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41화 (41/123)
  • 41. 나의 전부

    깜빡, 깜빡.

    천장에 달린 낡은 조명이 곧 그 수명을 다할 모양인지 점멸하고 있었다. 바닥에 누워 눈을 끔뻑거리던 율리어스는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덮여 있던 담요가 그의 상반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율리어스는 제 몸을 덮고 있는 담요를 내려다보다 손에 쥐었다.

    아주 오랜만에, 깊은 숙면을 취했다.

    바깥을 보니 이미 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어지러웠던 머리가 상쾌한 것을 보면 적어도 서너 시간은 잠든 게 분명했다.

    그의 주변에는 누군가 신경 써주고 간 것이 분명한 담요와 베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한 이가 누구인지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율리어스는 제 손에 놓인 담요를 꾹 쥐었다. 그의 얼굴 위로 싸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더 이상 일리안이 아닌 이에 의해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그녀와 무척이나 닮은 이라면, 꼭 자신이 그녀의 대체재를 찾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그러나 곧 생각을 그만둔 율리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 일리안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오느라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했으니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입구의 천을 걷어 올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혹시 아직도 안 일어났나 싶어서 다시 온 겁니다.”

    율리어스는 머쓱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일리안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그녀는 어딘가 나갔다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일리안은 속으로 제게 혀를 찼다. 깨어난 율리어스와 다시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떠났건만, 그가 설마 아직도 떠나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율리어스가 오전부터 시작해 새벽이 될 때까지 먼지 구석에서 잠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니, 사실 그것은 핑계였다. 하루 종일 율리어스 혼자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 결국 그가 걱정되어 다시 왔으니 자신도 할 말은 없었다.

    그녀를 내내 노려보던 율리어스가 발을 옮긴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입구에 서 있는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향했다.

    그가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쳐 가자 일리안은 나지막이 율리어스를 불러 세웠다.

    “율리어스 님.”

    율리어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멈춰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러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일리안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침실에 출입하는 걸… 왜 막으셨습니까?”

    가이우스로부터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걸 통보받았을 때부터 사실 일리안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겨우 헤이븐 윈터에게 마음을 연 것 같았던 율리어스가 어째서 그 문을 다시 닫았는지.

    일리안의 질문을 듣고도 침묵하던 율리어스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메마른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일리안 하인리히가 아니니까.”

    율리어스는 견고한 문을 세웠다. 그 문은 오로지 일리안 하인리히를 위한 것이었고, 헤이븐 윈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문이었다.

    일리안은 그의 단호한 말에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대신, 주저하는 기색은 없어진 채 담담히 그에게 물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도대체 당신에게 뭡니까.”

    일리안은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흔히 천하다고 불리는, 사람을 죽이는 용병 일이나 하며 살던 마흔 살 여자가 그에게는 대체 무엇이기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이 세상의 일리안 하인리히는 바빴다. 자신이 예전에 구해주었던 아홉 살 아이에게 쏟을 시간도 없이 벅찬 인생을 살아남아야만 했다. 아마도 율리어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다렸다. 하염없이, 비록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 하더라도.

    율리어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일리안을 바라봤다. 그의 무미건조한 눈은 그 무엇도 담지 못하는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눈을 한 주제에, 율리어스는 그렇게 말했다.

    “나의 전부.”

    * * *

    일리안은 오랜만에 찾은 파란 화원의 앞에서 제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그녀가 오랜만에 이곳에 찾은 이유는 단 1가지뿐이었다.

    “헤이븐 님, 데뷔탕트도 치른 분이 사교 활동을 전혀 안 하시다니요? 검술도 공부도 모두 좋지만, 가끔은 사교계에도 관심을 가져주세요!”

    사실 타파의 죽음과 맞물려 사교 활동이라곤 새까맣게 잊고 있던 일리안은 타피아의 말에 겨우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일리안이 더 이상 귀족으로 살지 않는다면 사교 활동쯤은 접어도 아무 상관 없겠지만, 이미 윈터 남작의 유언을 받들어 남작 자리를 계승한 뒤였다.

    헤라프 제국의 국법으로 성인이 되는 열여덟 살이 되면 그녀는 더 이상 남작 영애가 아닌 남작이 되는 것이다. 타피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연신 일리안의 사교 활동을 응원하고 있었다.

    오늘은 리트릭도, 에릭도 없이 홀로 파란 화원에 온 일리안은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갔다. 웬일인지 파란 화원에는 예전보다 훨씬 사람이 많아져 있었다.

    “어머! 헤이븐 님!”

    가장 바깥쪽에 앉아 있던 영애가 소란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 순간, 파란 화원 내부에 있던 모든 영애들의 시선이 일리안에게 쏟아졌다.

    일리안은 그 한 마디에 주목이 쏠리자 머쓱한 얼굴로 제 볼을 긁적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영애들이 우르르 몰려와 일리안의 주변을 감쌌다.

    “잘 지내셨어요? 왜 파란 화원에는 한참 안 오셨나요?”

    “저 기억하시죠, 헤이븐 님?”

    “헤이븐 님이 없으신 동안…….”

    귀가 아플 정도로 온갖 인사말이 들려오자 일리안은 음, 하고 입을 다물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들의 수다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리안이 느리게 손을 들었다.

    일리안의 손이 올라간 것을 본 영애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일리안이 그 틈을 타 그녀들에게 제안했다.

    “일단, 자리에 앉읍시다.”

    겨우 영애들 사이를 뚫고 자리에 앉은 일리안의 주변에선 은근한 신경전이 오갔다.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 데다 그녀의 옆에 앉으려는 경쟁자들이 워낙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곧 정리가 되자 익숙한 얼굴의 영애들이 일리안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결국 일리안에게 시선을 모았다.

    “저, 헤이븐 님.”

    “예, 보르트 영애.”

    “리하르트 공작 전하와는 어떻게 되셨나요?”

    보르트 영애라 불린 이의 질문에 순간 파란 화원 내부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실상 그녀들이 헤이븐 윈터를 간절히 기다린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리하르트 공작이 무려 파란 화원 앞에서 헤이븐 윈터를 두고 의문의 신사와 신경전을 벌인 것은 귀족가에서 가장 시끄러운 주제였다.

    누구는 그것을 두고 사실이 아니라 했고, 어떤 이는 헤이븐 윈터가 그의 연인이 아니라 리하르트 가문의 사생아라고 속닥거렸다.

    질문을 받은 일리안은 잠시 침묵하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제가 리하르트 공작 전하에게 드려야 하는 게 있었는데, 전해 드리지 못해서 잠깐 조급하셨던 겁니다.”

    대강 둘러대자 영애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못내 아쉬워했다. 사교계에서 핫한 주제에 대해 가장 먼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생각보다 싱거웠다.

    그때였다. 차랑,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화원의 문이 열렸다.

    “어머. 모두 윈터 영애를 보러 오셨나 봐요.”

    “저를… 말입니까?”

    “그야 요즘 가장 뜨거운 분이니까요. 아마 윈터 영애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새로 오신 분들이 대부분일걸요?”

    문을 열고 줄줄이 들어오는 영애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그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일리안이 오랜만에 파란 화원에 방문했다는 소식이 거리로 퍼져 나간 모양이었다.

    파란 화원은 거의 개장 이래 처음으로 테이블과 의자가 부족할 정도였다.

    “그래서요, 헤이븐 님. 제가 볼 때에는 리하르트 공작 전하가 헤이븐 님께 다른 마음을 가진 것 같다니까요?”

    제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님을 안 일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애 중 1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에게 의문 어린 얼굴을 보낸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헤이븐 님, 어디 가세요?”

    “화장실에 다녀오려고요. 곧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죠.”

    일리안은 질문을 던진 영애를 향해 씩 웃으며 슬며시 자리를 벗어났다. 사람이 많아진 만큼 할 이야기도 늘어난 영애들은 그녀를 향해 다녀오라는 듯 눈짓하며 각자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온 일리안은 화장실로 향하지 않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타피아, 미안. 내 사교 활동은 아무래도 망한 것 같아.

    기다리고 있는 영애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돌아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 거리나 좀 돌아다니다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몸을 돌린 일리안은 화장실과 정반대로 걸음을 옮겼다. 뒷문으로 건물을 나오긴 했지만 파란 화원에서 정원을 빠져나가는 길은 예의 그 길, 단 하나뿐이었다.

    일리안은 영애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의 다 빠져나온 그녀가 대문으로 발을 뻗었을 때였다.

    “그 유명한 헤이븐 윈터가 지금 파란 화원에 있다면서?”

    “영애, 죄송합니다만 현재 화원에는 자리가 없어서…….”

    “내가 누군데 지금 길을 막아?! 장난쳐?”

    일리안은 정원에 심어진 나무 뒤에 숨어 대문 밖의 상황을 살폈다. 담 너머로 보이는 마차가 줄줄이 세워진 것을 보아, 영애들은 화원 내부뿐만 아니라 바깥에도 가득한 모양이었다.

    이 근방에서 파란 화원처럼 영애들의 모임 장소가 될 만한 곳은 대충 세어도 열 개가 넘었는데, 헤이븐 윈터와 리하르트 공작의 염문설이 퍼져 나가며 파란 화원이 급부상한 것이었다.

    그 모든 상황을 살펴보던 일리안은 제 옷을 힐끔 내려다봤다. 타피아의 취향대로 남색 바탕에 금색 실로 수를 놓은 겉옷은 제법 값비싸 보였다.

    일리안은 먼저 그 겉옷을 벗었다. 안에 입은 것은 단순한 흰색 튜닉인 데다 아래도 남색 바지라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곧이어 타피아가 공들인 제 머리에 손을 올려 망가트린 일리안은 나무 뒤에서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대문 근처에서는 파란 화원의 직원 1명이 연신 땀을 뻘뻘 흘리며 영애들을 줄 세우고 있었다.

    느릿하게 대문을 향해 걸어간 일리안은 줄 서 있는 영애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땀을 흘리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안에 한 자리 났던데?”

    “뭐? 정말? 헤이븐 윈터가 떴으니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자리가 절대 안 날 텐데…….”

    “뭐, 영애들도 바쁜 일이 생겼나 보지. 아, 오래 기다리셨죠? 자리가 안 났는데 제가 겨우 한 자리만 뺐지 뭡니까. 어서 들어가 보세요. 이봐, 뭐 해? 대문 활짝 열어드려.”

    일리안은 익숙한 태도로 대문 바로 앞에 서 있는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자리에 앉아 있는 영애 1명이 있었다.

    빙긋 웃은 일리안이 자연스럽게 마차에서 내리는 영애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를 했다. 긴 치맛자락을 잡은 영애는 일리안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린 영애가 도도한 얼굴로 화원에 들어가자, 일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문 앞에 서 있던 직원에게 돌아왔다.

    에스코트를 해주던 일리안이 얼마 가지도 않고 돌아오자 줄을 세우던 이는 의아한 얼굴로 일리안을 바라봤다.

    “응? 네가 안내해 드리지 않는 거야?”

    “에이. 안내 담당은 걔 있잖아, 걔. 어, 이름이 뭐더라, 잠깐만…….”

    “빌?”

    “아, 그래. 빌. 안쪽에 있을 거야. 난 잠깐 사와야 하는 게 있어서 말만 전해주러 왔거든.”

    일리안은 제 손목에 차여진 시계를 내려다보며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이만 가봐야겠다. 아니, 조금만 늦어도 내가 농땡이 피운 줄 안다니까. 안 그래?”

    “응? 응……. 마담이 조금 까다롭기는 하시지.”

    “그래, 그래. 그럼 먼저 가볼게!”

    제법 조급해 보이는 태도로 말을 마친 일리안이 손을 흔들며 마차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직원은 눈을 끔뻑거리다 중얼거렸다.

    “근데… 쟤 이름이 뭐더라?”

    저런 애가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떠오르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떠나간 그녀에 대해 생각할 새도 없이 자꾸만 들이닥치는 영애들을 달래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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