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너는 왜
겔트 백작은 일리안이 제 말을 무시하고 화장실로 향한 뒤부터, 대놓고 그녀의 수업을 방임했다.
매일같이 공작성에 오기는 했지만 교육실에 와보았자 그가 내주는 것은 대강 자료를 짜깁기한 시험지가 전부였다.
“다 풀었습니다, 겔트 백작님.”
겔트 백작은 제 손톱을 후후 불다 일리안의 목소리에 힐끔 시선을 돌렸다. 짧게 턱짓하곤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도 없이 다시금 손톱을 매만질 뿐이었다.
일리안이 아무리 가만히 앉아 있어도 겔트 백작은 더 이상 수업을 진행시킬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결국 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챙겨온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야? 누구 마음대로 일어서?”
“수업을 하실 마음이 없어 보이니 시간 낭비를 줄일 겸 이만 돌아갈까 하는데요.”
겔트 백작은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봤지만 일리안의 태도는 꿋꿋했다. 그가 소리를 치기도 전에 교육실을 빠져나왔다.
공작성의 복도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일리안은 이내 윈터 저택으로 돌아가는 선택지는 접었다. 만약 지금 시간에 돌아갔다간 타피아가 왜 이리도 일찍 왔냐며 걱정할 터였다.
느릿한 걸음으로 공작성을 나서기 위해 성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시네요?”
“예, 수업이 일찍 마쳐서요.”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요즘엔 여유로우신가 봅니다.”
그녀가 성문을 나서자 초소를 지키던 경비병들이 인사해 왔다. 파르타 남작이 가르칠 때만 해도 해가 저물어갈 때쯤에야 공작성을 나서던 그녀가 오전이 겨우 지난 시간에 보이니 의아할 법도 했다.
그러나 일리안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경비병들 또한 그녀의 웃음에 마주 웃어주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일리안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녁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으니 거리를 배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춘 일리안은 고개를 들어 제 앞에 놓인 건물을 바라봤다.
천 하나로 덜렁 문을 만들어둔,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노후한 건물. 일리안은 그 건물을 발견하고서 짧게 실소했다.
자신도 모르게 타파가 있던 곳으로 온 것이다. 그녀는 이미 죽어 더 이상 이 안에서 자신을 일리안이라 불러주며 기다리지 않을 텐데.
이 세상에서 그녀를 일리안이라 불러주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가라앉은 얼굴이 된 일리안이 천천히 입구에 걸린 천을 들어 올렸다. 집주인이던 타파가 죽어 곧 건물이 사라지게 될 거란 소식은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들은 뒤였다.
그 뒤로 타파가 생각날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곧 없어질 곳이었다. 그 전에 한 번쯤 들리는 것도 좋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부스럭.
일리안은 안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천을 들어 올리던 손을 멈칫했다.
기실, 타파의 집이 노후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게 좁지만도 않았다. 타파가 고질적인 골동품 수집가라 별의별 물건이 집 안에 쌓여 있어 미로처럼 어지러울 뿐이었다.
집 안으로 조용히 들어온 일리안은 익숙하게 책장 뒤로 숨었다. 귀를 기울이자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도둑인가?
하지만, 타파의 집에는 사실상 쓰레기라 해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법한 골동품이 전부였다. 아마 이곳에서 가장 좋은 물건이라고 해봤자 일리안이 몇 년 전에 가져다준 찻잔 세트가 끝일 터였다.
아니면……. 일리안은 현재 서른세 살일 자신을 떠올렸다. 전쟁이 끝난 직후엔 무엇을 했더라.
그래, 라울이 생겨 돈을 벌어야겠다며 당장에 임무에 나섰다. 더군다나 지금쯤 할 임무라면,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디 후작가에 잠입을 해 정보를 훔쳐 오는 것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일리안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그 일은 성공은 했지만 따라붙는 이가 생겨 몇 달을 숨어 살아야만 했다.
혹시 그것과 관련된 자인가.
일리안은 손을 뻗어 눈앞에 보이는 낡은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몇 년 전에 타파가 과도로 써야겠다며 주워온 것이었다.
집 안을 걸어 다니던 의문의 인물은 저 안쪽, 커튼이 쳐져 있는 곳에 있었다. 일리안은 숨을 죽이며 날카롭게 단도를 쥔 채 걸음을 옮겼다. 실루엣으로 보아 남자인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커튼 뒤에서 무엇을 하는지 바쁘게 움직이던 남자가 행동을 멈췄다.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남자도 일리안의 기척을 눈치챈 게 틀림없었다. 일리안은 단도를 세게 움켜쥔 채 커튼과 함께 남자의 귀 바로 옆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상황에 익숙한 듯 커튼째로 일리안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손목을 잡은 채로 당긴 남자가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두었다.
커튼이 우드득, 하며 천장에서 뜯어졌다. 남자에게 속박된 채 손목이 잡힌 일리안의 머리 위로 뜯어진 커튼이 쏟아졌다.
남자가 일리안의 붙잡은 손목을 비틀자 그녀는 낮은 신음과 함께 단도를 떨어트렸다.
속으로 망할, 을 중얼거렸다. 남자의 실력이 자신보다 우위인 모양이었다. 아니, 대충 보아도 체격이 몹시도 큰 것 같았으니 힘이 부족했던 것 같기도 했다.
가이우스 씨의 말대로 체력 단련에 더 힘쓰는 거였는데. 운동으로 건강해지긴 했지만 용병들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일리안은 제 머리 위로 덮어진 커튼이 치워지는 감각에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의 얼굴이라도 확인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고개를 뒤로 돌려 자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자의 얼굴은…….
“……율리어스?”
일리안은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놀란 것은 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무미건조한 얼굴의 율리어스가 손을 움찔 떨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자, 잠깐. 이건 좀 놓고……!”
잠시 멈칫했던 율리어스는 이내 싸늘한 얼굴로 당기고 있던 일리안의 손목을 다시금 꽉 쥐어왔다. 일리안은 팔로 전해지는 고통에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봤지만 열다섯 살짜리 여자아이의 몸으로는 그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중요한 게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일리안의 허리를 포박한 손을 조금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답해라. 네가, 왜, 이곳에 있나.”
“아윽, 잡아당기지 말고 물어!”
율리어스는 그녀가 고통스러워하자 그제야 제 품에 가두었던 일리안의 몸을 풀어줬다. 넘어질 듯 그의 품에서 굴러 나온 일리안이 제 손목을 매만지며 율리어스를 마주했다.
손목을 내려다보니 그가 붙잡은 부분만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멍이 잘 드는 몸이니 어쩌면 내일쯤에는 시퍼렇게 물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대답하라고 했을 텐데.”
“그야……. 나도 일리안과 아는 사이니까,”
“또 그따위 대답인가?”
변명에 정성조차 없군.
율리어스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소를 지었다.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던 율리어스는 오간 데 없이 가장 처음 꺼져, 라고 명령하던 싸늘한 남자만이 남아 있었다.
일리안은 그에게 무어라 항의라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다시금 입을 닫았다.
“더 이상 할 말도 없는 건가? 핑계라도 제대로 해보지 그러…….”
“잠깐.”
일리안은 손을 들어 율리어스의 말을 뚝 잘라냈다. 그리곤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낡은 천이 덜렁거리는 현관을 바라봤다.
율리어스는 그녀가 제 말을 일방적으로 끊어냈다는 사실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에게 한마디 하려 했지만, 곧 율리어스 또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일리안 하인리히, 그년이 수도로 오면 꼭 찾는 곳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이만 입 닥쳐. 안에 누가 있으면 어쩌려고…….”
“지금 그년 목에 달린 돈이 얼만데. 설마 여기 숨어 있을까.”
일리안은 사내들의 목소리에 붉어진 손목은 안중에도 없이 덥석 율리어스의 손을 붙잡아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다. 이제껏 소매나 겨우 붙잡던 그녀답지 않게 서슴없이 손을 잡은 일리안이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손이 붙잡힌 율리어스가 얼굴을 찌푸리고 털어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손에 힘을 준 순간 일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직시한 탓이었다.
그 눈빛에 율리어스가 잠시 멈칫한 사이 일리안은 빠르게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율리어스는 그녀가 지금 숨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부러 느릿하게 움직였다.
밖에 있는 자들은 율리어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일리안이 다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의아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뭘 하는지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율리어스는 어쩐지 망설이는 것 같은 일리안의 모습에 슬슬 옷장으로 숨어볼 생각이었다.
그 순간, 일리안은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을 줬다. 율리어스가 그녀를 바라보자 일리안은 옷장이 아닌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신발장을 턱짓했다.
사내들의 목소리가 점점 입구와 가깝게 들려오고 있었다.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율리어스와 일리안은 겨우 신발장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히자마자 사내들의 뚜벅거리는 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일리안은 낡은 신발장의 문틈 사이로 소리와 함께 빛이 새어 들어오자 숨소리를 낮추고 밖을 바라봤다. 사내들은 집안 이곳저곳을 찔러보고 다니기 바빴다.
바깥을 확인한 일리안이 고개를 돌려 율리어스를 확인했다. 커다란 몸으로 좁은 신발장 안에 갇힌 그가 가만히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율리어스의 다리가 몹시도 긴 탓에 좁은 신발장 안에 들어가려면 일리안은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거의 품 안에 안기듯 앉아 있으니 그로선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바라봐야만 할 터였다.
일리안은 사내의 다리 사이에 앉느라 자꾸만 부딪치는 체온이 불편해 조금씩 몸을 틀었다. 율리어스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도, 타파가 신발장도 주워서 쓴답시고 집 크기에 맞지도 않은 커다란 수납장으로 넣어둬서 다행이었다. 그러니 거의 가이우스에 필적하는 키를 가진 율리어스도 숨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야, 야.”
“왜?”
“여기 커튼……. 좀 이상하지 않냐?”
밖에 있는 사내는 2명이 전부였다. 사내 중 1명이 일리안과 율리어스가 몸싸움을 하느라 떨어진 커튼을 들어 올리며 의문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여기 그년 할머니 집인가, 하지 않았었냐. 근데 왜 내 눈엔 단검으로 몸싸움한 것 같지?”
봐, 여기 찢어져 있잖아.
남자가 커튼의 구멍 난 부분을 들어 올리며 다른 사내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확인한 남자는 흐음, 하며 의미 모를 반응뿐이었다.
그러다 커튼을 매만지던 남자가 갑작스레 그것을 내동댕이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튼 뒤에는 오래된 장롱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벌컥, 남자가 그것을 열었다.
“야, 암만 여기서 몸싸움이 있었으면 누군진 몰라도 갔어도 벌써 갔지. 숨어 있겠냐? 과민하기는.”
“……그런가? 내 눈엔 얼마 안 된 것 같냐, 왜.”
장롱 안에는 타파의 오래된 겉옷들만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남자는 실망한 눈치로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손을 떼었다.
성의 없는 손길로 대충 집 안을 조금 더 뒤적이던 사내들은 이내 타파의 집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고도 몇 분을 더 신발장에 숨어 있던 일리안과 율리어스는 완전히 조용해지고서야 기어 나왔다.
넓지도 않은 곳에 커다란 남자와 구겨져 있느라 여기저기 쑤시는 몸을 두드린 일리안이 힐끔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신체 크기상 그가 더 뻐근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대신, 일리안을 내내 주시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의 얼굴에서 조금도 불쾌한 기색이 보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그녀에게 싸늘한 태도로 입을 열 시간인데 그의 얼굴은 피곤한 기색은 있지만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네가.”
“예?”
“네가, 왜.”
율리어스는 문득 입을 열다 말고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리곤 갑작스레 몸을 휘청거리며 옆에 놓인 기둥을 붙잡았다.
그가 비틀거리자 놀란 일리안이 단걸음에 그에게 다가왔다.
“율리어스? 괜찮아?”
“반말… 하지 마라.”
율리어스는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달리 정신이 끊어지는지 띄엄띄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율리어스 님? 율리어스……. 유리!”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부르는 유리라는 음성이 일리안 하인리히와 몹시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