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38화 (38/123)
  • 38. 더 이상은

    일리안은 느리게 눈을 끔뻑거리다 다시금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율리어스 님께서 더 이상 헤이븐 님이 출입하는 걸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어쩌면 통보였다. 더는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도 다름없었다.

    가이우스는 그 사실이 면구스럽다는 듯 그녀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런 가이우스를 보고서야 겨우 그의 말이 이해가 된 일리안은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별일 없이 대화를 하던 그가 갑작스레 제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통보하다니.

    일리안은 자신이 그가 일방적으로 통보를 내려 기분이 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이우스에게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찌푸렸던 미간을 어색하게 매만졌다.

    “……제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그것도 힘들겠습니다. 율리어스 님께서 당장 바쁘신 터라…….”

    “바쁜 게 맞긴 한 겁니까?”

    일리안이 실소하자 가이우스는 더더욱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가 그녀를 피하고 있음은 명확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가이우스의 잘못은 아니었다. 일리안은 덩치 큰 남자가 제 앞에서 한없이 작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가이우스 씨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고개는 그만 숙이시죠.”

    “…….”

    “율리어스……. 그에게 제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나 봅니다.”

    짐작 가는 것은 전혀 없지만.

    최근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봐야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율리어스와 대화를 나눈 게 고작이었다. 그가 도대체 자신에게 왜 이렇게 구는지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리안은 이내 율리어스에 대한 생각을 털어냈다. 그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이상, 고작해야 남작 영애인 자신이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인연이 끊어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와 가까워져 봤자 진짜 헤이븐 윈터가 아닌 자신에게 좋을 일은 없으니까.

    일리안이 담담히 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가이우스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붙여왔다.

    “……헤이븐 님.”

    “예?”

    “그분은……. 그분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러시는 건 아닙니다.”

    가이우스는 자신이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는지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율리어스 님을 뵙지 않는 게 좋습니다. 시기가 좋지 않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이우스가 고개를 들어 둘의 머리 위에 있는 공작성의 높은 곳을 바라봤다. 아마도 율리어스가 있을 집무실이었다.

    “지금은 일리안 님께서 떠난 직후이지 않습니까.”

    * * *

    일리안이 율리어스에 대한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달이 지난 뒤였다.

    그녀는 아침에는 가이우스와 함께 짧게 운동을 하고, 오후에는 여전히 빼빼 마른 파르타 남작에게 수업을 듣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열두 살부터 열다섯 살에 이르기까지, 일리안의 수업을 담당하던 파르타 남작이 더 이상 자신이 가르칠 나이가 아니라며 그만두기를 통보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저분이 앞으로 절 가르칠 분이군요.”

    “예, 헤이븐 님. 파르타 남작은 열 살 전후의 아이들을 가르쳤으니, 슬슬 선생님을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집사장인 펜서는 일리안의 앞에 선 남자를 소개했다. 빼빼 마른 파르타 남작과는 달리 덩치가 제법 있는 그는 키만 빼면 가이우스와 체격이 비슷해 보였다.

    “겔트 백작입니다. 헤이븐 윈터 양.”

    “그럼, 백작님. 헤이븐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만 저는 나가보지요.”

    일이 바쁜 펜서는 그녀의 교육실에서 빠르게 빠져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겔트 백작이 느물한 웃음을 지은 것은 그때였다.

    “귀여운 아가씨로군요. 제 명성은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세이드릭 공의 수업도 제가 맡았었지요.”

    “그렇군요. 모쪼록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일리안은 자신을 두고 귀여운 아가씨라 칭하는 겔트 백작이 첫인상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좋은 이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다.

    일리안의 딱딱한 인사에 겔트 백작이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턱수염을 매만지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모양새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윈터 영애가 제 수업을 따라오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가르치던 사람이 파르타 남작이라지요? 한 번도 못 들어본 양반의 이름인데…….”

    “명성을 높이는 것에는 그다지 뜻이 없으셨습니다.”

    “뭐, 아무튼. 리하르트 공작성에서 고용한 것이니 저도 노력해 보도록 하지요.”

    리하르트 공작성이 아니었다면 너 따위를 가르칠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선연한 업신여김이 그의 눈에 담겨 있었다. 일리안은 무던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며 대답하지 않았다.

    겔트 백작은 그다지 수업에 열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수업 자료를 준비해 오거나 그날의 진도를 생각하곤 했는데, 몇 주가 지나자 금방 그런 태도는 사라졌다.

    “오늘도 외우지 못하신 겝니까?”

    겔트 백작은 일리안에게 들리도록 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일리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르쳐 주는 이도 없이 겔트 백작이 내어주는 과도한 분량을 모두 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 말 없이 짧게 고개를 숙여오는 일리안을 바라보던 겔트 백작은 크게 혀를 찼다.

    “쯧!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으면 몰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누가 보아도 일리안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제자인 자신이 왜 겔트 백작에게 귀여워 보여야 하는 건지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겔트 백작은 일리안의 시험지를 보며 혀를 찰 뿐, 수업을 진행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단지 그녀가 듣도록 연신 나무랄 뿐이었다.

    그의 중얼거림을 듣던 일리안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뭐? 대체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하!”

    그러나 일리안은 겔트 백작이 무어라 하건 교육실을 벗어났다. 겔트 백작은 일리안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노려봤지만, 그녀는 일관된 태도로 무시했다.

    화장실로 향하던 일리안의 맞은편에서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후에는 폐하를 알현할 예정입니다.”

    율리어스가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보좌하는 가이우스가 옆에서 딱딱한 얼굴로 그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일리안은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복도 한편으로 물러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자신을 거부하고 있으니, 모르는 척 구는 게 맞았다.

    율리어스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피하는 일리안을 스쳐 지나가듯 바라봤지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가이우스는 그제야 복도 한쪽에 서 있는 일리안을 발견한 듯 짧게 눈인사를 해왔다. 율리어스의 뒤를 따라가며 그 몰래 일리안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기도 했다.

    그가 일리안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율리어스는 빠른 걸음으로 이미 저 멀리 간 뒤였다. 가이우스가 다급히 율리어스의 뒤를 따라갔다.

    일리안은 그들이 사라지고서야 고개를 들어 뒷모습을 바라봤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율리어스였다.

    이내 고개를 돌린 일리안은 겔트 백작이 기다리고 있을 교육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움직였다. 그런 일리안의 발끝에 무언가가 부딪쳤다.

    “……수면제?”

    정육면체의 물건을 들어 올리자 내부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에 적힌 글씨는 그것이 수면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에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몬스터 사냥 시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일리안은 그것을 내려다보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율리어스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 * *

    수업을 마치고 해가 저물어갈 때였다. 일리안은 공작성으로 들어오는 입구 근처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본래라면 윈터 가문으로 돌아가고도 남았을 그녀가 무언가를 찾듯 주변을 둘러보자, 그 모습을 발견한 경비병들이 일리안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이, 헤이븐!”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일리안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경비병들이 서 있는 초소로 다가왔다.

    “저, 혹시.”

    “무슨 일이야?”

    “……율리어스 님께선 아직 안 돌아오셨습니까?”

    경비병들은 서로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녀가 공작 전하에게 후원을 받는다는 사실은 공작성에서 일하는 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율리어스의 소재가 궁금하다면 직접 확인하러 가면 될 터였다.

    “아직 안 돌아오셨는데. 왜? 드릴 말씀이라도 있나?”

    “그게,”

    입을 열었던 일리안은 어딘지 주저하는 기색으로 도로 입을 닫았다. 그녀의 주머니 안에 있는 박스를 꾸욱 쥘 뿐이었다.

    “이런, 공작 전하도 귀신이셨구만. 마침 돌아오시고 말이야.”

    초소에 서 있던 일리안은 경비병의 말에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대로 길 너머에서 율리어스가 가이우스와 함께 말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일리안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초소를 빠져나갔다. 그녀가 내려왔을 때에는 마침 가이우스와 율리어스가 공작성의 열린 대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느리게 말을 몰며 지나가는 2명을 바라보던 일리안은, 잠시 고민하다 소리쳤다.

    “가이우스 님!”

    “……헤이븐 님?”

    가이우스는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발견하곤 율리어스에게 잠시 양해를 구했다. 율리어스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가이우스는 말머리를 돌려 일리안에게 다가왔다.

    말에서 내리지 않은 가이우스가 일리안을 내려다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헤이븐 님?”

    “이걸… 주웠습니다. 전해 드려야 할 듯해서.”

    오늘 하루 내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박스를 가이우스에게 건네자 그가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한 가이우스는 곤란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헤이븐 님, 그러니까 이건.”

    “곧 사냥철이잖습니까. 그때를 위한 것이지요?”

    일리안은 드물게 아이 같은 순진한 얼굴로 가이우스를 올려다봤다. 가이우스는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맞습니다.”

    “그럼, 물건도 돌려드렸으니 전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일리안이 돌아가자 가이우스도 다시 말을 움직여 앞서가고 있는 율리어스를 따라갔다. 가이우스가 다가오는 기색을 느낀 율리어스는 고개를 조금 돌리긴 했지만, 앞을 주시할 뿐이었다.

    “저, 율리어스 님.”

    “무슨 일인가.”

    “헤이븐 님이 이걸 돌려주셨습니다.”

    그가 내민 것은 율리어스도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수도를 떠난 뒤로 조금도 잠이 들지 못한 지가 벌써 1달여에 다다르고 있었다.

    일반적인 수면제는 그의 몸에 맞지 않아 몇 개를 투여해도 잠드는 일은 없었다. 때문에 몇 년 전부터 그는 꼭 수면해야 할 때면 몬스터용 수면제를 복용해야만 했다.

    몬스터 전용 수면제. 율리어스는 박스를 한 손에 쥐고 겉면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렸다. 그에게 너는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일리안이 떠난 직후엔 가장 독하다고 불리는 수면제조차 통하지 않아 하루에 몇십 개를 먹어 치워야만 했다.

    율리어스는 고개를 돌려 성문을 바라봤다. 익숙한 뒷모습이 공작성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더 이상 일리안이 아닌 이에게 구원받고 싶지는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