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35화 (35/123)
  • 35. 우연이라 말할 셈인가

    “굶고 다니지 마라.”

    아홉 살에 불과했던 율리어스는 그때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아직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젖살이 그를 소년으로 보이게끔 했다.

    일리안은 용병 일을 위해 집을 나서면서도 율리어스에게 단단히 주의시켰다. 누군가와 함께 집에서 지낸 적이 아주 오래되어 몹시도 어색했었다.

    바로 옆 빵집의 실리트 아주머니에게 얼마의 돈과 함께 아이의 점심을 부탁했지만, 그러고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일리안은 차라리 아이가 이 돈을 가지고 달아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폐와 동전 몇 개를 쥐여주었다.

    마흔 살의 일리안은 경력도, 명성도 제법 쌓았지만 젊은 시절의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리안은 용병으로 고용되어서도 몬스터를 상대하기는커녕 나이든 용병들의 뒤치다꺼리나 하기 바빴다.

    특히 수도에 있는 이들은 대개 텃세가 심했다. 막 수도에 다시 자리를 잡았던 터라, 그 날도 제법 고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쿵쿵.

    몸이 힘들어 집 앞까지 가서야 율리어스가 생각난 일리안은 혹시나 싶어 제 집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 아이가 있다면 문을 열어주리라고 생각한 탓이다.

    묘한 기대감이 있었다. 늘 혼자 지내었던 일리안은 누군가 집 안에서 문을 열어주는 경험이 적었고, 한 번쯤은 누군가 자신을 기다려 주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가 이미 떠났길 바라기도 했다. 직감적으로, 녀석과 너무 정이 들었다가는 떼어내기 힘들 것을 알았다.

    “뭐야, 갔나 보네.”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는 이가 없었다. 일리안은 결국 자신의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인마, 너…….”

    안에 들어가자 율리어스가 방 한가운데에서 인형처럼 서 있었다. 그녀가 돈을 쥐여준 모양새 그대로.

    설마 싶던 일리안이 물었다.

    “설마, 나 돌아올 때까지 여기 서 있었냐?”

    “……응.”

    “집에 있는 돈 들고 달아났나 했더니, 쥐여준 돈도 못 쓰는 멍청이였냐. 배도 안 고팠나?”

    “배고팠는데. ……배고팠습니다.”

    “그럼 식사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이 녀석아.”

    일리안은 아이를 단번에 안아 들었다. 안 그래도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메마른 녀석이 안쓰러웠다. 당장 실리트에게 따지러 가기 위해 움직였을 때였다.

    “일리안.”

    “왜.”

    “일… 가지 마요.”

    그녀가 율리어스의 힐끔 내려다보고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툭 뱉었다.

    “돈은 네가 버냐.”

    “내가 벌면.”

    내 옆에 있어줘요?

    그녀는 매달리듯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의 눈빛은 간절했고, 애절했으며 또한 탐욕스러웠다.

    * * *

    일리안은 화가 난 실리트를 겨우 토닥여 빵집으로 돌려보냈다. 그의 옷에 부착된 단추만 보아도 귀족인 걸 모르겠냐는 협박이 담긴 위로였다. 대신 그녀는 우산도 없이 뛰쳐나온 실리트의 손에 제 우산을 쥐여주었다.

    우산이 없어진 일리안은 제 머리 위로 비가 쏟아지자 자신의 머리보다도 품에 안긴 바게트가 맞지 않도록 어깨를 굽혔다. 마차까지 뛰어갈 생각이었다.

    그 순간, 일리안의 머리 위로 우산이 드리웠다. 고개를 들자 율리어스가 무감각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비를 꽤나 맞은 일리안의 옷에서 물방울이 뚜욱, 뚝 흘렀다. 좁은 우산을 함께 쓰느라 일리안과 율리어스는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맞닿아야 했다.

    부딪치는 어깨가 부담스러워 한 발자국 우산 밖으로 나간 일리안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안 써도 괜찮습니다.”

    그러자 율리어스는 그녀의 품에 안긴 바게트를 힐끗 보았다. 그는 일리안에게 성큼 다가와 우산을 빠져나간 그녀의 머리 위로 다시금 우산을 씌웠다.

    “네가 아니라 바게트가 젖어서다.”

    그녀는 자신이 껴안은 바게트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그에게 그렇게나 중요하단 말인가. 그가 바게트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던 일리안은 먼저 걸어가는 율리어스의 발을 맞춰 움직였다.

    그렇게 걸어가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일리안은 자신이 향하는 곳이 마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마차로 안 갑니까?”

    “윈터 가문까지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일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마차로 가는 게 빠를 텐데요.

    일리안은 결국 그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대신, 젖은 자신의 옷과 머리가 그의 고급스러운 옷들과 부딪치지 않게끔 부단히 신경 쓸 뿐이었다.

    율리어스는 힐끔 고개를 내려 자꾸만 어깨를 움츠리는 그녀를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닿고 싶지 않은 듯 불편하게 걷고 있었다.

    그는 우산을 기울였다. 일리안이 있는 방향으로 우산을 기울이자 조금씩이나마 그녀를 적시던 빗방울이 하나도 닿지 않게 되었다. 대신 율리어스의 너른 어깨가 그녀의 팔과 닿았다.

    파드득, 새처럼 놀란 일리안은 오히려 더욱더 떨어졌다. 그녀의 몸이 거의 반쯤 우산 밖으로 튕겨 나갔다. 율리어스는 그 모습을 보다 나직이 말했다.

    “역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군.”

    “……예?”

    “내가.”

    “아니, 그게 아닌…….”

    머뭇거리며 말을 하던 일리안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제 발로 다시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율리어스와 자신 사이에 아주 조금의 틈은 남겨둔 채였다.

    그때,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숨을 들이켤 정도로 놀란 일리안은 고개를 들어 제 옆에 선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일리안과 맞닿지 않은 제 왼쪽 어깨를 턱짓했다.

    “내 옷이 모두 젖고서야 붙어서 갈 건가.”

    그의 말대로 율리어스의 어깨 한쪽은 거의 등까지 젖어 있었다. 걸어오는 내내 자꾸만 떨어지려는 일리안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그의 옷은 모두 젖고만 것이었다.

    일리안은 그제야 입을 다물고 말없이 걸음을 맞추었다. 본래라면 무슨 말이든 해서 대화를 이어갔을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허리에 닿은 차가운 손이 꽉 붙들어 매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일리안 대신 입을 연 것은 율리어스였다.

    “바게트를 좋아한다고 했나.”

    “……그냥, 저렴해서.”

    “내가 아는 이 중에도 바게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허리에 둘러진 손과는 달리 제법 일반적인 대화가 오갔다. 마음이 다소 느슨해진 일리안이 대꾸했다.

    “누구인데요?”

    “이도 성치 않은 아홉 살 어린아이에게 아침마다 바게트를 사와 던져주고 갈 정도였지.”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워낙 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간 놓치기 십상이었다.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집중했다.

    “추운 겨울에도 갓 만들어 따뜻하고 맛있다며 건네주더군. 돈이 없어서 제 몫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가, 말입니까?”

    율리어스는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단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일리안 하인리히.”

    그 이름에 숨이 턱 막혔다. 일리안은, 율리어스가 어렸던 그때의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히 희미한 추억만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너는 이번에도, 우연이라 말할 셈인가?”

    제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풀어주지 않을 것 같다고.

    “내가 헤이븐 윈터가 살아온 모든 일생에 대해 조사한다면.”

    율리어스는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단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에는, 다른 답변을 줄 건가.”

    * * *

    타피아가 구워준 빵이 들어 있는 종이 가방을 품에 안은 일리안이 저택의 문 안쪽을 바라보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타피아. 잠깐 산책 다녀올게!”

    “헤이븐 님, 헤이븐 님! 잠시만요, 그렇게 나가시면……!”

    어제는 비가 왔지만 오늘은 그 덕분인지 날씨가 맑았다.

    일리안은 타피아가 나무랄 새도 없이 저택의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곧바로 거리로 달려간 일리안은 익숙한 도심의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녀가 당도한 곳은 천 하나가 덜렁거리며 문 역할을 하고 있는 집이었다. 이가 잔뜩 나간 벽돌과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는 건물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천을 걷어 올리며 안으로 들어간 일리안이 익숙하게 집주인을 불렀다.

    “타파, 타파! 일리안이 왔어!”

    그녀는 최근 들어 더욱 자주 타파를 찾고 있었다.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타파를 찾았는데, 타파는 그녀가 죽을 때가 되었다며 혀를 쯧쯧 차댔다.

    하지만 일리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타파는 올해가 가기 직전에 죽을 테고, 일리안 하인리히는 그녀가 죽고 나서야 수도로 돌아온다.

    이전 생에선 타파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하고 겨우 장례식장에만 갈 수 있었다. 그 기억이 마음속에 남았던 일리안은 타파를 위해 더욱더 자주 발걸음했다.

    “이 할멈은 그 몸으로 어딜 갔어.”

    좁은 집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타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테이블 위로 들고 온 빵을 내려뒀다.

    일리안은 타파가 없는 사이 천장에서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컵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천장 안쪽으로 예전에 일리안이 사다주고 간 것일 찻잔 세트 위에 먼지가 쌓인 것을 발견하곤 얼굴을 구겼다.

    “낡은 거 모으는 취미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새것을 안 쓰냔 말이야.”

    일리안은 팔을 더 뻗어 새 찻잔 세트를 꺼내 들었다. 자신이 꺼내서 쓰지 않는 이상 타파는 죽기 전까지 새 식기 한번 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곧이어 그녀는 타파가 늘 하던 대로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이제 타파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타파는 돌아오지 않았다. 김을 펄펄 내며 끓던 주전자가 식도록 돌아오지 않자, 일리안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파를 찾으러 가야 할 것 같았다.

    “이 늙은인 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남자라도 생겼나…….”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천을 거둬내고 밖으로 나간 일리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타파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지만 맹인인 그녀가 멀리 가진 않았을 터였다.

    시장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가 코너를 돌았을 때였다. 길 건너에서 낡아빠진 망토를 두른 타파가 웬일로 외출복을 입은 채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그녀는 제 맞은편에 있는 일리안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일리안이 먼저 큰 목소리로 타파를 불렀다.

    “타파! 타파! 일리안이야! 대체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일리안? 기어코 또 온 게야?! 그만 좀 오라니까!”

    타파는 일리안의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지팡이를 탁탁 짚었다. 언뜻 보면 화가 난 것 같지만 일리안은 알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적어진 타파가 그녀가 오는 시간을 제법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전 생에선 바쁘게 사느라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타파가 바란 것은 찻잔 세트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새집도 아닌 일리안과의 시간이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조금 들어 올린 타파가 지팡이를 짚으며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타파는 볼 수 없었지만 일리안 또한 활짝 웃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비켜, 비켜요! 말이……!”

    “꺄악!”

    그리고 그때였다. 저 멀리서 마차를 이끈 네 마리의 말이 흥분한 모습으로 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여자의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린 일리안의 눈이 커지며 당장 타파를 향해 달려갔다.

    타파는 옆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봤다. 마차와 말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장면은 한없이 느렸다. 적어도 일리안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눈을 감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 타파, 몹시도 흥분해서 달려오는 말,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다루려는 마부.

    그리고 그 순간.

    끼익, 쾅…….

    타파의 몸이 높게 날아올랐다. 이윽고 바닥으로 떨어진 그녀의 몸은 길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녀가 누워 있는 바닥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언가에 부딪치고서야 흥분이 잦아든 말은 마부의 손에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그곳에서 숨을 쉬지 않는 이는 타파, 그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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