭, 기사 수련생 됐잖아.”
일리안으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왜인지 늘 일리안의 주변을 맴돌던 에릭이 잘 안 보인다 싶더니, 아무래도 기사가 되려는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범선을 좋아하기에 당연히 무역 상인이나 될 줄 알았는데. 그 꼬마가 벌써 자라 기사를 준비하고 있다니, 일리안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 긴. 꽤 되었는데. 왜, 네가 올해 초에 그랬잖냐. 넌 기사가 아니라서 같이 못 왔다고.”
“……내가 그랬었나?”
“그래, 파란 화원 처음 왔을 때 말이야. 나랑 단둘이서 왔었을 때, 에릭이 쪼르르 따라와서는 왜 둘이 왔냐고 물었더니 네가 그랬어. ‘넌 기사가 아니니까’라고.”
일리안은 이미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리트릭이 자세히 상황을 설명하자 어쩐지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왜?”
“네가 그렇게 말하는데 에릭이 가만있고 배겨? 그다음 날부터 기사 수련생 준비했을걸. 이번 달이 되어서야 겨우 입단했고.”
에릭이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게 꼭 일리안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일리안은 리트릭의 그 말이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미간을 찌푸릴 뿐 더 묻지는 않았다.
“그래서 요즘엔 자주 보지도 못해. 난 이제 수련생이 아니라 정식 기사잖냐.”
“네가 잘 챙겨줘라. 걘 어렸을 땐 안 그러더니 커서는 영 무뚝뚝해져서, 표현도 잘 못하니까.”
“뭐?”
일리안의 이야기에 리트릭이 자신이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릭이 무뚝뚝해? 표현을 잘 못해?”
“그래, 에릭이.”
“풉, 야. 너 진짜 모르는구나?”
일리안은 리트릭의 말에 눈을 끔뻑였다. 얼떨떨한 일리안과는 달리 리트릭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웃다 말을 이었다.
“걔만큼 표현 다 하는 놈이 어디 있다고. 네가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한번 잘 지켜봐. 에릭만큼 할 말 다 하는 녀석 없다?”
* * *
파란 화원에 다녀온 뒤, 일리안은 늘 그랬듯 다시 공작성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피후견인으로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그 사실이 나쁘지 않았다. 공부가 재미없긴 했지만 마흔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것이었으니 제법 열심히 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그렇지 못했다. 아마도 선생이 바뀐 뒤부터일 것이었다.
“오늘도 외우지 못하신겝니까?”
근 몇 주간 수업을 방임하던 겔트 백작이 바뀐 것은, 일리안이 시간 낭비를 하기 싫다며 자리를 떠났을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겔트 백작은 수업을 열과 성을 다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잘된 일은 아니었다.
“윈터 영애를 가르치는 이로서 안타깝기 그지없군요. 고작 이런 것 하나 외우지 못하시다니……. 책상 위로 올라가세요.”
하루 안에 하기 힘들 정도로 무리한 양을 내는 것은 파르타 남작도, 그리고 문제를 내주던 율리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겔트 백작의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겔트 백작은 5일을 수업하면 5일 내내 과제를 내주었다. 그런데 막상 시험을 치거나 질문을 던지는 것은 과제의 내용을 묘하게 빗겨간 내용들이었다.
겔트 백작은 일리안이 문제를 틀리면 기다렸다는 듯 회초리를 꺼내 들었다. 훈육이라는 미명하에 매를 들었으니 일리안으로서는 피해갈 방법이 없었다.
“정말,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군요.”
짜악.
무릎 꿇은 일리안의 허벅지 위로 손가락만 한 두께의 회초리가 내려쳐 졌다. 그러나 매를 맞고 있는 일리안은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하다못해 조금의 신음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겔트 백작은 어딘지 흥분된 얼굴로 연신 매를 휘둘렀다. 이따금씩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것이 꼭 그녀가 고통스러워하길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연속해서 맞은 허벅지에서 옅게 피가 새어 나왔다. 그것이 어느새 일리안의 허벅지 근처의 옷감을 적시자 겔트 백작은 내려치던 손길을 거둬들였다.
겔트 백작은 마치 아량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그녀에게 화장실을 다녀오라 명했다.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있던 일리안이 바닥으로 발을 내렸을 때였다.
무릎을 오래 꿇고 있던 탓인지, 혹은 너무도 가혹하게 맞은 탓인지 그녀는 잠시 비틀거렸다. 그러나 일리안은 무심한 얼굴로 자세를 바르게 하고 교육실을 빠져나갔다.
겔트 백작은 일리안이 문을 열고 빠져나갈 때까지 그녀의 작은 등을 끈질기게 바라봤다.
화장실로 향한 일리안은 말없이 바지를 내려 피가 슬금슬금 새어 나온 곳을 물로 헹구었다. 다행히 바지의 색이 어두워 티는 나지 않았지만, 쓰라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괜히 누가 봤다간 일이 귀찮아질 텐데.
일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바쁘게 옷을 정리했다. 겔트 백작이 또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모르니 어서 교육실로 돌아가야 하기도 했다.
“……헤이븐?”
화장실 밖을 나온 일리안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복도 맞은편에서 에릭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릭, 네가 왜 여기 있냐.”
“그야, 나도 리하르트 가문의 기사 수련생이니까……. 아, 참. 내가 말을 못 했지. 그렇게 되었어.”
에릭은 어딘지 멋쩍은 얼굴로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에릭의 얼굴을 바라보던 일리안은 순간 리트릭이 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데 에릭이 가만있고 배겨?”
그 이야기에 일리안은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에릭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주저 없이 물었다.
“너, 나 좋아하냐.”
“뭐, 뭐? ……뭐?!”
에릭은 일리안을 처음 만났던 열다섯 살 이후로 한 번도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그런 에릭이 드물게 말끝을 올리며 무덤덤했던 얼굴을 구겼다.
“나 좋아하냐고 물었는데.”
“내… 가 왜 널 좋아해?”
“너, 범선 좋아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기사 수련생이냐.”
일리안은 지켜봐 온 친구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다지 설레어 보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냥……. 멋있잖아. 리트릭도 그렇고.”
“그래, 그럼. 네가 하고 싶은 걸 한다면야.”
어딘지 놀란 것 같은 에릭과 무난히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시선을 잠시 돌린 일리안의 눈에 복도 저 맞은편에서 가이우스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율리어스가 보였다.
덥석 에릭의 손목을 잡은 일리안은 복도 구석으로 빠졌다. 에릭은 그녀에게 제 손목이 잡히자 질질 끌려가면서도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봤다.
가이우스와 율리어스가 지나가기 쉽도록 길을 터준 일리안은 슬슬 교육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따라 어딘지 멍한 것 같은 에릭의 어깨를 툭툭 쳐주곤 한마디를 던졌다.
“말해두는데, 나 좋아하진 마라.”
“……왜?”
일리안에게 손목이 잡힌 뒤부터 어딘지 상기된 표정이었던 에릭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일리안은 그런 에릭의 얼굴을 보다 어느새 자신들과 가까워진 율리어스를 힐끔 바라봤다. 그리곤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제 앞에 서 있는 에릭에게 말했다.
“귀찮으니까. 에릭, 나 이만 가봐야겠다. 먼저 간다?”
연신 율리어스를 힐끔거리던 일리안은 그가 완전히 가까워지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혹여나 율리어스에게 따라잡힐까 바쁘게 복도를 걸어가는 일리안의 뒷모습이 에릭의 눈에 들어왔다.
“왜냐고 물었는데.”
나는 왜 안 되는데?
에릭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결국 율리어스와 가이우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리하르트에 종속된 기사로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율리어스와 가이우스 또한 이미 복도 저 너머로 걸어가고 있는 일리안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이우스는 에릭을 한 번, 그리고 멀어진 일리안을 한 번 번갈아 바라봤다.
“……리하르트 공작 전하, 그리고 가이우스 님을 뵙습니다.”
“당신은, 그러니까……. 헤이븐 님의 친구?”
“예, 맞습니다. 에릭 밀튼입니다.”
가이우스는 흐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모습이 제법 친근해 보여 물은 것일 뿐이었다.
율리어스는 제게 고개를 숙인 에릭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쳐 걸어갔다. 헤이븐 윈터가 누구와 이야기를 하든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제 얼굴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율리어스가 제 집에 와 식사를 한 날부터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에릭은 눈을 내리깔며 생각했다. 그런 자신이 헤이븐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렇게 관심이 없다니.
그때였다. 에릭을 지나쳐 걸어가던 율리어스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리트릭의 어깨를 두드려 주던 가이우스가 순식간에 그의 곁에 달려갔다.
“율리어스 님, 무슨 일이십니까.”
“걸음이 이상하군.”
“예?”
율리어스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벌써 복도 저 멀리를 걸어가는 누군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가이우스도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봤지만 아무리 봐도 헤이븐 윈터 뿐이었다.
“헤이븐 윈터의 새로운 선생이 누구라고 했나.”
“……겔트 백작입니다, 율리어스 님.”
“그에게 수업에서 매를 사용하지 말라고 전하라.”
에릭은 율리어스와 가이우스의 대화를 바로 뒤에서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복도를 걸어가는 작은 등을 다시 바라봤다.
이미 대화를 마친 율리어스는 다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율리어스의 너른 등 또한 에릭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기이한 패배감이 에릭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