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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34화 (34/123)
  • 34. 바게트, 좋아하세요?

    마차 내부는 조용했다. 이따금씩 일리안이 불편할 정도로.

    넓디넓은 마차 안은 그녀가 종종 바깥에서 빌려오는 마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일리안은 어색한 얼굴로 마차 내부를 장식한 고급스러운 나무 테를 만지작거렸다.

    율리어스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차에는 그녀와 율리어스밖에 없어 일리안이 숨거나 도망칠 구석도 없었다.

    사실, 데뷔탕트에서는 대답을 촉구하는 그를 피해 도망쳤었다.

    자신은 해줄 이야기가 없는데 자꾸만 무언가를 바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말을 얼버무리며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이렇게 자신을 찾아오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적을 가른 것은 율리어스의 목소리였다.

    “마차를 멈추도록.”

    그가 제 머리 뒤에 있던 나무판자를 들어 올려 마부석에 말을 전했다. 얼마 가지 않아 마차가 멈추어 섰다.

    먼저 마차 안을 빠져나간 것은 율리어스였다. 그런 그를 멀뚱히 보고 있던 일리안의 시야로 앞서 내린 율리어스가 우산을 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내려라.”

    “예?”

    자신도 내리는 것인지 몰랐던 일리안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차에 이어진 자그만 계단을 밟고 내려가자 착,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로 우산이 펼쳐졌다.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자 가이우스가 다정히 웃으며 서 있었다.

    “율리어스 님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

    “……지시, 요?”

    “예. 비가 많이 오지 않습니까.”

    저 멀리 저벅저벅 걸어가는 율리어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느끼는 것은, 일리안뿐만이 아니었다. 가이우스는 그녀의 손에 우산을 쥐여주며 말을 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저는 이곳에 남아 기다리겠습니다.”

    “어딜 가는 겁니까?”

    “글쎄요. 그것에 관해선 저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웃음기가 서린 가이우스의 눈동자를 보던 일리안이 눈인사를 한 뒤 그를 따라갔다.

    이미 율리어스가 한참을 앞서가 제법 거리가 된다고 생각해 걸음을 급히 했는데, 생각보다 그는 멀지 않았다. 타박, 타박. 거리가 가까워지자 일리안의 걸음도 덩달아 느려졌다.

    발밑을 바라보자 그의 바지 밑단이 튀어 오르는 빗방울에 제법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우산이 커 상의는 젖지 않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신발도 꽤나 젖었을 것이다.

    기실, 율리어스와 이 거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일리안은 이 거리를 알고 있었다. 크라운 1번가. 수도인 드발릭에서도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유명한 거리였다. 일리안이 이곳을 아는 이유는, 그녀가 나고 자랐던 동네이기도 한 탓이었다.

    타파와 처음 만났던 곳이기도 하였고, 의뢰 탓에 지방에 내려갔다가 다시 수도에 돌아왔을 때에도 이곳에서 집을 구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몇몇 익숙한 상가들이 보였다.

    “율리어스 님, 어딜… 어?”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일리안이 그에게 물으려는 순간, 율리어스가 코너를 돌았다.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도 어서 그를 따라갔다.

    율리어스가 그곳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

    낡은 천사 그림이 그려진 간판이 서 있었다. 우산을 쓴 율리어스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름다운 실리트으ㅣ 빵집」

    가게의 문에 붙어 있는 나무패조차 오래되었는지, 나무패의 글자 ‘의’의 자음 ‘ㅣ’를 수리한 흔적이 보였다. 빵집의 이름도 우스웠다. 결국 아름다운 게 실리트라는 뜻인가, 빵집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일리안과 율리어스 중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일리안은 율리어스에게 이만 마차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그가 가게의 종소리를 들으며 안으로 들어선 탓이다.

    일리안마저 우산을 접고 가게로 들어가자 고소한 빵 냄새와 먼지 냄새가 동시에 났다. 흰 기름종이 위에 올라간 빵들은 대개 오래되고 퍽퍽해 보여 그다지 구매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위로 파리 1마리가 정신 사납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머, 어서 오세요!”

    하이톤의 음성을 가진 여자가 안쪽에서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급하게 뛰어나왔다. 율리어스는 이미 가게의 주인은 안중에도 없이 창가 쪽 빵들을 향해 몸을 돌린 채였다.

    “찾으시는 빵이라도 있으세요? 마침 막 만든 쿠키를 내놓으려는 참인데…….”

    “예? 아니요, 괜찮습니다.”

    들어온 것은 율리어스였지만 일리안은 얼떨결에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가게 주인 여자의 얼굴에는 세월의 흐름이 빗겨가지 못한 듯, 주름이 져 있었다.

    일리안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크라운 1번가의 오래된 빵집 중 하나인 이곳은 그녀가 홀로 살았던 집과도 멀지 않았다. 이곳을 나가서 가게 왼쪽으로 꺾으면 곧바로 그녀가 살던 건물이 나오리라.

    젊었던 일리안은 수중에 가진 돈이 많지 않아 종종 이곳에서 빵을 사다 먹었다. 실리트의 제빵 실력이나 위생 관념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제일 가깝고 제일 저렴해서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좋아하는 빵이라도 있으세요?”

    실리트가 주름진 입가로 생긋 웃었다. 그녀의 나이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제법 사근사근한 미소라고 생각할 법도 했다. 일리안은 평소에도 실리트가 그런 식으로 오래된 빵들을 팔아넘긴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슬쩍 질문을 무시했다.

    “샌드위치? 마침 점심시간이네요! 저 신사분이랑 같이 요 앞 공원에서 가볍게 드셔도 좋을 거예요. 아니면, 비가 오니까 안에서 드셔도 되고요.”

    일리안은 심드렁한 눈으로 샌드위치가 놓인 유리판을 내려다보았지만, 아무래도 분위기가 묘한 율리어스보다는 그녀가 더 만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실리트가 몸을 바짝 붙여왔다.

    “샌드위치, 싫어합니다.”

    “……응? 아하하, 그러시구나아.”

    단호한 거절에 실리트가 멋쩍게 웃으며 조금 떨어졌다. 자신의 판매술이 그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은 모양이었다. 일리안과 율리어스에게 보이지 않도록 입술을 삐죽인 실리트가 주방으로 돌아갔다.

    겨우 혼자가 된 일리안은 홀로 넓지 않은 빵집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리운 음식이기도 했으니,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 사볼 요량이었다.

    바게트?

    실리트의 거지 같은 제빵 실력으로 만든 빵 중에서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맛볼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난 일리안이 손을 뻗었다.

    “……!”

    “…….”

    손이 부딪쳤다.

    좁은 빵집 안에서 일리안과 율리어스를 제외하고 있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손이 부딪칠 인물도 1명뿐이었다.

    일리안과 율리어스는 가로로 누운 바게트를 한쪽씩 붙잡고 있었다. 순간 손이 부딪쳐 어색해했던 일리안은 부러 목을 가다듬으며 그것을 조금 더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저도 이거 좋아하는데요.”

    “놔라.”

    정확히 말하자면 실리트의 빵집에서 먹어줄 만한 음식이 이 바게트뿐이었다. 아니, 사실 빵과 햄, 야채 따위를 겹겹이 쌓은 샌드위치도 먹을 순 있었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일리안이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샌드위치 드세요. 여기 샌드위치 먹어줄 만하니까.”

    “놓으라고 했다.”

    “……바게트가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놓습니까?”

    놓으면 가져갈 거잖아!

    속 좁아 보일까 봐 차마 그렇게까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리안도 양보하기는 싫었다. 나름대로 자신의 유년 시절 추억이 담긴 맛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머리가 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제법 돈을 모으기도 하였고, 지방을 돌며 의뢰를 수행하느라 이 거리에 돌아올 일이 없었다. 일부러가 아니라면 이곳에 다시 찾을 일도 없으니 이번 바게트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율리어스야, 원체 음식에는 욕심이 없던 아이가 아닌가. 거기다 공작성의 주방장인 사라는 제과 제빵 실력으로 유명한 이였다. 그녀에게 율리어스가 바게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샌드위치는, 네가 먹어라.”

    “저 샌드위치 싫어합니다. 누가 줘도 안 먹었다고요. 의뢰에 나…, 아니, 타피아도 제 도시락에 샌드위치는 안 넣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일리안은 시간이 지난 샌드위치를 씹었을 때의 시들시들 죽어버린 야채의 식감이 싫어 임무에서 보급으로 나누어줘도 입도 대지 않았다.

    그러자 율리어스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예?”

    “왜 싫어하느냐고 물었다.”

    “식감이 싫어서요. 시간이 오래 지나면 야채가 숨이 죽잖습니까. 양상추든 양배추든……. 그게 싫습니다.”

    그렇게 일리안과 율리어스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주방에서 다시 나온 실리트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으응? 바게트? 어머. 제가 바게트에 자신 있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그런데 이 신사분은 차암 잘… 응?”

    그들이 제 빵 하나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안 실리트가 기세등등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말을 멈추었다. 율리어스의 얼굴을 확인한 직후였다.

    실리트가 입술을 떨며 말했다.

    “너… 유, 유리 아니니?”

    율리어스는 그 물음에 바게트에서 손을 떼어내고 실리트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율리어스를 삿대질했다.

    가게 안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실리트는 꼭 율리어스를 아는 것처럼 굴었다. 좋은 사이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러자 일리안이 친근하게 웃으며 실리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율리어스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을 감싸 고이 접어주었다.

    “죄송합니다만, 헷갈리셨나 봅니다. 이분은 리하르트 공작 전하십니다.”

    “고, 공작 전하?! 어, 어머, 어머!”

    실리트가 유명인이라도 본 듯 박수를 두어 번 쳐대었다. 신문에서 자주 접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실리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그때, 일리안이 데려온 시건방진 꼬맹이랑 닮은 것 같은데…….”

    “리하르트 공작 전하가 크라운 1번가에 올 일이 무어가 있다고요. 자꾸 그러시면 귀족 모독죄로 잡혀가세요, 아주머니.”

    헛, 하며 제 입을 막은 실리트는 슬쩍 율리어스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다지 화난 것 같지는 않은 분위기에 실리트가 물러났다. 괜한 불똥이 튀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일리안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계산대로 가 실리트와 바게트의 계산을 마무리했다. 한 손으로는 바게트를 껴안고서 우산을 펼쳐 든 일리안이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 뒤에는 율리어스가 있었다.

    빗줄기가 한층 더 거세어져 있었다. 일리안은 우산을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두들기는 빗줄기에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내가 유리가 아닐 것이란 확신은, 어디서 나왔나.”

    “……무슨.”

    “아는 사이였을 수도 있겠지. 어째서 네가 확신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아무래도 실리트가 율리어스를 짐작하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일리안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냥, 일이 복잡해지지 않았으면 해서요. 혹시 아는 사이였습니까? 그러면 미안하게 됐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을 넘긴 일리안은 자리를 뜨려 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한시가 급하다는 듯 바삐 걸어가던 일리안은 문득 뒤따라오는 기척이 없다는 사실에 뒤를 돌아보았다. 율리어스가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일리안은 뒤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율리어스에게 마차로 가자는 말을 건네려는 참이었다.

    딸랑이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실리트 빵집의 문이 열렸다. 나온 것은 실리트였다.

    “얘! 너 유리 맞지?! 그 싸가지 없던 아이! 너 맞지?!”

    결국 멍청한 실리트가 일을 치르고야 말았다. 일리안은 돌아가는 상황에 머리가 아파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서 머리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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