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외로움
가이우스는 그녀가 아이를 데려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즉시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그의 얼굴은 몹시도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가이우스마저 사라지자 연무장을 나선 일리안은 윈터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검술 수업도 못 하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며칠간 밀린 가문의 일을 처리하는 것도 좋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공작성을 빠져나가기 위해 정원을 걸어가던 일리안의 귓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벽에 기대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뒷모습은 율리어스였다. 그가 마주 보고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서른세 살의 일리안 하인리히였다.
“아이를… 데려오셨더군요.”
“아아, 벌써 소문이 네게 간 건가? 아주 귀여운 남자아이야, 유리. 공작성에 데려오지는 않았지만.”
기시감이 드는 대화였다. 이전 생에서도 라울이 생긴 뒤 일리안이 수도에 돌아왔을 때, 공작성에 들러 그와 이런 대화를 한 기억이 스치듯 지나갔다.
“정말, 당신의 아이가 맞습니까?”
“뭐? 당연한 이야기를. 그래, 유리. 내게 하나밖에 없는… 나의 아이라고.”
“아이의 아버지는 누굽니까.”
벽 너머에 있는 일리안에게도 느껴질 정도로 몹시 싸늘한 어조였다. 서른세 살의 일리안, 그러니까 여자는 볼을 긁적이며 일순 곤란한 내색을 비추었다.
“……내가 싯투르 공국의 전쟁에 나갔던 건, 알고 있지? 그는 전쟁 중에 죽었어.”
“죽었단 말입니까?”
“그래.”
율리어스는 아이의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에 여자의 얼굴 위로 지나간 잠깐의 슬픔을 읽어냈다. 순간 그의 주먹이 아득 쥐어졌지만 그녀는 눈치챈 기색이 아니었다.
“그럼, 아이는 혼자 계속 키우실 겁니까?”
“물론. 녀석은 내 아이니까.”
“그렇다면……. 이제 떠나지 않는 겁니까.”
여자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보다도, 남자가 있었다는 소식보다도 율리어스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듯 물었다. 여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조용했지만 뜨겁게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그 짧은 고갯짓이 율리어스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예상조차 못 한 채.
“맡은 의뢰가 있어. 타파…, 그러니까 내가 알던 이가 죽어서 잠깐 수도에 들렀을 뿐이라고. 곧 떠나겠지.”
“…….”
“이런, 공작성에 너무 오래 있었는데. 라울이 기다리겠어. 유리, 슬슬 가봐야겠다.”
여자는 제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한번 확인하곤 씩 웃으며 율리어스를 지나쳐갔다. 율리어스는 여자가 자신을 지나쳐 가도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여자가 나올 기색을 보이자 벽 너머에 숨어 있던 일리안은 재빨리 걸음을 옮겨 제 몸을 숨겼다. 얼마 안 가 일리안이 서 있던 자리로 나온 여자는 고개를 돌려 아직 가만히 서 있는 율리어스를 한번 바라봤지만, 그에게 돌아가진 않았다.
그 뒤로 그녀는 아쉬운 기색도 없이 공작성을 떠나갔다. 몸을 숨겼던 일리안은 여자가 사라지고서야 제 모습을 드러냈다.
굳어 있는 율리어스의 뒷모습을 발견했지만 일리안은 함부로 다가가지 않았다. 여자가 나간 길을 따라 자신도 곧장 공작성을 나갈 생각이었다.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일리안을 멈춰 세운 것은 율리어스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가이우스인가.”
멈칫한 일리안은 결국 그를 지나치지 못하고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가자 굳어 있던 율리어스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일리안을 바라봤다.
“넌…….”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일리안은 곤란한 얼굴로 먼저 부정했지만 율리어스는 그다지 그녀를 나무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딘지 다른 생각에 빠진 모습이, 그답지 않았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그런가.”
가만히 서 있는 율리어스의 모습에 먼저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율리어스는 언제나 무미건조했을 뿐, 지금처럼 싸늘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처음 본 것이었다.
율리어스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여 중얼거리듯 말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라……. 누군가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고작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정도라면 다행이겠군.”
“죽이고… 싶다니. 누굴 말입니까?”
율리어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돌려 여자가 빠져나간 길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대화로 풀 수도 있잖습니까. 뭔가 마음에 안 든다면 직접 말을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아무튼, 사람을 죽이는 건 안 됩니다.”
“걱정 마라.”
내가 죽이고 싶은 이는 이미 죽었다는군.
율리어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이 몹시도 담담해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이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일리안은 알고 있었다. 그자가 아직 죽지 않았더라면, 율리어스는 지금 당장 그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 * *
서른세 살의 일리안 하인리히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녀와 친구인 렉스가 직접 듣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또한 여자가 그다음 날 곧장 수도를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작성으로 매일 나오는 일리안은 자신이 이다지도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는가, 싶을 정도로 공작성의 사람들 사이에선 떠들썩했다.
“가이우스 씨.”
“…….”
“가이우스 씨? 듣고 있어요?”
가이우스와의 검술 수업이 재개된 것은 여자가 떠나고 난 며칠 뒤부터였다.
가볍게 연병장 몇 바퀴를 달리고 온 일리안이 목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가이우스를 불렀지만,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렸다.
가이우스는 제 이름이 불린지도 모른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리안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봐요, 가이우스 씨.”
“예, 예? 이런, 헤이븐 님. 벌써 다 도셨습니까?”
“방금 마지막 바퀴를 달리고 왔는데요. 그런데 가이우스 씨,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가이우스는 어딘지 주저하는 얼굴로 머뭇거리다, 이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곤 일리안에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헤이븐 님. 일리안 님과 친구, 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예. 사실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지만……”
일리안은 제 눈을 바라보는 가이우스에게서 슬쩍 시선을 모로 돌렸다. 바른길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가이우스의 순수한 눈빛은 어딘지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면……. 일리안 님의 아들, 그러니까 라울 하인리히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예?”
“……아니, 아닙니다. 제가 마음이 조급해져서.”
가이우스는 자신이 어린 헤이븐에게 정보라도 캐내듯 물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일리안 툭 이야기했다.
“라울의 아버지를 묻는 거라면, 미하엘 세이버일 겁니다. 전쟁 중에 죽었지만요.”
가이우스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답이 들려오자 놀란 얼굴로 일리안을 바라봤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저 연병장을 도느라 제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을 뿐이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를… 아십니까?”
“일리안의 친굽니다. 푸른 새벽 용병단에 그녀와 같이 입단했던…….”
“두 분께선, 긴밀한 사이셨습니까.”
어떻게 아는 거냐는 물음도 나오지 않았다. 가이우스는 그것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 다급하게 일리안에게 물어왔다.
평소에는 남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그가 왜 이렇게까지 구는지는 일리안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선선히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뭐……. 긴밀하다면 긴밀한 사이일 겁니다.”
일리안은 싯투르 공국의 전쟁 중에 죽었던 미하엘 세이버를 떠올렸다. 탁한 색의 금발 머리가 인상적이었던 그는 일리안의 기억 속에서도 제법 차지하는 구석이 많은 이였다.
“일리안. 밑에서 너 언제 오냐고 난리인데?”
“됐다. 귀찮다고 전해, 피곤해 죽겠는데 술은 무슨…….”
“그래도 가자. 다들 너 좋아하잖아.”
미하엘은 모두 험상궂기 짝이 없는 용병단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남자였다. 그의 검술 또한 기사들의 것처럼 어딘지 모를 품위가 느껴졌으니, 어쩌면 버려진 귀족 출신일지도 몰랐다.
그는 일리안을 좋아했다. 그것이 성애의 의미인지, 친구로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용병단의 다른 이들도 매번 일리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미하엘을 자주 놀렸으니 그의 일리안 사랑은 꽤 유명했다.
“……인마, 미하엘. 할 짓 없냐?”
“내가 뭘.”
“가서 술이나 마셔라. 모처럼 큰 건도 성공했는데.”
미하엘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일리안의 반응에도 말없이 웃었다. 그런 미하엘의 모습에 일리안은 저 녀석이 여자였으면 남자가 줄줄이 따랐을 텐데, 라고 생각했을 뿐.
“일리안. 의뢰도 끝났는데 뭘 할 생각이야?”
“글쎄. 시간도 남으니 수도나 다녀올까 하는데. 가서 할멈이 끓여주는 따끈한 차 한 잔이 그립기는 하네.”
“아아, 전에 말했던 타파… 라는 할머니?”
“그래.”
미하엘의 질문에 심드렁하긴 했어도 일리안은 나름대로 성실히 대답했다. 가만히 앉아 있던 미하엘은 2층 바닥에 제 팔을 베고 드러누운 일리안을 바라봤다.
“저번 의뢰가 끝나고서도 그러더니, 또?”
“뭐……. 그 할멈은 나 없으면 외로울 테니까.”
미하엘이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질문을 멈추자 대화는 잠시 끊겼다. 그것을 다시 시작한 것은 미하엘이었다.
“외로운 건, 네가 아니고?”
일리안은 지나간 기억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기 바빴던 미하엘은 전쟁 중, 그녀가 보는 눈앞에서 절명했다. 서른을 겨우 넘긴 짧은 인생이었다.
미하엘이 남기고 간 라울은 그의 얼굴을 빼닮아 금발 머리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답게 일리안이 없으면 빽빽 우는 것도 미하엘을 닮았다.
“미하엘 세이버… 가 아이의 아버지입니까?”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확실한 겁니까.”
이어서 들려오는 가이우스의 질문에 일리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중에 죽은 그의 시체를 일리안이 직접 화장하였으니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가이우스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자 침묵에 빠졌다. 안색이 몹시도 가라앉은 것이 썩 기분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가이우스 씨?”
“아닙니다, 헤이븐 님. 검술 수련 시간에 제가 너무 딴생각에 빠져 있었군요.”
“일이 바쁘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럴 수도 있죠.”
일리안이 괘념치 않다는 기색을 띠자 가이우스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일리안이 입을 열었다.
“율리어스 님은… 괜찮으십니까.”
미소 짓던 가이우스는 일리안의 질문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일리안이 마지막으로 본 율리어스의 모습은 심상치 않았으니, 그녀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싶어 걱정했다.
그의 상태를 말하기 주저하던 가이우스가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다시 잠들지 못하십니다.”
“예? 일리안에게 아이가 생겨서요?”
“……아닙니다. 그분이 잠들지 못하시는 건…….”
율리어스가 잠이 들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단지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율리어스의 기분을 완전히 망가트린 것은 맞았지만 수면은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일리안에게 그 이유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제가 다시 한번 들어가 볼까요.”
그가 잠들지 못할 때에 불면을 고쳐준 적이 있는 일리안이었으니 하는 말이었다. 이번에도 그의 불면을 고쳐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번 해본 일이니 크게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데 가이우스는 그녀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했다.
“율리어스 님께서……. 헤이븐 님의 출입을 금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