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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36화 (36/123)

36. 일리안 하인리히

타파가 죽었다.

그 사실이 멍한 일리안의 머리를 연신 두드렸지만,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친지가 없는 타파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에도 그러했다.

며칠째 일리안은 타파의 장례식을 위해 공작성에 가지 않고 있었다. 타파가 그나마 친분이 있었던 이웃 주민들과 함께 그녀의 장례를 준비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나니 타파는 관 속에 곱게 누워 있었다. 낡아빠진 망토를 벗고 흰옷을 입은 타파는 우습게도 살아 있을 적보다 고왔다.

“……타파.”

타파의 관 앞에 선 일리안이 멍한 얼굴로 그녀의 주름진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 곳곳에는 마차 사고에 의한 상처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일리안은 타파의 시체를 보는 것이 두 번째였다. 그녀가 곧 죽는다는 것은, 일리안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는 아니었다.

타파는 분명히 자연사했다.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죽었다고, 그녀의 장례식에서 마주한 이웃 주민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이다지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는 타파의 모습은 일리안의 기억 어디에도 없었다.

타파가 자연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막으려 하지 않았다. 만약 마차 사고로 죽을 줄 알았더라면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 미래를 바꾸려 했을 것이었다.

주먹을 꽉 쥔 채 눈을 감은 타파를 내려다보는 일리안에게 이웃 주민 중 1명이 말을 걸어왔다.

“……저, 타파 할머니가 그날 입고 있던 옷에서 나온 건데요. 어떻게 할까요?”

여자가 건넨 것은 찻잎이었다. 차는 쓰기만 하다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일리안이 그나마 입을 대는 찻잎이었다.

요즘 들어 일리안, 그녀는 유난히 타파의 집을 자주 찾았다. 일리안이 이리도 자주 찾은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 늘 마시는 찻잎이 부족했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사러 나갔다 죽은 것이다.

일리안은 그 사실을 겨우 삼켜내고서 떨리는 손으로 여자가 건넨 찻잎이 담긴 나무통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누구세요?”

친지가 없는 타파의 장례식에 아이가 있으니 의문이 들 법도 했다. 여자가 어딘지 의문스러운, 그리고 조금의 의심이 담긴 눈빛으로 일리안을 바라봤다.

일리안은 그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자신은 과연 누구일까.

“친구……. 아니, 손녀입니다.”

“타파 할머니에게 손녀가 있었나요? 처음 듣는 사실인데…….”

“오래도록 뵈러 오지 못하다 연락이 닿아왔습니다.”

타파와 일리안이 처음 만났던 때는 그녀가 아직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이었다. 일거리가 없는 일리안은 수도 내 깊숙한 곳까지 돌아다녔는데, 어느 싸구려 술집의 주방에서 식모로 일하는 타파와 만났다.

“쯧쯧, 내 따악 보니 어디 가서 객사할 얼굴이다.”

“뭐요? 할멈, 말 다 했어? 내가 얼마나 능력이 좋은데!”

“그러면 뭐 하냐. 주변에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데.”

너 도와줄 놈 하나 안 뒀지?

타파는 그렇게 물으며 일리안에게 술집의 잡일을 맡겼다. 산속을 누비며 살다 도심으로 내려와 잘 적응하지 못하던 일리안을 도와준 것이 그녀였다.

그리고 어느 날 일리안이 용병이 되겠노라 했을 때, 등짝을 내려치며 누구보다 말린 것 또한 타파였다.

“네년이 미쳤구나, 미쳤어! 사내들도 죽어나가는 그 일을 네가 뭐라고 해! 뭘 해?! 다시 말해 봐라!”

열 살에 부모를 잃은 일리안에게 타파는 곧 가족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편안하게 죽지 못하고 마차 사고로 죽게 된 것이다.

일리안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타파를 내려다보다 이내 그녀의 품 안에 꽃을 내려뒀다.

바뀐 것은 물론 죽게 된 원인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타파는 올해 가을이 지나고서야 죽었으니, 시기 또한 조금 앞당겨진 것이다.

일리안은 씁쓸한 얼굴로 뒤돌았다. 그녀의 죽음을 예상하고 준비했지만, 그것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40년이란 세월을 지나쳐 온 이였다. 그녀의 곁에서 죽어간 동료들은 무수히 많았다. 눈앞에서 죽은 이들 또한 숱하게 보아왔다.

타파의 죽음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며칠간이면 되었다. 이제는 다른 이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돌아선 일리안의 귓가로 몹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어, 라울.”

아이를 품에 안은 여자가 일리안의 바로 옆을 지나쳐 갔다. 키가 몹시도 큰 그녀의 머리칼이 짧아 얼핏 남자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

일리안은 고개를 돌려 타파의 관 앞에 선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여자는 칭얼거리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타파를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일리안의 귓속으로 들려왔다.

“이렇게 갈 거면 말이라도 하고 가지 그랬냐, 할멈…….”

당신의 친구가 돌아왔어, 타파.

단도 두 개를 허리춤에 차고 있는 그녀는, 일리안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 또한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운 얼굴이었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수도로 돌아왔다.

* * *

일리안은 정신없이 달려 윈터 가문으로 돌아왔다. 넋이 나간 얼굴의 그녀를 발견한 타피아가 걱정스러운 눈치를 보냈지만, 일리안은 달래줄 새도 없이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털썩 침대 위로 주저앉은 일리안이 허공을 바라봤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이 또 1명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자신은 일리안 하인리히가 맞는 걸까. 자신이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리안은 헛구역질이 나와 제 가슴팍을 두드렸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자신을 일리안이라 불러줄 이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일리안의 머릿속을 지나쳐 간 것은 라울이었다. 여자의 품 안에 안겨 있던 라울은 그녀가 기억하는 그대로 아름다운 금발을 지니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1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싯투르 공국의 전쟁은 본래보다 1년이 길어졌다. 그런데 이전 생에선 전쟁이 끝나고서야 태어났던 라울이 전쟁이 끝나지 않은 와중에 태어났다……?

그제야 하나의 명제가 일리안의 머리를 관통했다. 죽어야 할 이는 결국에 죽었으며, 태어나야 할 이는 결국에 태어났다.

그 시기가 모두 조금씩 빠르고 늦음은 있었지만 이 사실만큼은 틀리지 않았다. 미래는 바뀌는 듯했지만 과정만이 바뀌었을 뿐,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라울은 자신이 어떤 발버둥을 치든 죽는 걸까. 운명의 굴레 앞에서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릎 꿇는 것뿐이던가.

일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눈치채기라도 한 듯 누군가 일리안의 방문을 두드렸다. 일리안의 들어오라는 소리를 듣고서야 문을 두드린 이가 들어왔다. 디노였다.

“저… 헤이븐 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는걸. 걱정이라도 돼서 온 거야?”

일리안은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와 타파의 장례를 보고 온 슬픔은 모두 묻어두었다. 타파가 죽었다는 사실은 일리안의 주변 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헤이븐 윈터는 도시 골목의 가난한 노파와 조금도 관련이 없었으니까.

디노에게 언제나 그랬듯 씩 웃는 얼굴로 대답하자 그가 눈에 띄게 안심을 했다.

“제 걱정도 걱정이지만, 공작성에서…….”

“공작성?”

“어제 가이우스 경이 헤이븐 님께서 수업을 들으러 오지 않으신다고 걱정하셨습니다. 이렇게 함부로 빠질 분이 아니라면서요.”

가이우스가 돌아왔지만 일리안은 해야 할 일이 많아 당장 그의 수업을 듣지 못했다. 겨우 파란 화원과 데뷔탕트 일이 정리되고서 수련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타파의 장례식으로 또 한 번 미뤄진 것이다.

가이우스가 없을 때에도 검술 수련만큼은 빠진 적이 없었으니 그가 걱정할 법도 했다. 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디노에게 걸어갔다.

“그래, 오늘은 가야겠네. 가이우스 씨가 걱정하겠어.”

* * *

일리안이 공작성에 드나들게 된 지도 햇수로 어언 3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의 얼굴이 익숙해진 경비병들이 일리안에게 짤막하게 목례를 해왔다.

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지나쳤을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떠드는 이야기가 일리안의 발목을 붙잡았다.

“야, 야. 일리안 하인리히 님께서 돌아오셨대.”

“뭐?! 정말? 그럼 다시 공작 전하의 호위를 맡으시는 건가?”

“호위를 하러 돌아온 건 아니고, 잠깐 들리신 거라더라. 너 못 봤냐? 점심 즈음에 오셔서 인사하고 다니시던데.”

“언제 가서 인사라도 드릴까? 날 기억은 하고 계시려나.”

“내 동생 안부도 물으시더라. 걱정은 접어둬.”

일리안 하인리히가 이곳에서 일하던 1년간 그녀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다못해 마구간지기조차 그녀와 아는 사이였으니 경비병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일리안은 겨우 그들을 지나쳐 가며 가이우스가 있을 연무장으로 향했다. 지나치는 이들마다 저들끼리 이야기하기 바쁜 것이 일리안 하인리히의 소식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에 가이우스는 없었다.

그가 연무장에 도착한 것은 제법 시간이 지나고 난 뒤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가이우스에게 일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짧게 인사했다.

“검술 수업으로 뵙는 건 오랜만인 걸요, 가이우스 씨.”

“예, 헤이븐 님. 잘 지내셨습니까? 기회가 되지 않아 안부 인사 한번 전할 시간이 없었군요.”

“저야 별일이 있을 리가요. 대신, 가이우스 씨가 없는 동안 검술 실력은 제법 늘었습니다.”

“오, 정말입니까? 렉스 경이 잘해주셨나 봅니다.”

렉스는 그 자신이 헤이븐 윈터의 스승은 아니라고 했지만 스승 못지않게 자세히 가르쳤다. 종종 그녀에게 쌍검을 다루어보라고 부추기는 것이 문제긴 했지만, 입담 좋은 그녀가 은근히 넘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이우스는 그것이 몹시 자랑스러웠는지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처음으로 맡아본 제자인 그녀가 검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가운 듯했다.

일리안 또한 잠깐이나마 자신의 검술을 가르쳤던 가이우스에게 제 늘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롱소드를 눈으로 슬쩍 훑었다.

“그럼 무엇부터 할까요? 이제 목검 들 나이는 지났으니 진검으로 보여드릴까 하는데…….”

“이런, 헤이븐 님. 제가 미처 말씀을 못 드렸군요.”

“예?”

가이우스는 곤란한 얼굴로 일리안을 내려다보았다. 키 차이가 많이 나는 그녀를 위해 가이우스가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사실, 수도에 일리안 하인리히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아, 헤이븐 님께서도 일리안 님과 아는 사이니 들으셨겠군요. 덕분에 제가 일이 조금 많아져서……. 오늘은 아무래도 검술 수업을 못 할 듯싶습니다.”

일리안은 검술 수업을 하지 못해 아쉽다는 생각보다도 문득 드는 의문에 그의 눈을 바라봤다.

“일리안이 돌아왔는데 왜 가이우스 씨가 바쁘신 겁니까?”

“……그건.”

고작해야 율리어스의 경호로 한번 일한 적이 있던 용병 1명이 수도에 돌아온 것이다. 아주 돌아온 것도 아니었고, 그녀의 성격상 분명 잠깐 수도에 들린 것일 터였다.

그런데 가이우스가 바쁘다니? 이전 생을 떠올린 일리안은 종종 수도에 들렀던 때를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가이우스는 그런 그녀의 기억 속에서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잠깐 돌아와 봤자 만나는 이는 타파에 불과했고, 율리어스조차도 일이 바빠 돌아올 때마다 얼굴을 볼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가이우스는 어딘지 머뭇거리는 모습으로 대답을 주저했다. 일리안은 인내심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곧이어 열려 있는 연무장으로 누군가 뛰어 들어와 가이우스를 다급히 불렀기 때문이었다.

“가이우스 님, 가이우스 님!”

“무슨 일입니까? 헤이븐 님의 검술 수업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아니라, 가이우스 님.”

달려온 남자는 어찌나 급했는지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가이우스 또한 그가 바쁘게 달려온 것을 알았는지 남자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기다렸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남자의 말은 인내심 깊은 가이우스를 가만히 기다릴 수 없게 만들었다.

“일리안 하인리히 님께서… 아이를 데려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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