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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33화 (33/123)
  • 33. 데려다줄게

    율리어스는 개인적인 사교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리안 하인리히 시절부터 알고 있던 그의 불문율이었다.

    일리안은 그의 경호를 하느라 1년을 따라다녔지만, 황성에서 열리는 공식 행사가 아닌 이상 거동을 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가, 헤이븐 윈터의 데뷔탕트에 온 것이다.

    그 소문은 떠들썩하게 퍼져 나갔다. 리하르트 공작이 돌아온 것과 더불어 헤이븐 윈터의 사교 파티에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귀족가에서도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곳은 무엇보다도 파란 화원이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의심하던 귀족 영애들은 순식간에 그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헤이븐 님, 어쩌다 율리어스 님과 그렇게 친해지신 건가요?”

    “헤이븐 님, 그럼 공작성에도 자주 들어가시는 건가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데뷔탕트를 무사히 치른 일리안이 파란 화원에 들어가자 화원의 거의 모든 영애가 그녀를 둘러쌌다. 일리안은 그들에게 떠밀려 가장 상석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귀족 영애들 중 계급이 낮은 몇몇은 그녀를 극존칭으로 대하기도 했다. 일리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의 영애들도 곳곳에서 보였다.

    다른 화원의 이용자들이 그녀가 이곳 파란 화원을 이용한다는 소문을 듣고 옮겨든 것이었다. 일리안은 다른 때보다 내부가 터져 나가는 파란 화원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리트릭 놈만 좋은 일이겠군.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리안은 자신을 둘러싼 영애들을 다독이며 말문을 열었다. 일리안에게 재촉하기 바쁘던 이들이 순식간에 입을 닫고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아닙니다, 리하르트 공작 전하와 그렇게 친하진 않은걸요.”

    “네? 설마요……. 데뷔탕트 때 단둘이서 붙어계셨다고…….”

    “제 검술 스승이 가이우스 씨라, 그분 때문에 참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일리안이 단호하게 선을 긋자 영애들 중 몇몇은 제법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일리안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평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리하르트 공작 전하의 얼굴은 저도 처음 뵈었습니다.”

    “하아……. 역시 그런가요.”

    그녀가 이리도 냉정하게 구는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 귀족가에선 일리안에 대한 율리어스의 특별 대우를 보고서 그녀와 율리어스의 염문설이 퍼 져나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리트릭에게 듣고서 알게 된 일리안은 어서 소문을 정정하기 위해 오늘 파란 화원에 온 것이었다.

    다른 것은 모두 대강 넘어갈 수 있지만, 적어도 율리어스와 이상한 소문이 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자신보다 정신적으로 열다섯 살이나 어린 아이와 염문설이라니, 민망함에 귀가 달아올랐다.

    입을 다물고 더 이상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일리안에게 영애 중 1명이 질문을 던져왔다.

    “그럼 리하르트 가문으로부터 후원은 어쩌다 받으시게 된 건가요?”

    “…….”

    디버튼 분재원에 들어가기 위해 잡초나 뽑던 이야기, 그의 불면을 고쳐주기 위해 공작성을 기어오른 이야기를 할 수 없던 일리안은 역시나 대답하지 못했다.

    곤란해하는 그녀를 도와준 것은 의외로 비앙카였다.

    “굳이 그런 걸 묻는 이유가 뭔가요, 스키피오 영애? 설마 본인도 리하르트 가문에 후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길 바라죠.”

    차갑게 대꾸한 비앙카는 천천히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 모습이 고귀한 후작가의 영애답게 우아했다.

    비앙카에게 비난을 들은 영애는 얼굴을 붉히며 슬쩍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곁에 있던 영애들도 살며시 비앙카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두서없이 질문이 터져 나오던 조금 전과는 달리 겨우 분위기가 정돈되고 있었다. 일리안은 도움을 준 비앙카에게 눈길을 주며 씩 웃어 보였다.

    비앙카는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헤이븐, 이곳 파란 화원의 주인인 리트릭 경과는 어떤 사이신가요?”

    그녀는 종종 리트릭을 자신의 기사로 데려오곤 했었다. 정확히 말해서 일리안이 데려온 것은 아니었고, 리트릭이 영애들을 구경하고 싶다며 제멋대로 따라온 것이었다.

    그런 리트릭이 파란 화원의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이 퍼져 나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가게를 둘러보러 온 리트릭의 어머니가 기사 제복을 입은 그의 귀를 붙잡고 질질 끌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리트릭의 부모님은 이곳 수도 드발릭에서 제법 유명한 수완가였다. 비록 작위는 없었지만 재산이 상당한 리트릭에게 관심을 가지는 영애들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아뇨, 리트릭은 친구입니다. 그도 가이우스 씨를 존경하는 기사 중 1명이라 친해지게 되었죠.”

    일리안의 말에 질문을 던진 영애는 화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율리어스보다 실질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리트릭에게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도 자주 붙어 다니는 리트릭과 일리안에 대해 더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리안과 리트릭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남녀 간의 분위기는 조금도 흘러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럼, 윈터 영애가 오실 때마다 화원 앞에서 기다리시는 신사분은요?”

    일리안은 순간 그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질문을 던진 영애의 말 속 신사는 다름 아닌 에릭이었다.

    화원에 다니는 동안 일리안을 데리러 온 것은 에릭이었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에릭은 늘 말없이 나와 파란 화원의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일리안이 귀찮으면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해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대답 대신 매일같이 화원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에릭의 겉모습은 열일곱 살답지 않게 묵직해 보였다. 율리어스만큼이나 잘 성장한 그의 생김새가 평민 같지 않으니 영애들 중 몇몇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 친구도……. 제가 친하게 지내는 이입니다.”

    일리안이 겨우 대답하자 영애들 중 1명이 창밖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치로 말했다.

    “부슬비가 내리는걸요. 그럼, 오늘도 그 신사분께선 우산을 들고 윈터 영애를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어머, 소설 같아.

    한 영애가 살풋 웃으며 속닥였다. 회색 정장을 입은 일리안에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로맨스 소설이었지만, 영애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 듯했다.

    * * *

    일리안이 파란 화원을 빠져나온 것은 늘 그랬듯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오늘도 매끄럽게 영애들을 상대하던 일리안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다른 날과는 달리 영애들 또한 그녀를 따라 슬슬 화원을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의 주인공인 헤이븐 윈터를 보았으니 이제 그만 자리를 떠도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일리안은 별수 없이 화원의 밖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뒤를 열댓 명의 영애가 따라나섰다.

    화원의 입구는 긴 편이었다. 바깥 대문에서 내부로 들어오기까지 그 이름답게 아름다운 꽃으로 꾸며져 있었다.

    비를 막아주는 천장이 설치된 곳은 바깥 대문 직전까지였다. 그 이후로는 마차를 타든, 우산을 쓰든 해야만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어머, 오늘도 계시네요!”

    일리안의 뒤를 따라가던 한 영애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말대로 바깥 대문 근처에는 검은색 프록코트를 입은 익숙한 뒷모습이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다들 귀족 가문의 영애이니만큼 그녀들을 기다리는 마차들은 입구에 즐비했다. 그럼에도 가장 관심을 받는 것은 에릭이었다.

    일리안은 어쩐지 머쓱한 얼굴로 대문에 다다랐다. 인기척을 느낀 에릭이 고개를 돌려왔다.

    “야, 인마. 비가 오는데 뭘 기다리고 있어?”

    비 맞고 가도 상관없는데.

    그녀가 농담처럼 말하며 에릭을 올려다봤다. 비가 오는 날에 비박을 해본 경우도 적지 않았던 일리안은 못내 민망한 눈치였다.

    그런데 눈이 마주친 에릭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에릭은 어딘지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 순간, 일리안의 귓가로 자신을 따라 나온 영애들의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나왔군.”

    에릭의 반대편에는 율리어스가 서 있었다. 대문에 가려져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리하르트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 앞에서, 검은색 우산을 쓰고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율리어스는 옅은 안개 탓인지 환상 같았다. 일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자 율리어스가 우산을 들고 성큼 다가왔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돌아가려 했다.”

    그녀가 당황한 것은 율리어스의 뜬금없는 등장 때문이 아니었다.

    일리안은 오늘 하루 종일 율리어스와 직접적인 친분은 없다며 선을 그었다. 그와의 염문설을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무마시켜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일리안은 애써 당황한 내색을 숨겨야만 했다.

    “여… 긴 어쩐 일이십니까, 율리어스 님?”

    “우린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해야 할 이야기?

    그 순간 영애들의 수군거림이 빗속을 뚫고 커졌다. 누가 들어도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당황한 일리안이 우산을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잊고 한 발 내디뎠다. 율리어스에게 눈짓으로 제발 그만두라는 무언의 압박을 종용했다.

    “비가 오잖아, 헤이븐.”

    일리안은 제 뒤로 밀착해 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에릭이 무뚝뚝한 낯빛으로 그녀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체격이 큰 에릭 때문인지 우산 아래는 좁았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을 땐 차가운 비 사이로 따뜻한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율리어스는, 왜인지 기분이 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제껏 그가 살아오며 관심을 가진 이는 일리안 하일리히가 유일했고, 그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일리안에게 늘 목마름을 느끼던 율리어스의 앞에 나타난 것은 그녀와 몹시도 닮은 저 아이였다. 죽어도 자신은 탐낼 수 없던 그녀를 대신하는 것처럼.

    마차 앞에 서 있던 율리어스는 결국 자신이 먼저 발을 뻗었다. 아직 고개를 돌려 에릭을 바라보던 그녀의 손목을 잡아 쥐고 제 쪽으로 당겨왔다.

    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율리어스의 우산 아래로 들어왔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일리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율리어스를 올려다봐야만 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우산을 조금 들어 올린 그는 제 앞에 서 있는 에릭을 주시하고 있었다.

    “넌……. 그때 본 놈이로군.”

    “제 이름은 ‘놈’이 아니라, ‘에릭’입니다.”

    이제는 홀로 우산을 쓰고 있는 에릭은 딱딱한 얼굴로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그는 늘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지금처럼 기분이 상해 보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뒤로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단지 그들 사이에 낀 일리안만이 미간을 찌푸리고 둘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영애들 중 1명의 중얼거림이 그녀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어머, 사랑싸움인가 봐.”

    일리안은 그 순간 모든 일이 망했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영애들 중 단 1명도 마차에 오르지 않고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련의 일들을 구경한 이들이 제 가문으로 돌아가는 순간, 율리어스와의 염문설이 또 한 번 부풀려 지리라는 것은 확실하리라.

    “헤이븐.”

    일리안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에릭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으로 가야지. 데려다줄게, 가자.”

    그 순간, 일리안은 제 손목이 꽉 조여지는 것을 느꼈다. 일리안을 당겨오느라 손목을 잡았던 율리어스가 아직도 놓지 않고서 오히려 그곳에 힘을 주어 잡고 있었다.

    일리안은 제 손목을 붙잡은 그의 손을 곤란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자신은 그의 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가 아홉 살이던 때에도, 모두 성장하고 난 뒤에도. 볼을 긁으며 고민하던 그녀의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데려다주는 건,”

    “…….”

    “알아서 하도록 하지.”

    율리어스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에릭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로 마차에 올라탔다.

    손목이 잡힌 일리안은 입만 뻐끔거리다 그의 마차에 올라타야만 했다. 뒤를 돌아봤을 때에는 에릭이 여전히 우산을 쥔 채 그곳에 서 있었다.

    아니, 우산의 손잡이를 부러지도록 잡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더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은, 율리어스가 탁 소리가 나도록 마차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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