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32화 (32/123)
  • 32. 사기꾼

    자작 부인과 실비아는 제법 뻔뻔한 얼굴로 파티장을 활보했다. 그들의 등장으로 일리안이 겨우 무마시켜 놓았던 파티의 분위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실비아와 자작 부인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리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헤이븐, 네 데뷔탕트를 축하한단다.”

    “열다섯 살이 된 것을 축하해, 헤이븐.”

    실비아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작게 박수를 쳤다. 그 모습이 꼭 이미 망가진 분위기의 파티를 축하하는 것 같았다.

    자작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얼마 없는 사람들이 일리안을 향해 수군거린다는 것을 알고는 제 입매를 부들거리며 겨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세르앙 자작 부인, 그리고 실비아. 축하해 주어 고맙군요.”

    일리안은 그런 실비아와 자작 부인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짧게 미소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그러자 눈썹을 꿈틀거린 것은 자작 부인 쪽이었다. 눈물이라도 훔치고 파티장을 뛰쳐나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무렇지 않아 보이니 배알이 뒤틀렸다.

    “그렇지, 참! 실비아. 어서 가져온 선물을 헤이븐에게 주렴.”

    “어머, 제가 깜빡 잊고 있었네요. 헤이븐, 네 데뷔탕트를 축하하는 의미로 가져왔어.”

    실비아는 해맑게 웃으며 일리안에게 포장이 된 무언가를 건네었다. 자작 부인도 자애로운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열어보는 게 어떻겠니, 헤이븐? 우리가 고심해 골라온 선물이란다.”

    일리안은 말없이 실비아가 건넨 물건의 포장지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적어도 포장지만큼은 고급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제는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설마 독약이 있기를 하겠는가, 마법 폭탄이 있기를 하겠는가.

    일리안이 무신경한 얼굴로 포장지를 풀자 그 속으로 책 1권이 나왔다.

    제목은 「리하르트 일대기」였다.

    “네가, 풉, 리하르트 가문을 참 좋아하는 것 같기에 준비했어.”

    실비아는 말아 쥔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킨 그녀가 일리안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어때, 마음에 들어?”

    “실비아. 그런 걸 묻고 그러니? 리하르트 가문이 얼마나 좋으면 꿈까지 꾸는 아이인데 설마 안 좋을까. 응.”

    그들은 누가 보아도 일리안에게 수치를 주려고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품위 없는 그 모습에 몇몇 귀족들은 그들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의 분위기는 실비아와 자작 부인이 하는 행태를 몹시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발 당한 일리안이 어떻게 나올지를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파티장의 문은 그 와중에도 계속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영애들이 파티장의 일이 궁금해 찾아온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흥미로운 책인데요.”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일리안은 무덤덤한 얼굴로 책을 한번 들어 보이고는 제 팔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대고 있던 귀족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시끄러운 상황이 나오지 않자 아쉬워했다.

    책을 받고도 일리안에게 타격이 없는 것 같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실비아와 자작 부인이었다. 그들은 일리안의 무신경하기 짝이 없는 저 태도가 몹시도 비위가 상했다.

    그래서였다. 실비아가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은.

    “아니면 리하르트 가문이 아니라 율리어스 공작 전하를 좋아하는 거였니? 그렇담 공작 전하의 위인전으로 사줄 걸 그랬네.”

    그 순간 일리안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만약 이곳이 파티장이 아니었고, 그녀의 허리에 검이 있었다면 곧장 검을 빼어 들었을 정도로 차가운 얼굴이었다.

    “뭐라고 했습니까?”

    “뭐, 뭐……? 그, 그렇게 보면 누가 무서워할 줄 아니?”

    일리안은 성큼 걸어 실비아의 바로 앞에 다가섰다. 키가 무척이나 작은 실비아보다는 조금 큰 일리안이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실비아의 얼굴 위 가득 퍼진 주근깨가 일리안의 눈으로 빼곡하게 들어왔다. 실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렇게 거리를 좁히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각한 눈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무슨 짓이야, 헤이븐 윈터!”

    꺄악!

    자작 부인의 노성과 함께 실비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일리안이 당장이라도 검을 들어 자신의 목을 찔러올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는 그런 살기가 담겨 있었다.

    툭.

    그리고 그때, 실비아의 이마로 차가운 가죽이 닿아왔다. 그녀가 일리안에게 선물한 「리하르트 일대기」의 가죽 표지였다.

    “책을 선물해 준 것이 고마워 장난을 쳤을 뿐입니다, 자작 부인. 실비아와 저는 사촌지간인걸요.”

    그렇게 말한 일리안은 씩 웃으며 제 오른손에 쥐어진 책을 두어 번 흔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자작 부인과 실비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작 책 따위에 소리를 지른 게 부끄러운 것이 반, 그리고 나머지는 일을 이렇게 만든 일리안에 대한 화 때문이었다.

    “되도 않는 거짓말은 이제 그만 해라, 헤이븐 윈터!”

    “거짓말이라면?”

    자작 부인이 침이 튀도록 소리를 질렀다. 일리안은 다시금 그녀들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지며 여상한 얼굴로 대꾸할 뿐이었다.

    “네가 리하르트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말이다!”

    “어차피 곧 리하르트 가문이 돌아오면 모두 들통 날 거짓말을 대체 왜 하는 거야?”

    이 파티장에 모여든 이들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비아는 그런 내부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한층 더 기세등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데뷔탕트가 그렇게 기대됐니? 거짓말을 해서라도 파티를 열고 싶었어?! 이건 사기라고, 사기. 이 사기꾼아!”

    일리안은 독이 바짝 올라 소리치는 실비아를 바라보며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꼭 필요한 싸움이 아니라면 대충 넘어가자는 게 일리안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여태껏 그녀는 자작 부인과 실비아가 하는 양을 호의로 넘어가 주기도 했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타피아를 비롯해 제 주변 이들이 모두 기대하고 있던 데뷔탕트를 친척 간의 추잡한 싸움판으로 만들기가 싫어서였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증명은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주변 귀족들은 모두 일리안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무언가를 바라는 눈치였다. 만약 그러지 못하고 실비아와 자작 부인의 의도대로 되는 순간 데뷔탕트는 완전히 실패할 것이었다.

    일리안은 타피아를 향해 손짓했다. 율리어스와 작성한 후견인 등록증 원본이 집안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져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가져오면 조금이나마 증명은 되겠지. 일리안이 귀찮아하는 얼굴로 일을 처리하려던 순간이었다.

    “확실히 사기로군.”

    그녀의 뒤에서 나직하지만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일리안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리하르트 일대기」를 빼 들었다. 일리안의 귓속으로 책 표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 또한 들려왔다.

    “리하르트 가문에선 출판한 적 없는 책이다만.”

    그와 동시에 책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커다란 소음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일리안이 놀란 눈으로 제 뒤를 바라봤다.

    율리어스였다.

    3년 만에 돌아온 그는 몹시도 달라져 있었다. 얼굴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소년의 기운은 완전히 사라진 채, 이미 다 커버린 키로 일리안의 바로 뒤에 붙어서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에는 천사가 내려왔다고 불려지던 얼굴이었다. 율리어스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어딘지 다가갈 수조차 없는 냉엄한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는 일리안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실비아와 자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리하르트 가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책을 함부로 출판하는 곳이 아직도 있었나?”

    실비아와 자작 부인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율리어스의 존재가 놀라워서인지, 그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답하라.”

    “그, 그, 그게, 그게……. 그게 아니라, 저희는 그저 사, 사, 상점에서 샀을……!”

    “그 상점의 이름은.”

    실비아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자작 부인이 손을 덜덜 떨며 겨우겨우 대답을 이어가고 있었다.

    “저, 저흰 당연히 헤, 헤이븐이 거, 거짓, 거짓말을 하는 줄 알고,”

    “상점의 이름을 물었다.”

    “네, 네?”

    “네 추잡한 변명 따위가 아니라 상점의 이름을 물었다고 했을 텐데.”

    세 번은 말해야만 알아듣는 머저리인가?

    율리어스의 입에서 싸늘한 비난이 흘러나왔다. 일리안은 그의 여전한 독설을 듣고서야 정말로 그가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자작 부인은 벙어리처럼 입을 벌렸다 닫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율리어스의 화를 더 부추긴다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말할 가치를 못 느끼겠군. 가이우스.”

    “예, 공작 전하.”

    “세르앙 가문과 이 책의 출처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율리어스는 제 발치에 떨어진 책을 구둣발로 짓밟았다. 고급스러운 양장본이었던 책이 한순간에 구겨졌다.

    그는 더 이상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그 아래에 있던 책이 발에 치여 실비아의 앞으로 떠밀려 왔다.

    실비아가 멍한 얼굴로 제 앞에 떨어진 책을 주워 들었다. 그녀의 귓속으로 율리어스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꺼져, 라고.

    * * *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사람들과 다소 떨어진 곳으로 율리어스를 안내한 일리안이 다급히 물어왔다.

    실비아와 자작 부인이 파티장에서 쫓기듯 나가고 얼마 안 되어 윈터 가문의 저택은 터질 듯이 사람이 늘어났다.

    3년 만에 제국으로 돌아온 율리어스가 그녀의 데뷔탕트에 왔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흘러간 덕분이었다. 고작 남작 가문 영애의 데뷔탕트에는 제국의 몇 없는 공작과 후작이 직접 참석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지금도 곳곳에서는 함께 서 있는 일리안과 율리어스를 향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오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파란 화원의 영애들은 간절해 보일 정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리안은 그들을 피해 파티장의 2층으로 온 것이었다.

    “서너 시간쯤 되었겠군.”

    “……예?”

    “이해하지 못했나?”

    서너 시간 되었다는 그 말을 그녀가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단지 일리안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결국 제국에 돌아와서 조금도 쉬지 않고 그녀의 데뷔탕트에 참여했다는 속뜻이었다.

    일리안은 그제야 고개를 까닥거리며 율리어스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검은색 튜닉을 비롯해 대부분이 새까만 옷은 금실이 수놓아져 있었다.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그 옷은 누가 보아도 전쟁에 참여할 옷이 아니라 파티에 참석할 옷이었다.

    그 말은 곧 율리어스가 제국에 돌아오자마자 파티에 갈 준비를 마치고 이곳에 왔다는 뜻이었다. 준비 시간이 서너 시간이라면, 참석 준비만 해도 제법 빠듯할 시간이었다.

    “대체 왜……. 뭐가 급해서 이렇게 오신 겁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3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일리안의 키는 제법 커져 있었다. 너무 갑자기 성장해 무릎에 튼살이 생길 정도였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율리어스에 비하자면 어깨에도 겨우 미치는 수준이었다. 일리안은 턱 끝을 바짝 올리고서야 율리어스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율리어스는 성큼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더욱더 넓어진 그의 어깨에 일리안의 모습은 뒤에서 보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죽지 않고 돌아왔으니까.”

    그녀를 삼킬 것처럼 가까이 간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일리안은 떠나기 전 그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지 않고 돌아온다면, 그때는 이야기할 건가?”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눈동자는 뱀처럼 기묘하게 가늘어져 있었다.

    그가,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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