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40화 (40/123)
  • 40. 리하르트의 검은 용

    “유리, 정신 차려!”

    일리안은 느리게 옆으로 기울어지는 율리어스에게 다가가 그를 받아냈다. 그러나 열여덟 살답지 않게 이미 웬만한 성인보다 큰 그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 몸을 짓누르는 무게에 일리안은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신을 잃은 것 같은 율리어스도 일리안의 손길에 의해 바닥에 다리를 뻗고 누웠다.

    일리안은 양반다리를 하고서 조심스럽게 율리어스의 머리를 제 허벅지에 기댔다. 그래도 공작 전하인 그를 먼지가 가득 쌓인 바닥에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허벅지 위로 새까만 머리카락이 쏟아지듯 닿아왔다. 일리안은 갑작스레 정신을 잃은 율리어스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열은 없는데.”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만져봤지만 오히려 제 이마보다 차가웠다. 무엇보다도 고른 숨소리로 보아 어디가 아파서 쓰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일리안은 손을 뻗어 율리어스의 몸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러자 그의 품 안주머니에서 익숙한 정육면체의 박스 하나가 굴러 나왔다.

    몬스터 전용 수면제.

    일리안이 가이우스에게 며칠 전 돌려준 것이었다.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리안은 제 허벅지에 머리를 기댄 율리어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죽은 것처럼 눈을 감은 그는 고르게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이다지도 갑작스럽게 잠이 들려면, 대체 얼마나 많이 복용해야 하는 건가. 일리안은 안쓰러운 눈으로 율리어스를 내려다보다 손을 들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위로 손을 얹어 느리게 매만졌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도대체 네게 무엇이기에.”

    네가 이렇게 구는 걸까, 유리.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킨 일리안은 그의 머리를 천천히 매만졌다. 높은 자리에서 태어나 누구에게나 선망의 눈길을 받는 그가 왜 이렇게도 안타까워 보이는 건지, 일리안은 알 수가 없었다.

    잠시간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일리안은 이내 조심히 율리어스의 머리 아래에서 제 다리를 빼내었다. 대신, 손을 뻗어 타파가 자주 사용하던 쿠션을 가져와 그의 머리를 받쳤다.

    곧 율리어스의 몸 위로 따뜻한 담요 하나가 덮어졌다. 그러고도 얼마간 사람의 인기척이 있었지만, 깊은 꿈속으로 들어간 율리어스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 * *

    “내 배에서 어떻게 저런……. 내가 낳았을 리 없어요. 그럴 리 없어!”

    율리어스는 자신이 태아였던 시절의 기억조차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 어미가 처음 자신을 가졌을 때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

    매일 사랑을 노래하던 부인은 막 태어난 제 아이의 몸에 비늘이 달렸음을 알자 그를 부정했다. 자신이 저딴 괴수를 낳았을 리 없다며 비명을 질렀다.

    태어나서 울지 않는 아이는 기괴했다. 아이의 양 뺨과 목, 그리고 허리에 푸르스름하게 달린 비늘도 마찬가지였다.

    부인은 그렇게 막 태어난 아이를 버렸다. 높은 첨탑에 갇혀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아이는 그렇게 죽을 줄 알았지만, 1달여가 지난 후 첨탑에 찾아가자 놀랍게도 아이는 살아 있었다.

    그 1달 동안 피부에 푸르스름하게 달려있던 비늘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진 뒤였다. 대신, 선대 리하르트 공작의 아들임을 증명하듯 새까만 머리카락과 새까만 눈을 가진 아름다운 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제 아들이 첨탑에서 죽지 않았음을 안 선대 공작은 아이를 데려왔다. 부인은 제가 낳은 아이를 보자마자 혼절했지만.

    “소름 끼쳐…….”

    “부인. 그만하도록.”

    율리어스는 세 살에 말을 텄고, 다섯 살에는 성인들도 읽기 어려워하는 고서를 읽었다. 그가 책을 읽기 위해 복도를 오가다 공작부인을 마주칠 때면 그녀는 제 아이에게 소름이 끼친다며 피해가기 바빴다.

    그나마 선대 공작은 아이를 피해 다니진 않았지만, 그것도 겉으로만 그럴 뿐이었다. 그가 늘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율리어스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아무렇지 않았다. 자신이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는 무엇보다도 제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누군가 그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부모를 떠나서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 그를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그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였다. 율리어스는 그 소문의 시작이 누구였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율리어스 님께서 공작 전하의 자리를 노리실지도 모르지요.”

    공작성에서 오랫동안 종사해 온 집사였다. 그가 함부로 꺼낸 이야기는 곧장 공작성의 모든 이들에게 퍼져 나갔다.

    그 이야기가 선대 공작에게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율리어스를 탐탁지 않게 보던 그는 기다렸다는 듯 분노했다.

    부인 또한 율리어스를 지켜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분노한 제 남편에게 어서 저 불길한 아이를 죽이라며 속살거렸다.

    아이임에도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던 율리어스는 선대 공작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런 그를 내보낸 것은 펜서였다.

    “도련님, 지금은 나가셔야 합니다. 나가서 살아가십시오.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펜서는 선대 공작이 오기 전에 율리어스를 공작성의 뒷문으로 빼돌렸다. 그의 손길에 의해 끌려 나온 율리어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무심히 생각했다.

    꼭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율리어스는 제가 살아오고, 또 살아갈 모든 날들이 덧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을 싫어하는 부모의 손에 죽어 마음을 덜게 해주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제게 살아야 한다고 당부한 펜서를 떠올렸다. 결국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그렇게 간절하지도 않았다.

    “이쪽이다. 이쪽으로 갔어!”

    “모두 쫓아!”

    율리어스는 힐끔 고개를 돌려 어느새 제 바로 뒤까지 추적해 온 공작성의 병사들을 바라봤다. 이렇게 가다간 곧 잡힐 게 뻔했다.

    사실, 율리어스는 병사들을 모두 처리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힘을 쓰지 않고 도망친 것은 살고 싶다는 의지가 희박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도시의 어느 초라한 집 문을 두드린 것은.

    “……어이, 꼬마야. 너 집 잘못 찾았다.”

    문을 열고 나온 이는 여자였다. 머리가 짧은 데다 목소리도 몹시 낮아 얼핏 보면 남자로 오해할 수도 있을 이였다.

    나올 때만 해도 조금 긴장한 것 같던 그녀는 어린아이인 율리어스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의심을 놓았다. 대신, 몹시도 귀찮은 것 같은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율리어스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출생을 아는 자들은 대부분 그를 경외하거나 경멸했고 간혹 불쌍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를 처음 본 자들은 대개 율리어스의 아름다운 얼굴과 값비싼 옷에 관심을 가졌다. 중요한 것은, 그중에서 율리어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이들은 없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율리어스는 제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여자가 흥미로웠다. 태아일 적부터 아홉 살에 이르기까지 무미건조하게 살아온 그로서는 처음 생긴 흥미였다.

    “숨겨줘.”

    “뭐?”

    “숨겨 달라고.”

    여자는 자신의 뜬금없는 숨겨 달라는 요청에 귀찮음을 숨기지 않았다. 미세하게 얼굴을 찌푸린 그녀의 얼굴을 율리어스는 재미있는 것을 보듯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한발 물러섰다. 율리어스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보폭이었다.

    율리어스는 그 순간 제 심장이 느릿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제 집을 허락해 주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율리어스를 받아들여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유를 가질 새는 없었다. 자신을 뒤쫓는 이들이 있으니 지금은 숨어야 할 때였다.

    집 안에 있는 가구는 몇 개 없었기 때문에 율리어스는 곧장 작게 문이 열려 있는 옷장으로 향했다. 숨겨 달라고 했으니 어쨌든 숨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율리어스의 어깨를 붙잡은 것은 그를 받아들여 준 여자였다.

    “…….”

    어깨를 붙잡은 여자는 신발장으로 대강 턱짓했다. 그것이 신발장에 숨으라는 뜻임을 안 율리어스는 아무 대꾸 없이 그곳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가 신발장 문을 안에서 닫자마자 난폭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어스는 숨을 느리게 쉬며 좁은 신발장 속에서 제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검은 머리의 아이를 보았소?”

    “검은 머리 애? 봤지.”

    질문을 던진 이는 공작성에서 기사단장으로 불리는 이였다. 그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봤다고 대답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율리어스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녀가 자신을 숨겨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그저 이제는 목전까지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율리어스는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단지, 오늘 막 만난 여자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한 10분 전쯤에 저기 길 아래로 내려가던데. 이 집, 창이 커서 바깥이 잘 보이거든.”

    처음으로 죽기엔 아쉽다고 생각한 율리어스의 귓속으로 들려온 말이었다. 조금도 기죽은 기색이 없는 목소리에는 외려 조금의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곧이어 사내들이 집안을 수색하기라도 하는지 바깥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방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제 만족하나, 형씨들?”

    이윽고 사내들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율리어스는 신발장에서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기다렸다.

    “인마, 이제 나와.”

    엉금엉금 기어나가 고개를 들자 여자는 담배 한 대를 문 채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커다란 달이, 율리어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공작성을 나와 하늘을 볼 때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는데. 율리어스는 순간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가에 서 있던 여자는 힐끔 고개를 돌려 율리어스를 보더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껐다. 아이의 앞에서 담배를 피워선 안 된다는 생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펴도… 된다.”

    “뭐?”

    “담배. 펴도 좋다고 했다.”

    남과 대화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율리어스가 어색하게 말하자, 여자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담배를 마무리한 여자가 순식간에 율리어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허리께에 겨우 도달하는 율리어스를 위해 허리를 숙인 여자가 그의 머리를 꾹 눌렀다.

    “어른한테 할 말이 아닌데, 그건.”

    “…….”

    “담배 펴도 괜찮습니다. 자, 따라 해봐.”

    율리어스는 제 머리를 꾹 누르는 손길에 잠깐 움찔했지만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짙은 회색 눈동자가 제 바로 앞에 있었다.

    “……담배 펴도 괜찮습니다.”

    “미안하지만, 아이 앞에서는 안 피우거든. 그래도 말은 고맙다.”

    여자는 씩 웃으며 이내 아이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율리어스는 순식간에 떨어지는 온기가 아쉽게 느껴졌다.

    “이름이 뭐냐.”

    “……율리어스.”

    “유리?”

    유리라고 부르자.

    여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율리어스는 처음으로 불려진 애칭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곧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활짝 웃었다.

    “난 일리안. 일리안 하인리히다, 유리.”

    그 웃음을 보며 율리어스는 제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살아갈 모든 날들이 덧없을 거라고. 때문에 자신을 뒤쫓는 병사들을 처리하는 것도, 제 자식을 죽이려는 부모를 감당하는 것도 귀찮다고.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나가서 살아가십시오.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율리어스의 등을 떠밀며 펜서는 몇 번이고 다짐이라도 받듯 반복해서 말했다.

    살아야만 한다고. 지금 죽기엔 너무도 어리니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래, 펜서.

    슬슬 살고 싶어졌어.

    그날, 리하르트 성의 검은 용은 살아가기를 결심했다. 드래곤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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